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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껄, 어서 오시오."
낡디 낡은 술집의 주인양반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뜻밖이였다. 보통 손님이 와도 무심하게 조각된 석상마냥 밍밍한 표정을 들이대던 그였다. 내내 비슷한 시선으로 메마른 표정을 지으며 사람 하나 없어 마치 흉가 같은 술집을 지키던 그가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네다니, 지난 밤 돈 없는 부랑자가 무전취식을 하고 도망갔을때 내지르던 날 선 목소리를 생각하면 더더욱 의외였다. 술집은 여전히 찾아오는 이 없는 공동묘지의 밤마냥 어두컴컴했다. 낮은 천장 탓에 낮에도 침침한 흑빛을 견뎌야 하는 곳이였지만 오히려 편한 곳이였다. 어둠이 내려깔려야 그나마 맘이 놓였다.
"손님들은 새벽에 모두 일찍 나갔다오. 아마 공사판 같은 조그마한 소일거리라도 찾으려고 그런걸테지."
그는 바닥이 깊은 큰 맥주잔을 닦다 말고 내 옆으로 다가와 자리에 안내했다. 그나마 조그맣게 빛나고 있던 전등의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구석자리였다. 손에 행주를 들고있던 그는 나무의자를 당겨 앉았다. 박명시(搏明視)도 아니건만 그 모습이 서툴러 머쓱했다.
"밖이 쌀쌀하던데, 뜨뜻한 스튜라도 한 그릇 어떻겠소?"
그의 목소리는 다감한 뉘앙스마저 풍겼다. 늘 침묵으로 주방을 지키던 그가 갑작스레 다감한 목소리라니,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불길함이 곧은 화살처럼 뇌리에 스쳤다. 대부분 다정다감한 표정뒤에는 서슬 퍼런 댓가가 필요한 법이였다. 평소 육감같은걸 믿진 않았지만 무언가 불행을 예고하는 것 같아 개운치 않았다. 아니면 힘든 일이 생기거나. 내가 겪어온 이력은 늘 그런식이였다. 희뿌연 회색빛같이, 닿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물에 젖게되는 진한 안개 같이 그것은 슬그머니, 인식하기 힘들정도로 조심스럽게 나를 조여왔었고, 어느 순간 무지갯빛 칠색의 유혹으로 오감을 희롱시키기도 하였다.의심을 거둘 순 없었다. 어느 쪽이건 술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가뜩이나 외상값을 몇번이나 미룬 처지였다.
그는 어느새 푸짐한 냄비에 스튜를 가득 담은 채 내가 앉은 테이블 위로 가져왔다. 가열된 냄비에 보글보글 천천히 끓고있는 스튜의 냄새는 내 코를 희롱시키기엔 충분했다. 배는 더욱 울부짖었다. 천장쪽으로 천천히 부유하는 수증기의 온기엔 편안함이 엿보였다. 난 숟가락을 들어 스튜를 한 숟갈 퍼 입에 갔다댔다. 훌륭한 맛이였다. 평소에 먹던 딱딱한 블루머와는 차원이 틀렸다. 감미로운 향이 혀를 감싸 미뢰를 잔뜩 자극했다. 그렇게 두 숟갈, 세 숟갈, 숟가락을 집은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스튜를 먹는 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인장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여전히 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가득찼던 허기가 조금 가시자 처음엔 들리지 않던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라디오는 몇몇 잡다한 사건뉴스를 읽고 있었고 몇몇의 죽음을 알렸다. 더 이상 사이퍼들의 시위는 뉴스의 주인공이 아닌 듯했다. 짤막한 보도조차 없었다. 시위가 끝난 것인지 혹은 무시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속보입니다. 사이퍼들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시위대, 하이시커즈(High seekers)를 움직이고 있는 수장 웨슬리 슬로언이 MI7에 의해 검거되었습니다. 현재 영국에서는 그를…"
시위대가 흘린 피 대신 그들의 수장에 대한 검거소식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변두리 농촌에서 아이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사인은 실족으로 인한 추락사, 마약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갸누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덧 붙여졌다.
"맛이 어땠는지 모르겠군. 괜찮았소?"
냄비 가득히 있던 스튜를 비우고 일어서자 주인장이 다시 낯선 미소를 건넸다. 밥값을 내지 못하는 비루한 표정이 더욱 깊게 패였다.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끝나지 않을 정치싸움과 전쟁의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께름찍했다.
"값은 됐고 저녁에 또 오시오. 그땐 술 한잔 들지. 상의 할 일도 있고."
"상의할 일이라뇨?"
