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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특히 한반도 남부 지방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것이다. (주 : 야요이문화 - 약 2천 3백년전에 시작된 일본 최초의 청동기,벼농사 문화. 그 전의 일본은 석기원시시대.) 이들 청동기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한민족이 만든 것이 분명함은 한국과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확실하게 그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일본 북규슈(北九州) 사가(佐賀)현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시대 유물유적지가 있다. 일본은 1994년 야요이시대 유물유적지를 컴퓨터로 당시의 모습을 추리, 완벽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고 한다.
'야요이문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북규슈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훗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지역에 확산되었다.
야요이문화의 연대는 그 발상지인 규슈지방의 경우 서기전 3세기(지금부터 2300여년 전)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도쿄(東京)대학교 사사야마(笹山晴) 교수의 저서《일본고대사 연구》에 보면, "야요이문화는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는 한국에서 도래한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해외'라는 것은 곧 '한국'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1987년 발행된 도쿄대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나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국개척자들)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집단이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ㆍ일 관계사'에서 그 기원은 일찍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조선인들을 비롯 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ㆍ백제ㆍ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이 그들의 일왕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난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 청동 거울), 동검(銅劍 - 청동 칼),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ㆍ일학자는 없다. 이 세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는 고대유물의 보고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宮內廳)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며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 오키노시마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다. 출토물들이 1만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다.
왜(倭)와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언제 생긴 것이고, 이들 나라는 누가 중심이 돼 세운 것일까.
왜라는 국명은 15대 응신(應神)일왕 때, 일본이라는 국명은 38대 천지(天智)일왕 때 생긴 것으로 왜는 가야인들이, 일본은 백제인들이 중심이 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가야(伽倻)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 까지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국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왜곡ㆍ말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ㆍ말살하였다. 일제는 1915년 6월 29일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김씨문중을 약탈했다.
1993년 4월에 고려대 교우회관과 인천(경기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가 초청돼 「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ㆍ일 고대사를 듣는다」라는 강연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다카모도 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