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1장도 안 넘어가는 글이 그렇게 읽기 힘든가 싶었는데, 그건 제 기준이었음을 얼마전 글을 써보고 깨달아서..
긴 글을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세줄 정리가 최하단에 있습니다.
제게는 뇌파먹는새로 알려진 트이-타를 오래전부터 열심히 하며,
고학력자이며 주민번호 뒷자리가 2인 여자사람친구가 있었습니다.
여느 친구 사이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힘든 이야기를 토로하거나(사실 저는 주로 듣고, 상대방이 말하는 쪽이었지만, 굳이 이 친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 대화패턴은 늘 듣고 공감해주고, 상대방은 즐겁게 해소하고, 저는 진만 빠진 채 그래.. 하며 끝나는 쪽이었지만요.) 별 시답잖은 얘기로 낄낄거리는 그런 사이였어요.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이 친구의 말에 공감해주지 못하겠는 겁니다.
이해는 하겠지만, "응 그렇지" 하고 흔쾌히 동조해주지 못하겠는 거에요.
여자가 꽃이라는 비유가 싫다는 얘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애시당초 꽃이라는 건 식물의 생식기이고, 그것도 암술과 수술이 모두 포함되어있는 양성 생식기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사람이나 여자를 꽃으로 비유하는 유비추리는 솔직히 제게는 해당 비유가 갖는 유사성보다 비유사성이 훨씬 크게 느껴져서 와닿지 않는 터라 더더욱 그런 것도 있었고요.
집에 일찍일찍 다니라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얘기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걱정이나 애정이라는 선의로부터 비롯되는 것과 별개로,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껴질 수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면접에 늦어 택시를 탔더니 아가씨가 아침부터 어딜 그리 바삐 가시냐는 말에 기분이 상해 그 택시에서 내리고 다른 교통수단으로 천천히 갔다는 얘기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가끔씩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님들의 오지랖 아닌 오지랖에 빈정 상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연세도 있으신 할아버지 기사님이, 심지어 저와 친하지도 않은 일행이 두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은 얼굴은 말끔한데 참 가난해보인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어렸던 당시의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버했던 적을 생각하면 더더욱이 그럴 수 있겠다 싶었죠.
심지어, 남성기를 달고 태어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라는 표현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에서 겪을 수 있는 성희롱적 발언이나 공공장소에서의 불편함 등, 그들이 여성혐오로 이야기하는 미시세계에서 발생하는 매캐한 매연 같은 폭력들에 대해 뭐라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대고, '사실 그건 그 ㅈㄹ을 했던 그놈들이 썅놈들이야 너는 아무 잘못 없어, 괜찮아'라고 해봤자 피해의 당사자 입장에서 '여자라서 당했다, 여자라서 속상하다'고 느끼고 받아들이면 뭐 어쩔 도리 없으니까요.
근데 계속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해서 그런 건지, 얘기를 하면 할 수록 피로감이 쌓여갔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표현은 그저 현실 세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probability에 대한 긍정이지,
그 일 자체가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한acceptable 하다는 게 아님에도 그걸 제멋대로 제가 자기의 세계관에 물들고 있다고 착각을 했는지, 점점 트이타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대학물을 많이 먹은 만큼 그 친구는 나름 똑똑했고, 아주 간단한 논리를 못알아들어먹을 지능 수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 '어떤' 남자에게 받은 피해를 빌미로 '모든' 남자에게 비난을 가하는 게 간단한 집합과 원소 개념만 이해해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라던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등을 간략히 설명해주는 걸로 넘어갔습니다.
공감 대신 날아오는 제 반박에 여러 논리적 대응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난 뒤에 '서로의 가치관이 다름'을 이유로 들어 이야기를 대충 끝맺어도, 그냥 들은 척 만 척해도 뭐 그런 갑다 하고 개의치 않고 넘어갔습니다.
자기 가치관이고, 자기 알아서 할 일이니까요.
그날도 하루종일 있었던 불행한 일을 이야기하다가, 집 고친다는 통보를 해주지 않은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가 뭘 좋아할지 모르고 자기들끼리 좋다고 한 걸 가지고 '너에게 잘해준건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부류가 정말 증오스럽다며 감정을 격하게 토해내더군요.