그와 나 사이에는 상의 할 일이란 없었다. 그저 그와 난 손님과 주인의 보잘것 없는 인연일 뿐이였다. 게다가 접두에 '외상값을 갚지 않는' 수식어가 붙어있었기에 그의 말은 더더욱 의아했다.
"아, 별 건 아니고. 아무튼 이따 꼭 오시오. 한 밤 11시쯤이 딱 좋겠군. 그때라면 어차피 손님이라곤 없을테니."
주인장은 아예 약속장소까지 정했다. 마다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적어도 그는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머쓱한 시선으로 호의를 받아들였다. 뒷골목을 걸으며 내심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권태보다 무서운 끼니도 해결한 터에 저녁엔 공짜 술까지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횡재라면 횡재였다. 일감을 구하거나 웨슬리씨의 소식이 올 때까지 술집 주인양반의 술집이 번창하길 바라는 소망도 들어섰다. 소름끼치는 고문같은 배고픔보단 의심쩍지만 푸근한 감정이 드는 주인양반의 미소가 훨씬 마음 편했다.
* * *
"왜 이제 오시오? 한참 기다렸다오."
약속시간보다 늦게 술집의 문을 열자 메마른 소리가 들렸다. 음식물 부스러기로 가득찬 테이블을 닦는 주인장의 표정은 짙은 먹빛이였다. 얼굴에 깊게 패인 세월의 흠집들은 억지 미소가 어울리지 않았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이 생겨가지고…."
디시카의 건달들 탓이였다. 어설픈 그놈들을 손 봐주느라 약속시간을 놓쳤다. 여러가지로 동쪽은 마음에 들지 않는 동네였다. 건달에다가 어두침침한 분위기엔 이골이 났다.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을 손 봐주는 이유는 이런 생활에 지루함이 느껴져서 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유흥거리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돈은.. 나에게 한낱 먼 존재였다. 일거리가 부족한 대공황엔 모두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였다.
"아무튼 왔으니 됐소. 이번엔 새우를 튀겨보았다오, 튀김 솜씨는 없지만 맥주 안주에는 튀김이 제일아니겠소? 그런대로 먹을 만 할걸세."
여태껏 메뉴판에 없던 특별메뉴를 은근히 자랑하는 주인장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스튜나 블루머외에 다른 메뉴를 맛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반가웠지만 주인장의 표정이 어두워 뭐라 대꾸하기 불편했다. 손님을 청한 그의 뜻대로 따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오. 거긴 너무 어두워, 다른 불은 모두 꺼야 하거든. 불이 켜져 있으면 오밤에 술 찾는 건달들이 문을 두들길테니 여기 안쪽에서 마십시다. 오늘은 제대로 이야기 한번 해봅시다."
작정하고 술판을 차린 듯한 목소리가 금속 북마냥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목소리와는 달리 주름 깊은 표정은 더 없이 어두워 습했다. 뒤편 기둥에 매달려 잿빛 먼지를 이고 있는 둥근 시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용건을 확인해야 했다. 쥐 죽은 듯 숨어 마른 잡초마냥 사는 내게 술판을 청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주방을 지키며 사는 남자의 이력에 낯선 술친구는 어울리지 않는게 분명했다.
"뭐가 그리 급하시오? 우선 맥주부터 가져오지. 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 빛깔! 흑맥주 중에 최상으로 꼽힌다는 기네스 맥주요! 껄껄껄!"
자신의 흑맥주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4000cc 술잔(이라고 하기엔 컸다.)과 갖가지 반찬들을 테이블에 진열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목숨을 다 꺼져가는 차에 평상시보다 더욱 밝게 빛나는 회광반조와 흡사해보였다. 가래낀 목소리가 늙은 먼지 냄새에 섞였다. 웃는 눈초리가 깊은 주름 속에서 안쓰럽게 지워졌다. 나는 낯설어 불편했다. 괜한 걸음을 한 것 같다는 후회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시원한 소리를 내뿜고 기포를 잔뜩 쏘아올리며 눈과 귀, 그리고 혀를 유혹하는 흑맥주의 빛깔을 보니 갈증이 밀려왔다. 아쉬운 감정이 앞섰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금방… 올라가봐야 합니다."
내심 불안해 입을 뗐다. 말을 느리게 한 이유는 흑맥주에 이미 홀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디시카에 온지 석 달이 되도록 단 한번도 말을 섞은적 없는 낯익은 남자의 호의는 사실 혼쾌할 수는 없었다.
"내일은 일요일인데 쉬지 않소? 하긴, 요즘같은 세상에 휴일이 어디있겠소. 허나 오늘은 좀 쉰다고 생각하고 한잔 하시오. 나도 당뇨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되지만 오늘만큼은 좀 마셔야겠소. 자 어서 들으시오."
