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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보기를 좋아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로서리쇼핑만 가면 갑자기 흥이 나는 것 같고, 가게에 도착하면 천방지축처럼 싸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아내가..
"자기... 장 보는 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내 두꺼운 뱃살을 헤집고, 두터운 피하지방을 뚫고, 저 십이지장과 췌장 그리고 쓸개 사이에 깊숙히 한쪽에 숨겨져 있던 나의 마초본능은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무슨 소리야? 남자가 무슨 장보기를 좋아해? 그냥 물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궁금해서 그런거야... 아. 이. 놈. 의. 캐. 나. 다. 경. 제..."
그렇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감기와 사랑과 장보기는 숨길 수가 없는 법이라고...
며칠을 끙끙 앓고 난 후, 소주를 한잔 진하게 걸치고, 결국은 2년여 전에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말았다.
"자기야... 아무래도 나 장 보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
그 이후로 아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장보기를 즐기고 있다. 아내도 은근히 나의 커밍아웃을 바랬는 지도 모른다.
이제 장보기는 아예 나에게 맡겨놓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무래도 장보기의 즐거움은 나의 마초본능보다는 훨씬 큰 것 같다.
일주일 중에 목요일은 나에게 두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날이다.
첫번째는 이제 주말이 가까와 오고 있어서 장보기날이 멀지 않았다는 그런 의미이며...
두번째는 매일 아침에 재깍재깍 배달되어오는 전단지 뭉치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집 앞에 꽂쳐있는 전단지 뭉치를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예전에는 이 전단지 돌리는 사람이 불성실했는 지 목요일 아침에 잘 보이질 않고, 늦게 올 때도 있고, 아예 안 올 때도 있곤 했었다...
그러면 얼마나 하루가 불편한 지... 회사에 가서도, 전단지 언제 올까 걱정하고, 이번 주에 혹시라도 안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전단지 돌리시는 분이 바뀌었는 지... 지금은 재깍재깍이다. 눈이오나, 폭풍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한결같다.
언젠가 그 분을 보면 꼭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면서 커피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다.
아니.. 커피가 뭐야.. 소주라도 한 잔 꼭 대접하고 싶다...
남들보다 빨리 일어난 목요일 아침, 아들내미 밤새 싸느라고 축 처져 있는 기저귀를 갈고, 부엌으로 가서 도시락 챙기고, 그리고 토스트와 커피 한 잔을 가지고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경건하게 모셔온 전단지 뭉치를 옆에 두고, 커피 한잔과 함께 본격적인 장보기를 시작한다.
나의 장보기 단계는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전장보기, 본장보기, 그리고 후장보기... 아... 단어가 좀 이상하다... 바꿔야겠다..
앞장보기, 본장보기, 뒷장보기...
어쨌든 앞장보기 단계에서는 전단지 철저 분석시간이다.
우선 전단지를 분류한다. 즉, 철물점이나, 가구점이나 백화점 같은 쓸데없는 전단지들은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여성속옷 전단지들은 아내 모르게 잠시 눈길을 보내다가, 역시 한쪽으로 곱게 치우고, 가장 필요한 그로서리 전단지들만 차곡차곡 모아놓는다.
그리고 아침이므로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그 전단지들을 훑어보면서 대충 사야할 품목에 동그라미를 친다.
이 작업을 흔히 초벌작업이라고... 나 혼자 부른다. 이렇게 대강적인 스캔을 마치고, 회사로 간다.
아... 목요일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건지..
겨우겨우 회사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이제 본작업에 들어간다.
즉, 전단지를 꼼꼼히 살피면서 사야할 품목들을 하나하나 옮기기 메모지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앞장보기의 단계에서도 마지막 리터치가 필요하다.
즉, 메모지를 다시 확인해서 세일이 아니라도 사야할 품목이 없는 지, 그리고 중복된 항목은 없는 지... 중복이 되었다면 어디가 더 세일을 많이 하는 지...
이러한 꼼꼼한 작업을 마치면 드디어 장보기 첫번째 단계가 끝난다.
드디어 토요일이다... 장보는 날이다...
오늘따라 아내도 몸이 안 좋다고, 나 혼자 장을 보라고 허락을 해 준다.
평소 때에는 아무거나 막 사 온다고 절대 혼자 보내지 않는 그런 아내이기에,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
마음 변하기 전에 껌딱지... 아들내미 데리고 출발한다.
그로서리 상점에 도착한다...
부스럭부스럭 장 볼 메모지를 꺼내고, 귀에 음악을 꽂는다.