선의를 가진 행위가 그릇된 결과를 자아냈을 때, 혹은 그릇된 의도를 가진 행위가 좋은 결과를 냈을 때 등에 관한 윤리학적인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증오와 혐오의 감정은 좀 과하지 않냐, 증오는 스스로를 좀먹으니 누그러뜨리는게 좋지 않냐.."고 해도 늘 그래왔듯 '서로의 가치관이 다름'을 이유로 들어 스스로가 가진 증오와 혐오의 감정과 그 표출을 괜찮다 여기더군요.
그 증오의 정당화에 여태까지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며 넘겨왔던 그 친구의 비논리성들을 가만 놔두질 못하겠더군요.
그 친구가 열심히 증오를 표출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공감하거나 고려하지 않은 상대의 호의에 대해 드는 생각이 '근데 뭐 어쩌라구요' 라길래,
"그러는 너도 상대의 호의에 대해 공감하고 있지 않잖아?" 라고 제가 한마디 했더니 노력했다가 좌절했는데 아직 넌 노력을 덜 했어라는 선생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며 현실적이어서 고오맙다는 반응만 돌아오더군요.
거기다 제 과거 경험을 빌미로 들어 피해의식을 가졌다고 해서 남에게 휘두를 수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는 말에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지금이었다면, "중2도 아니고, 나온다는 방어기제가 고작해야 니 얘기를 남 얘기로 돌리는 투사(projection)이라니ㅋ" 정도의 반응으로 되돌려줬을 텐데 말이에요. 뜯어보면 뜯어볼 수록 상대가 갖는 피해의 경험을 가지고 상대가 그걸 빌미로 남을 휘두를 거라는 그 발상이, 남성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휘두르고 다닐 거다,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다 라는 메갈식 사고 방식인 것을. 쯧.)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점이 무엇이었는지를요.
나는 되지만 너는 안되지라는 그 끝도 없는 내로남불, 마치 머리가 여덟게 달린 히드라마냥 상황 맞춰 지 좋을 대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그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논리적인 척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비논리성] 그 자체를요.
사실 사람이 모든 상황에 예외 하나 없이 원칙을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걸 두고 전문 용어로 강박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보니 태도가 비일관적일 수도 있고, 말의 앞뒤가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저만 해도 분명 그런 게 수십가지는 될 겁니다. 근데 적어도 저런 식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니 왜 트위터 세상에 흔히 돌아다니는 생각들이 잔뜩 섞인 그 친구의 말에 흔쾌히 '응 그렇지' 따위의 반응을 주지 못하겠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불편함도 이해가 가더군요.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해한 해당 상황에 대해 공감해주는 표현을 하는 순간, 제가 정신분열증이 걸릴 거 같은 거에요. 나라는 체계가 흰개미 잔뜩 머금은 목조주택 마냥 속 부터 썩어들어갈 거 같은 그런 느낌. 해당 이메일을 수신하는 순간, 계정이 해킹당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응 그렇지'라고 하는 순간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할 거 같은 그런 느낌. 뇌가 파먹히는 그런 느낌.
그 친구는 그 날 이후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락이 없습니다. 뭐 늘 그렇듯 자신의 심경을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겠죠.
대체 왜 이딴 걸 고게도 아니고 군게에 적냐는 미래의 비난에 대해 미리 변명하자면...
자신들의 주장은 공감 받고 이해받고 지지받기를 원하지만, 타인의 주장에 대해서는 단 한끝만큼의 공감도 할 요량이 없는 그 공감능력이 결여된 비논리적인 행태가, 군게에서 이뤄지고 있는 담론의 대상들이 보이는 행태와 비슷해보여서입니다.
그게 메갈이 됐건, '소수의' 극렬 달빠(를 가장한 지능적 안티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가 됐건 간에 말이죠.
긴 글을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세줄 정리
: 트이타 열심히 하는 여자사람친구가 자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데,
공감 운운하면서 타인에 대해 공감하려들지는 않는 그 모습에서 그 친구와 그들이 오버랩되더라.
동시에 왜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지 확실히 깨달았는데, 도저히 그들의 비논리성을 견딜 수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