술이 고팠던 탓인지 허기에 대한 중독과 같은 증상 덕인지, 술잔을 드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술잔이 무겁게 느껴진 적은 오랜만이였다. 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는 주인의 눈빛이 흐린 하늘처럼 먹먹했다. 경계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자, 건배."
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는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무엇인가 축하를 하려는 투였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함이 느껴지는 어깨였다. 오랜 세얼을 짊어진 어깨가 낡아 구겨진 바짓가락처럼 초라했다. 술잔은 연거푸 채워져 빠르게 비워졌지만 4000cc의 술잔이라는게 그렇게 빨리 비워질 양이 아니였다. 허나, 그런 흑맥주를 연거푸 마셔대는 주인장은 사람이라기보단 술에 고픈 주아귀(酒餓鬼)와 비슷해보였다. 주인의 순배가 서너 차례 지날때까지 별반 대화도 없었다. 안주를 권하고 술을 더 가져오는 틈뿐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의 입이 열린 것은 주인장이 네번째 잔을 채우고 왔을 때였다.
"요즘 통 일감이 없는 것 같은데…. 생활은 어떻게 하시오?"
"그, 그게, 최근에 글림듀쪽에서 소일거리가 들어왔습니다. 잘 된다면 외상값을 갚을 수 있습니다만…"
외상밥을 먹는 처치를 위로하려는 투는 아니였지만, 내심 양심에 찔린 듯 필요없는 말로 얼버무렸다.
"글림듀? 그래도 자네는 낫군. 나도 몇 년 전까지만해도 야간 경비라도 섰건만 이젠 어디를 가도 일감이 없소. 건강도 안 좋고, 가게 장사도 시원찮고…"
"정말 큰일입니다. 돈벌이만 된다면 뭐든 할텐데…. 도둑질만 아니면…."
남자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한숨 섞인 대답이 용수철마냥 튀어나왔다. 동병상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침묵의 시간을 아는 그에게 딱히 빗장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맞소.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엔 사람 죽이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해서라도 살아남는게 중요하지 굶어죽으면 나만 손해라오. 누가 알아주기나 한답니까? 라디오에 들으니 먹고살게 없다고 자살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계속되니, 헬리오스나 유니온, 하이시커 같은 집단이 계속 나오는 것이지. 세상이 우리 같은 사람이 죽는다고 눈이나 꿈쩍하겠소? 그러니 악착같이 살아남아야지."
맞장구를 치는 남자의 눈빛이 밝았다. 넋두리의 상대로 제격이라는 투였다. 나 역시 가슴 속 응어리가 꿈틀거려 단숨에 맥주잔을 들어 삼켰다. 주인장처럼 덜컥 비우진 못하더라도 절반정도는 비워버렸다.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험한 일을 할 사람 같진 않은데 어쩌다가 숨어사는 신세가 됐소?"
"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들짝 눈이 커지며 가슴팍이 덜컥 주저 앉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무거운 공기가 나를 세게 짓누르는 느낌이 들며 털어넣은 술이 목구멍에 걸려 사례가 일었다. 별반 대화가 없었는데 도망자의 처지를 알아내다니, 뒷머리가 서늘했다. 신분이 드러났다면 위험이 코 앞에 닥쳤다는 것이다. 불쑥 오른팔에 살의가 담긴 소름이 느껴졌다. 살기 위해선 죽여야하는 트와일롸잇의 전쟁터와 메트로폴리스의 핏빛이 얼기설기 머릿속에서 그물을 쳤다. 뒤춤에 있는 칼 끝이 등줄기를 타고 머릿속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리 놀랄 거 없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대충 짐작했으니깐. 염려 마시오.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간섭할 생각도, 그럴 처지도 되지 못하니 말이오."
남자의 투는 밋밋했다. 다행이였다. 밀고를 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였다. 놀라 잔뜩 오그라든 가슴이 입을 바짝 마르게 하기엔 충분했다. 들이킨 맥주가 역류하는 듯 불쾌한 찌꺼기가 느껴져서 오히려 맥주를 더더욱 벌컥벌컥 위장에 쏟아내었다.
"내가 경비노릇만 20년을 했소. 주거지, 백화점까지 경비에 대해선 꽤나 이골이 났지. 그래서 인지 사람보는 눈은 좀 있소. 댁두 처음 보는 순간 쫓기는 사람이란것을 단박에 알아챘지. 이유야 모르겠지만 꽤나 독한 놈들한테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맞소?"