아직도 내 스스로 신해철추모기간이기 때문에 오늘도 신해철 음악과 함께 장보기를 시작한다.
"♬ 니가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파격세일"
마음 속으로 노래와 추임새를 흥얼흥얼거리면서 마켓에 들어선다.
가끔 이렇게 마음 속으로 하다가, 정말 입으로 노래가 나와서 주변 사람이 흠칫흠칫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마켓에 가도 내 나름대로의 장보기 동선이 있다.
첫번째는 과일과 야채 코너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빵 코너를 살짝 거치고, 정육 코너로 접어든다.
보통 이 동선에서 장보기의 7~80%가 결정된다.
장을 보면서, 카트에 하나씩 하나씩 채우면서 스스로 일주일 식단도 정리한다...
'요 사과는 딸내미 월요일 도시락, 딸기는 수요일 도시락... 오... 닭이 싸네... 목요일 저녁쯤에 백숙을 할까...?'
'가만보자... 금요일 안주는 요거 살짝 구워먹고, 토요일에는 남은 걸로 찌개를 하면 되겠군...'
이미 카트는 이런저런 아이템으로 차 오르기 시작한다.
우유, 치즈, 계란 등의 유제품 코너를 거치고, 냉동식품 쪽으로 가서 스캔만 하고 쓱 지나간다.
다음은 커피, 밀가루 등의 코너, 그리고 소스 등의 코너도 그저 스캔하면서 정말 대박아이템만 찾는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런 아이템들은 찾기가 어렵다. 1달에 1번 득템을 할까말까... 하는 수준이다.
중요한 섹션 중의 하나인 인터네셔널 푸드 섹션이다.. 꼼꼼하게 세일 아이템을 찾는다.
비록 전단지가 있지만, 모든 정보가 전단지에 있는 건 아니다... 쇼핑 도중에는 오직 내 눈과 감만 믿을 뿐이다.
장보기 목록 메모지는 그저 거들뿐...
이전에는 여기까지 돌면 보통 한 곳의 쇼핑은 끝나곤 했다... 보통 시간은 30여분 내외...
그렇지만... 지금은 좀 더 발품할 곳이 더 생겼다..
바로... 베이비 섹션과 오가닉 코너...
다 아들내미 때문에 생긴 새로운 코스이다.
기저귀, 베이비로숀 같은 거야 어쩔 수 었다지만, 이제 이유식도 시작했으니, 여러 야채, 과일도 먹여야 하고, 그리고 아기이다 보니, 그래도 오가닉을 먹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새론 추가된 코너이다.
역시나... 전단지에 없지만, 기저귀가 세일이다.. 31불에 128개...
아들내미가 하루에 7~8개의 기저귀를 쓰니... 1달에 두어박스 기저귀, 즉 62불 정도가 1달에 기저귀값으로만 쓰여진다...
드라마에서 기저귀값, 분유값 벌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거 얼마나 한다고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 철없게 느껴진다.
쇼핑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들어봐야 하는 곳... 바로 세일품목 와장창 모아놓고 파는 곳이다.
주로 유통기한이 간들간들하거나, 들어온 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품목들을 갖다 놓고 30~50% 싸게 파는 곳이다.
수능날 시험치는 기분이 이랬을까? 아이템 하나하나를 따져보고, 유통기간 따져보고, 정말 필요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서 골라본다.
예전에는 이 코너가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 혼자 사색하는 그런 코너였었는데... 지금은 중국아줌마들이 너무 많이 몰린다.
아... 역시 어딜 가든 쪽수가 최고이다.
어쨌든... 부모들은 이렇게 세일품목에서 고르고... 지는 오가닉 코너에서 2~3배 되는 걸 골라서 먹인다는 걸... 이 놈의 아들내미가 나중에 알 수 있을까?
이 놈도 나중에 부모가 되어 봐야지, 그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음... 나를 보면 크게 기대는 되지 않는다. 명품은 지 여친 갖다주고, 명품사서 받은 사은품 엄마 갖다 주는 건 아닌 지... 쩝...
머... 어쩌겠냐... 그게 인생인데...
이렇게 본장보기가 끝나서 집에 오면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뒷장보기 작업이라고 명명한 이 작업은...
사온 품목들 집에 들여놓기, 야채는 야채별로, 과일은 과일별로, 그리고 나머지들도 각자 자리에 맞게 정리하는 일, 그리고 아내에게 쓸데없는 거 사 왔다고 타박맞기, 그리고 더듬더듬 변명하기 등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나의 캐나다 취미생활... 일주일 장보기는 끝난다...
출처 | 나으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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