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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 그 탄생의 비화 ....
어릴적 우연히 벽에 붙여진 로보캅영화 포스터를 보고 하루종일 그 강렬한 포스에
정신줄을 놓아버린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어머니를 몇날며칠을 졸라 결국은
어머니 손을 잡고 극장을 가서 보고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기에 어른없이는 혼자 극장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상 관람가 였기 때문에...
이제 부터 영화잡지에 나와있던 '<로보캅> 탄생의 비화' 에 대해 소개해드릴려고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재미있는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실거에요.
1985년 9월, 네덜란드 출신의 영화감독 폴 버호벤(당시 47세)은 비버리힐즈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여독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는 익일의 스케줄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낯선 땅 미국에서 그가 아는 사람은 얀 드봉과 모니크 반 드 벤(버호벤의 초기작인 <사랑을 위한 죽음 Turks Fruit>(1973)의 촬영감독과 주연을 각각 맡음), 그리고 에이전트와 변호사 등 네 명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호벤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감독(좌익 세력이 집권한 후 네덜란드 정부는 버호벤 영화의 ‘윤리성’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에서(비록 ‘초청’을 받아 건너오긴 했지만) 환영받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버호벤은 이미 미국의 자본을 끌어들인 다국적 영화 <살과 피 Flesh+Blood>(1985)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할리우드 법칙’에 따르자면 버호벤은 이미 이 때 ‘매장’됐어야 하나, 다행히도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오라이언 영화사의 간부 마이크 메다보이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이번에 버호벤이 감독할 영화는 ‘공상과학 장르’의 영화 <로보캅 Robocop>이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향후 버호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차대한 작품이었던 셈이다. 만일 이 영화마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버호벤의 감독으로서의 인생은 사실상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해서인지, 버호벤은 영화의 제작에 앞서 철저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로보캅>은 버호벤이 미국 땅을 직접 밟고 찍는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였다.
<로보캅>은 100% 할리우드 영화였으며, 버호벤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아예 거처도 미국으로 옮겼다.
그는 미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할리우드에서 실패한 유럽의 예술영화 감독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차례나 다짐했다.
버호벤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빔 벤더스 같은 유럽의 거장들이 정작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를 ‘유럽식으로 영화를 찍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영화를 하나의 ‘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영화는 반드시 발단-전개-위기-결말의 뚜렷한 구조를 갖춰야 하며 관객들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할 만한 상업 영화 식 액션 쇼트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라는 것이 버호벤의 지론이었다.
말하자면, 유럽의 거장들은 이러한 미국 영화의 법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버호벤은 미국에 건너온 직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국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미국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신의 조국 네덜란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시끄럽고 정신없는’ 격동의 나라였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영화 속에 그대로 반영하리라 마음먹었다. (<로보캅>에 비친 레이건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객관적 고찰’은 바로 이런 버호벤의 관찰자적 시선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로보캅>의 이야기는 에드 뉴마이어와 마이클 마이너에 의해 탄생했다. 뉴마이어는 <로보캅>의 각본을 쓰기 전에는 영화사의 각본 리더(Script Reader, 다른 사람이 쓴 각본을 읽고 검토하는 사람)로 일한 바 있다. 그가 <로보캅>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당시 뉴마이어는 워너의 각본 리더로 일하고 있었다)의 촬영현장을 본 뒤였다. 그는 ‘인조인간’을 소재로 한 <블레이드 러너>의 기막힌 촬영 현장을 본 뒤 문뜩 ‘인조인간 경찰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면 멋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최초에 그가 구상한 이야기는 ‘완전한 로봇 경찰’(경찰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이 인간들의 상식 밖의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는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멋진 소재를 떠올렸다고 생각한 뉴마이어는 곧장 동료 마이클 마이너에게 달려가 함께 각본을 쓰자고 제안했고, 마이너는 이를 수락했다. 두 사람은 곧 머리를 맞대고 <로보캅>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뉴마이어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객의 흥미를 확 끌만한 무언가’가 아직은 결여돼 있다고 느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마침내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을 죽여버린다’는 것이었다! 즉, 관객들이 “이런, 영화가 벌써 끝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펼쳐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 그는 <로보캅>이 ‘로봇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기계가 된 사람(즉, ‘사이보그’)에 관한 영화’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의 가닥이 잡히자, 뉴마이어와 마이너는 거침없이 각본을 써내려갔다.