남자는 내 머릿속에 숨은 비밀을 정확히 짚어냈다. 경험의 무서운 점은 사이퍼의 능력을 가끔 능가할 때가 있다는 점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지껄인 웨슬리씨의 말이 떠올랐다. 말 없이 망부석처럼 주방을 지키며 허드렛일이나 하는 그의 속이 그처럼 예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술집 건달에게 휘둘려 연명하는 늙은 주인장에게 사람을 꿰뚫는 감각이 있다니. 놀랍고 두려웠다.
"그건 그렇고 원래 뭐하던 분이오? 도망 다니기 전에 직업이?"
늙은 호기심인지 꽤나 집요했다. 경비 시절의 어투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굵은 팔뚝이 다시보니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슬려 불안했지만 이미 도망자라는 것을 아는 터에 거짓으로 둘러댈 수는 없었다. 사소한 것은 사실대로 털어놓는 편이 수월할 터였다.
"동생과 함께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했습니다."
오래 전의 세월을 기억나게 하는 질문이였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어 되살아나려는 불씨를 꺼트렸다. 상기해서 좋을 것이 없는 과거였다.
"젊은 시기를 힘들게 보냈겠구만.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책을 보나?"
"그래서 망했죠."
그랬다. 그 시절 내 삶의 터전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피 말리는 전쟁터였다. 늦은 밤까지 문을 열어놓아도 손님이라곤 대여섯도 오지 않았다. 장기적인 불황의 한파는 서점도 피해갈 수 없었다. 문학은 커녕 참고서마저 팔리지 않는 암울한 시간이였다. 그 허기의 시간을 나는 책읽기로 견뎠다. 팔리지 않아 쓰레기처럼 쌓인 활자들을 닥치는대로 펼쳐 읽어냈다.
"아, 그러시오.. 내가 괜한 걸 물었구만, 오랜만에 사람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다보니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구려. 자네, 잔이 비었군. 한잔 더 가져오지."
다행이 남자는 메마른 미소로 상황을 넘겼다. 미소를 지을때마다 그의 관자놀이에 핀 잡티가 실룩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전쟁터의 총알이 스쳐 지나간 상처와 비슷해보였다.
"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지금 글림듀에서 일을 하고 있지. 들어는 보셨소? 헬리오스말이오. 사실 애하고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해서 소식도 잘 못 듣는다오. 다 내가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
늙은 호기심은 넋두리로 이어졌다. 취기가 부추긴 한탄이라면 꽤 오래갈 것 같았다. 점점 앉은 자리가 거북해 핑계를 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취기가 오른 탓도 있었다.
"저… 이제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좀 취하기도 했고…."
넋두리를 들을 처지가 아니였다.탄식조의 주름 깊은 표정을 마주하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직, 할 애기가 안 끝났소. 진짜 하려던 말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걸. 이 얘긴 좀 취해야 할 수 있을 것 같았소."
꺼내기 힘든 모양이였다. 술을 집어 삼키는 손짓이 거칠고 급했다.
"휴우, 사실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오라고 한거요. 아무한테나 말할 수 없는 일이라.."
의아했다. 낯선 나를 선택한 이유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눈치빠른 주인장은 내 반응을 살핀 듯 했다. 어딘가 능숙함이 보여서 새삼 한번 더 놀라웠다.
"그렇소. 당신이 도망 다니는 처지니 내가 이렇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거요. 그런 처지가 아니라면 내가 마음 놓고 일을 부탁할 수 없을테니…."
도망자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 무언가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라는 뜻이였다. 미간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입술이 굳게 닫혔다.
"뭐냐하면…."
마침내 늙은 입에서 비밀이 나오려는 모양이였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비켜가며 입을 닫았다.
"이봐, 장사 안 해? 왜 문을 닫아걸고있어?"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어섰다.
"니미럴, 건달새끼로군."
남자는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알아채곤 혀를 찼다.
"저 놈은 나이도 나보다 어린게 늘 반말을 지껄여.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잠깐만 기다리시오. 저 놈을 보내고 올테니."
늙은 다리가 휘청 일어서며 출입문 쪽으로 허우적허우적 걸어갔다. 돌아서는 어깨에 누런 먼지가 일렁였다. 흐린 비을 따라 벽시계가 얼핏얼핏 눈금을 드러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이였다.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소. 미안하지만 다른데를 알아보시구려.."
문을 열자 다짜고짜 들어서는 사내를 향해 주인장은 앞을 막아섰다.
