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혹은 예전 초등학교 동창들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오고는 하는데요. 그런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다보면 간혹가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런 경우가 한번 있었고, 그 경우는 하필 그 친구가 다단계에 빠져 있었던 거지요.
수원에 살고 있었지만, 그다지 밖에 돌아다니는걸 즐기지 않았던 저는 그 친구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신나게 놀기로 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첫날은 유명 고급 자동차 시승도 하고, 대학로에서 연극도 보며, 재밌는 시간을 보낸 저희는
근처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너구리월드를 가기위해 아침 일찍 버스정류장으로
나섰습니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중 그 친구는 갑자기 5층정도 되는 회사 건물 같은 곳을 가르키며,
'여기 아는 분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인사만 하고 가자.' 라고 말했고, 저는 아무런 의심없이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제일 최상층 5층에 도달했고, 문이 열리는 순간, 수 많은 둥근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사람들 얼굴이 그려진 플랜카드, 문 앞에 서있는 덩치 형들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다단계 업체 였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곳이었기에 저는 어쩔 수 없이 붙잡혀 버렸고, 결국 그곳에
정오에 들어가서 밤 9시가 되어 어찌어찌 탈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화가 난 나를 따라오며, 그건 다단계가 아니다, 네트워크 마케팅이다 라고 끊임
없이 설명했지만, 저는 이미 그 친구에게 실망한 상태였고, 결국 놀기로 했던 것을 모두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잘 못한것도 없는데 괜시리 그런곳에 끌려 갔다 온 사실이 수치스러웠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채, 그 친구의 전화번호만 수신거부를 걸어 놓았습니다.
그 후, 어느새 그 기억도 잊혀져 가던 대학 첫 여름방학때, 알바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 알바
소개 사이트를 뒤지고 있던 저는 같은 과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꽤나 친한 친구였지만, 방학동안 고향으로 내려간 친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고,
저도 친구와 말을 맞추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점점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도 왠지 원래 이 친구 목소리와 미묘하게 다른듯 싶었고, 무엇보다 한번도 친구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그 친구가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꺼낸 이야기는 제가 그 다단계 친구를 처음 만났을때 왠지 모르게 어색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다 저도 모르게 말하게 된 제 치부에 관한 것이었는데, 치부이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꺼낸적이 없었습니다.
왠지 불안해진 저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액정화면에 쓰인 이름을 보았지만, 대학친구 이름이
확실했고, 혹시나 착각을 한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찝찝해서, 은근슬쩍 이야기를
끊으며 전화를 끊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제가 끊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미련없이 알겠다고 했던 이 대학친구가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이야기의 꼬리를 자꾸만 물었고, 그런 친구의 모습이 점점 더 그 다단계
친구를 떠올리게 해 저는 그냥 억지로 '야! 미안! 누가 와서 전화 끊을게!' 라고 일방적으로
말했고, 핸드폰을 끊으려고 귀에서 떼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끊지마!!!!!!!!!!!!
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 왔고, 소름이 쫙 끼친 저는 잽싸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습니다.
그 후, 방학이 끝났고 다시 전공수업을 듣기 위해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던 저는
몇달 전 일이 떠올랐고, 친구가 장난 친거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당시 통화를 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안. 장난이었어.' 라고 말할 줄 알았던 그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고, 몇번을 되풀이해 물었지만, 역시 자기는 한번도 그런 통화를 한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대학친구가 전화를 안했다면, 정말로 그 전화는 그 다단계 친구가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 다단계 친구는 어떻게 대학친구 이름으로 전화를 건걸까요?
알 수 없었지만 소름이 끼친 저는 당시에 유행하던 인터넷 미니홈피 마저 탈퇴 했습니다.
미니홈피를 탈퇴한 덕인지 어쩐건지 그 후로는 그런 괴이한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저로서는 그 후로 오랜만에 연락오는 친구들의 만나자는 전화를 의심하게 되는 의심병이
생겨 버리고 말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단계 하지도, 권하지도 맙시다.
친구 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