두 사람이 쓴 각본에는 당시 미국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었다. 멀지 않은 미래, 디트로이트 시는 치안을 거대 다국적 기업인 OCP(Omni Consumer Products)에 맡긴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영국을 휩쓸던 공공사업의 민영화 열풍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다). OCP는 새로운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려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범죄’였다. 나날이 흉악해져가고 있는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OCP는 ‘무적의 경찰관’을 도입하기로 한다. 그러나 OCP의 중역 딕 존스의 주도하에 개발된 로봇 경찰 ED(Enforcement Droid) 209는 실전에 배치되기도 전에 큰 에러(?)를 범하고 만다. 이에 크게 실망한 OCP의 회장(그는 영화 속에서 ‘올드 맨 Old Man‘이라고 불린다)은 밥 모튼이 제안한 <로보캅>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뉴마이어와 마이너는 완성된 각본을 들고 영화를 제작할 스튜디오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각본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이런 유치한 영화는 제작하지 않습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어느 정도는 예상된 일이었지만, 막상 ‘냉혹한 현실’을 직접 접하자 두 사람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곧 ‘구원자’를 만나게 된다. 오라이언 영화사가 그들의 각본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전에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1984)를 배급하여 짭짤한 돈맛을 본 오라이언 사는 ‘비슷한 소재(로봇)’을 다룬 <로보캅>의 각본에서도 가능성을 엿보고, 투자를 할 것을 전격 결정했다. 뉴마이어와 마이너는 (당연히)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됐다. 도무지 영화의 감독을 맡겠다는 이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라이언 사가 ‘찍은’ 지명도 있는 감독들은 예외 없이, <로보캅>이라는 제목이 적힌 각본의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의 뜻을 표시했다. 장래가 촉망 되는 신인급의 감독들 역시 ‘이런 유치한 영화는 향후 경력 관리에도 치명적 오점이 될 수도 있다’면서 단호히 영화의 연출을 거부했다. 사실, 뉴마이어와 마이너의 각본이 가진 가장 큰 핸디캡은 바로 ‘제목’이었다. <로보캅>이라는 제목은 한국으로 치자면, <우뢰매>보다도 더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오라이언 사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생각해, 좀 더 근사한 제목을 지으려고 했으나 도무지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유치한 제목은 심지어 영화의 촬영의 시작된 후에도 종종 ‘화제’가 되곤 했다. 촬영장을 방문한 이들이 “무슨 영화를 찍고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스텝들이 “<로보캅>이라는 영화요”라고 대답하면 방문객들은 예외 없이 ‘킥킥!’하면서 웃어댔다!)
결국 ‘자국’에서 적임자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오라이언은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이크 메다보이가 ‘폴 버호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자’라고 오라이언의 간부들을 설득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폴 버호벤의 집에 <로보캅>의 각본이 도착했다.
그러나 버호벤은 (다른 감독들처럼)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각본을 마룻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보고 이런 유치뽕짝 영화를 감독하란 말인가?’ 그가 허탈감에 젖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버호벤의 아내 마틴이 우연히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각본을 집어든 것이다. 그녀는 각본을 읽은 뒤 남편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런 바보 같으니! 이 각본에는 많은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요! 한번 끝까지 읽어보기나 하세요!” 그녀의 설교(?)를 들은 버호벤은 마지못해 각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는 아내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버호벤은 결국 <로보캅>의 감독을 맡기로 결정했고, 얼마 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폴 버호벤이 당면한 첫 번째 과제는 ‘각본을 다듬는 일’ 이었다. 사실, 에드 뉴마이어와 마이클 마이너가 쓴 각본 초고는 이미 그 상태로도 영화화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다듬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버호벤이 꿈꾼 버전’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버호벤은 이야기의 분위기가 너무 ‘만화’같다면서, 좀 더 ‘리얼한 버전’을 원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것은 바로 뉴마이어가 ‘결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 톤이었다. 뉴마이어는 ‘어차피 <로보캅 RoboCop>은 우스꽝스러운 로봇 옷을 입은 남자가 설치고 다니는 액션 영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객이 그것을 ‘유치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 톤을 아예 ‘만화 버전’으로 다운그레이드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버호벤은 애당초 <로보캅>을 ‘심각한 드라마’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톤을 ‘일반적인 극영화에 가까운’ 심각한 것으로 수정해줄 것과, 주인공 머피(피터 웰러)가 ‘정체성의 갈등’을 겪는 부분 및 동료 경찰관 앤 루이스(낸시 앨런)와의 ‘정신적 유대관계’ 를 부각시켜줄 것 등을 뉴마이어에게 요구했다. 뉴마이어는 이를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마이너와 머리를 맞대고 거의 두 달에 걸쳐 각본을 수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마이너는 ‘건강상의 문제’로 프로젝트에서 이탈했고 이후의 각본 수정은 사실상 뉴마이어가 전담하게 됐다. 그런데 그가 애써서 수정한 각본을 본 버호벤은 실로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이런! 정말 형편없군! 자네가 쓴 각본 초고로 돌아가서 다시 작업해야겠네!” 뉴마이어는 이런 식으로 ‘면전에다 대고’ 모욕(?)을 주는 사람을 이전에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뉴마이어와 버호벤은 이후 수 주간 티격태격하면서 각본을 다시 수정해 나갔으며, 가까스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갈등(그럼에도 두 사람은 친구사이가 됐다)은 이후 버호벤과 롭 보틴이 겪을 그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보캅> 팀의 다음 과제는 영화의 주연을 맡을 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초기에 오라이언 사는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에서 열연한 아놀드 슈왈츠네거에게 영화의 주연을 맡길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었다. 신체 사이즈가 ‘원래’ 괴물급이었던 슈왈츠네거에게 육중한 로봇 옷을 입힌다면 ‘텔레토비’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로봇 옷의 두께를 고려한다면, 영화의 주연은 보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배우가 맡아야 했다. 여기에 추가로 요구되는 사항이 있다면, ‘턱이 잘 생긴 배우여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주인공이 ‘로봇 옷’을 입었을 때 드러나는 신체부위는 ‘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라이언 사는 한 때, TV 시리즈 [브이 V]에 출연했던 마이클 아이언사이드를 주연으로 내정했으나, 그 역시 로봇 옷을 입히기에는 체구가 다소 큰 것으로 판명되어 ‘예선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머피/로보캅’ 역은 보다 호리호리한 체구와 ‘환상적인 턱선’을 지닌 배우 피터 웰러에게 최종 낙찰됐다.