"제기랄, 그럼 난 어디서 술을 먹어? 지랄하지 말고 얼른 술 안가지고와? 내가 술값 안줘서 이러는거야? 나중에 준다고 했는데 왜 이 지랄이야? 오늘 기분도 거지 같은데. 빨리 술 안가지고 와?!"
상대는 상식으로는 대처가 불가능한 안하무인 건달이였다.
"이건 또 뭐야? 장사 안한다고 술판을 벌이고 있어?"
건달은 테이블 위의 맥주잔과 숭병을 알아채곤 타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동네에선 건달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났다. 동료를 불러모아 부수고 난리를 칠게 뻔할 뻔자였으니깐 대적할 이가 없었다. 늘 그런 식이였다.
"아,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잠시…"
주인장은 사내의 위압에 눌려 변명조차 끝을 흐렸다.건달의 험악한 투는 술집 주인으로는 버거운 상대였다. 주인장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고개만 연신 굽신거렸다. 그런 남자의 뒷모습이 어딘지 희극적이였다. 아니, 희극이자 비극일 터였다.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느의 비극을 섞어놓은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이 새낀 뭐야? 내가 마실 술을 왜 니가 쳐 마시고 있어 개새끼야! 아까만해도 한 놈 제대로 걸렸지. 확 이 주먹으로 두들겨 팼으니 한 놈 더 늘어도 상관없겠지? 주인양반?"
사내는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허공에 주먹질을 시작했다. 떠벌거리는게 영 신통치 않았다.
'쓰레기 같은 자식.'
나도 모르게 살의가 주먹을 탄 냉기가 칼날을 이루었다. 건달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주인양반은 어느새 분위기를 눈치채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분노는 술 탓이 아니였다. 트와일롸잇이라면, 메트로폴리스라면. 놈은 관자놀이에 구멍이 났거나 창자를 쏟아내며 피범벅이 되었을 터였다.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면 칼날을 들이밀고 싶었다.
"저, 저기 자중하고 제발…."
주인장은 잔뜩 흥분하여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건달의 허리를 붙잡고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무의미한 움직임이였다. 그러다 의도한건지 실수인지 모르지만 건달의 팔꿈치가 주인장의 얼굴에 깊게 박혔고 주인장의 코엔 피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연합소속의 사이퍼 벤델이야 벤델! 철권의 벤델!"
듣기 싫은 조직의 이름이 언급되어 내 눈썹이 움직였다. 정말로 연합소속이라면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상대였다. 연합에서 나를 눈치챈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허나 어차피 마주쳐야 할 상대이기에 물러설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어설프게 허공에 휘두르는 그의 주먹을 잡았다.
"어쭈? 까부냐? 내 이름을 듣고도?"
"너희 같은 놈들을 보면 내가 나서야 할 것 같다고 몇번씩 마음에 되새겨져. 네가 정말 연합의 일원이라면 가서 얼른 돌아가서 전해. 너희가 부순 장난감 폭죽은 다시 고쳐졌다고."
나는 당장 주위의 수증기를 모아 결정을 응집시켜 그의 팔을 동결시켰다. 건달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파랗게 얼어버린 팔을 보고는 결정과 비슷한 색깔이 얼굴에 덮혔다. 기겁하며 소리를 내지르는 건달은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조심하는게 좋아, 안 그러면 깨지고 말테니."
"…히익!!"
"알아들었으면 당장꺼져. 너 같은놈이 앞에서 설치면 술맛 떨어지니깐."
건달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파랗게 질린 채 꽁무니를 내뺐다. 그 상황을 어안이 벙한째 지켜보고 있던 주인양반은 놀람의 소리를 내뱉고는 통쾌하다는 듯 웃어재꼈다.
"하, 하하! 당신 사이퍼였군!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만!"
"끄응…! 밝히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게다가 그 푸른 결정! 당신 루이스나, 토마스 같은 결정사인거요?"
코치코치 캐묻는건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젊었을 적 경비였다던 그의 버릇같은거라 생각하니 별로 불쾌한 느낌이 들진 않았다.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였지만 담을 수 있을만큼 담아야만 했다.
"적에게 환각을 보게하는 능력입니다, 결정사라면 제가 여기에 이러고 있지 않고 트와일롸잇에 있겠지요."
"음,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보다 하시던 이야기는…"
"아니, 일단 술부터 들게. 정말 기분 좋은 날이군. 속이 다 통쾌했어. 축배를 들게나. 이런, 안주가 떨어졌군! 잠깐만 기달리게나."
주인장은 자리로 돌아오려다 멈칫 멈춰 주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두었다. 이 자리를 황급히 뜨고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두었다. 주인양반의 말들이 왠지 마음에 걸려 뭇내 거슬렸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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