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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날,
불과 두 시간 전에 나는 그 백화점에서 나왔다.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그 무렵 내가 일하던 한울노동문제연구소가 삼풍백화점 건너편 법원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주문했는데,
같이 일하던 변호사들 중 한 사람이 재판 때문에 급히 나가야 한다고,
다른 사람 점심을 대신 먹으면 안 되겠냐고 해서,
내가 주문했던 식사를 내줬다.
(오징어볶음밥이었다. 그릇에 담겨있던 음식 모양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밥때를 놓친 나는 오후 3시쯤이나 되어서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삼풍백화점 5층 식당가에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5층 상가의 왼쪽 절반가량은 조명이 꺼져 있었고, 가게 입구에 띠를 둘러 출입을 막고 있었다.
검은 양복 차림에 무전기를 든 경비원들이 서 있었고,
백화점 임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직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영업이 활발했던, 삼풍백화점 내부)
나머지 오른쪽 상가들은 영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콩나물국밥집은 조명을 끈 채 영업을 하지 않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지하에 있는 분식점에 내려가 새우볶음밥을 먹고 나왔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백화점 1층에서는 화려한 보석 특별전 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많은 알바생들이 고객들에게 보석 구매를 권유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내가 백화점에서 나온 뒤 두 시간쯤 지난 오후 5시 55분.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5층에 있던 직원들이 긴급히 “대피하라”고 외치며 뛰어내려오기 시작했지만 건물 안에 있던
천오백여 명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5층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그 잔해들이 아래층을 차례대로 무너뜨렸고 불과 20여 초만에 지하 4층까지 매몰됐다.
길 건너편 사무실에 있던 내 귀에도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 사고로 502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으며, 937명이 부상당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인명 피해 참사로 기록됐다.
나에게 새우볶음밥을 만들어주며 특이하게 재미있는 동작으로 국물 간을 보던 분식점 주인아주머니나
1층 행사장에서 웃는 얼굴로 나에게 보석 구매를 권유했던 알바생도 아마 죽었을 것이다.
[TV 뉴스]
"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상품참사, 그러나 유족들은 그 시간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쓰러져간 삼풍의 차가운 콘크리트 더미 앞에서는
아직도 매일같이 수십 명의 유족들이 나와 아들과 딸의 영령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들 유가족들 머리위로 굵은 빗물을 내렸습니다."
(삼풍백화점 5층 사진)
그날 5층 식당가의 절반쯤에만 조명이 꺼져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짐작하겠지만, 이미 건물이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 벽과 천정과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쪽은 장사를 하지 않고, 나머지 절반 쪽에서는 여전히 영업을 하게 했던 것이다.
얼마나 심하게 건물에 금이 갔는지 5층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로 1층이 훤히 보였을 정도라고 했다.
건물 붕괴 위험을 경고하며 즉시 영업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신속하게 대피시켜야 한다고
그런 상황에서도 영업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던 백화점의 주요 임원들 중 상당수는 미리 빠져나갔다.
[사회평론가, 노동변호사, 법자문가 하종강님의 사연]
2차 출처 - 루리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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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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