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탄트라를 까기 위해서 쓴 글이라기보다
집시데인저님의
"철학에 진입장벽이 있는 것은 철학을 알고 있는 사람하고만 철학에 대해서 얘기 하겠다는 것 아닌가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철학을 얘기하는게 더 유익하다.
유익한 것을 모두다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더이상 유익하다기보다 일상적인게 되어버리죠.
그럼 발전이 멈추는 것 아닌가요?"
라는 오해에 대해서 해명하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물론 그 같은 오해를 퍼트린 탄트라의 무지 혹은 오만함도 함께 비난받아야 겠죠.
자, 여기서 왜 철학에 진입장벽이 있다는 제 주장이 철학의 폐쇄성이 아니고 개방성을 의미하는지 논증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탄트라가 철학을 개방적으로 정의하고 제가 철학에 대해서 폐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힐끗, 얼핏, 쓱, 대충 봤을 때요. 하지만 인터넷 게시판의 특성상 힐끗, 쓱, 얼핏, 대충 보는 분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쓴 글들은 학위논문이 아니고 여러분들은 심사자가 아니니까요.
먼저 탄트라는 그냥 누군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관찰을 하고 정교하게 생각만 하면 그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탄트라의 글 <철학은 누구나 하는 겁니다>의 한 대목을 살펴보죠.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얘기했고, 자본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냥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로부터 출발한 겁니다"
(따라서 철학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된다는 뜻)
물론 이 글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소립니다. 아담 스미스가 자본주의를 만든 것도 아닐 뿐더러 그가 인간의 이기심을 통찰하기까지
홉스와 마키아벨리에게 받은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죠. 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아담스미스가 정말 그랬다고 쳐보죠.
반면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아주 낮지만 분명히 철학에도 진입장벽이 있는 것이다.
그 진입장벽은 바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철학을 할 수가 없다.
철학을 시작하려면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왜 아담 스미스보다 먼저 경제학의 초석을 닦은 중농학파가 아니라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걸까요? 그건 바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즉 어떠한 사상이든, 철학이든 최소한 다른 사람을 한 사람 이상 설득할 수 있어야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건, 철학이 타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철학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수영은 말 그대로 물 속에서 움직이기 위한 것입니다. 물 속에서 움직일 수 있으면 일단 그건 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 수영 할 줄 알아" 할 때의 수영이란 자유영, 배영, 평영, 접영을 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이 영법들은 수영을 배우는데 진입장벽이지만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수영을 좀 더 잘 배우기 위해서 만든 것이죠.
철학도 마찬가집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부 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철학이란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의 분석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진입장벽들은 바로 철학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고 공유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이자 진입장벽은 철학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철학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자유영, 배영, 평형, 접영이 사람들이 수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수영을 더 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요.
그런데 탄트라는 이러한 철학의 방법론/진입장벽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탄트라가 진짜 철학에 애정이 있어서 부정하는 것이면 저는 말을 안 합니다.
만약 탄트라가 진짜 철학에 애정이 있어서 위의 진입장벽/방법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탄트라는 우리에게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새 진입장벽/방법론을 제시해야 합니다. 마치 자유영, 배영, 평영, 접영이 없어도 수영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른 영법을 제시해야지만 자신의 말을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탄트라는 그런 거 없이 무작정 진입장벽이 있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저와 제 주장을 막 까고 있습니다.
1. 탄트라는 지성이 떨어져서 위 진입장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위 진입장벽이 거슬린다.
2. 탄트라는 qefx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qefx가 좋아하는 철학도 마음에 안 든다. qefx를 직접 욕하면 자신이 졸렬해보이니까
대신 철학을 까서 qefx의 기분을 상하게 하자.
저는 2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최근 탄트라와 논의가 길어질 수록 1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비유로 제 주장을 좀 더 분명히 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재산을 독점하고 있고, 나머지는 아무런 소유를 가지지 못한 나라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일으켜서 독점자를 몰아내고 소유권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어떤 사람이 "야, 그거 니꺼 아니잖아. 나도 입을래 내놔."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누군가 무단으로 들어와서
취식을 하는데도 나한테 소유권이 없어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셔도 됩니다.
(참고로 저는 소유권에 비판적인 입장이며 월세 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바로 탄트라가 말한 상황입니다. 얼핏 소유권이 전혀 없으면 굉장히 평등한 세상이 될 것 같고, 철학에 아무런 진입장벽이 없으면 철학을 누구나 해서 더 좋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내 옷, 내 집 하나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부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나 자기 주장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통일된 개념을 만들 수 없고, 철학도 불가능해집니다. (이 주장은 아무나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님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장하는 철학의 진입장벽은, 통일된 개념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서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을 논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최소입니다. 내 집, 내 옷 정도 내가 마음대로 하자는 정도의 소유권의 주장인 것입니다. 최소한 이정도는 보장되어야 철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토양이 생기고 진짜 생기있는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탄트라의 주장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와 사유도 없이 무조건 소유권을 다 철폐하자, 그러면 좋아질 거다라는 수준의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와 다름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를 파괴하고 혼란만 조성할 수 있는 대책없고 무책임한 사유입니다.
제 글 <철학에 대한 오해>와 <철학의 진입장벽과 유용성>도 그런 입장에서 쓴 것입니다. 철학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쓴 글이며
철학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전문가적인 권위를 논하기 위한 글이 아님을 이 두 글을 읽어보신다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제게 있어서 오래된 여자친구와 같습니다. 가장 오래 사귀었지만 지금은 많이 시들해져서 헤어질 지경까지 갔고, 제게는 다른 애인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오래된 여자친구가 어느날 탄트라에게 물려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겁니다. 저는 비록 여자친구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 동안의 의리가 있어서 여자친구를 지켜주려 나섰습니다. 철학을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제 분류가 조금이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만약 도움이 안 되었다면 깊이 사죄드립니다.
정리
1. 철학의 진입장벽(존재론 등) = 수영의 진입장벽(자유영 등) - 철학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
2. 철학에 있어서 진입장벽이란 마치 최소한의 소유권처럼 우리가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룰이다.
3. 결론 : 철학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룰이 필요하다. 그 룰을 깨고 싶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룰을 만들어 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