영화의 제작을 맡은 존 데이비슨은 최초에 ‘로보캅 의상’의 디자인을 당시 최고의 분장 전문가였던 릭 베이커(<런던의 늑대인간 An American Werewolf in London>으로 아카데미 분장상 수상)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베이커는 이미 다른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있었기에 <로보캅>의 제작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중책은 베이커의 수제자인 롭 보틴에게 맡겨졌다. 보틴은 자신이 로보캅의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는 데 대해 뛸 듯이 기뻐했다. <로보캅>은 그가 그토록 꿈꾸던 ‘정통 SF물’이었기 때문이다. (보틴은 세상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워 할 SF 광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이전에 분장을 맡은 영화 - <매니악 Maniac>, <하울링 The Howling>, <괴물 The Thing> 등 - 는 대부분 호러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폴 버호벤’이라는 무시무시한 장벽을 만났기 때문이다!
롭 보틴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바로 ‘관객이 (자신이 디자인 한) 로봇 옷을 입은 피터 웰러를 보는 순간, 웃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버호벤은 보틴이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7)에 등장했던 여성 안드로이드처럼 ‘미끈하고 근사한’ 로봇 옷을 디자인해주길 원했다. 보틴은 이 요구를 수용해, 비지땀을 흘리며 ‘멋진 로봇 옷’을 디자인했다. 보틴의 스케치를 본 버호벤은 ‘90%는 만족스러우나, 10%가 모자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로봇 옷의 목 부위를 가리키며 ‘마치 로보캅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우스꽝스럽다’라고 지적했다. 버호벤을 만난 자리에서 보틴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버호벤이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그에게도 상당한 그림 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보틴은 투명용지가 포함된 스케치북을 버호벤에게 건내주며 “그렇다면 제 스케치 위에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직접 그려주시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버호벤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는 보틴을 잠시 동안 뚫어지듯 노려보더니 옆에 있던 복사용지를 한 움큼 집어 들고는 이렇게 외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종이? 종이라고?! 나도 종이는 충분히 많이 가지고 있다고!” 다음 순간, 사무실은 그가 집어 던진 복사용지로 난장판이 됐다. 어안이 벙벙해진 보틴은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버호벤은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해명했다. “나는 롭 보틴의 제안을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받아들였다. 즉, 그는 나에게 스케치북을 내밀며 ‘당신이 그렇게 잘났으면 직접 디자인을 해보시지!’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호벤의 해명이 과연 사실이었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앙숙’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신나게’ 싸워댔다. 보틴은 지금껏 자신의 작업에 이토록 줄기차게 ‘딴지’를 거는 인물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권력 다툼(?)’이 어찌나 심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보틴은 버호벤과 말도 안 하게 됐다!
보틴은 (버호벤의 요구대로) 디자인을 수정하는 동시에, 점토로 로봇 옷의 모형을 만들어갔다. 빡빡한 제작 일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버호벤은 수시로 보틴의 작업실을 방문해 일의 진행사항을 체크하곤 했다. 버호벤은 로보캅이 관객에게 다소 ‘중성적인 캐릭터’로 비춰지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로보캅의 ‘중요한 부위(?)’가 부각되지 않도록 주의해줄 것을 보틴에게 특별히 요구하기도 했다. 버호벤과 보틴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은 어느 날, 결국 ‘핵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날도 보틴의 작업장을 방문한 버호벤은 “이게 마음에 안 드네. 저건 아닌데. 좀 제대로 할 수 없겠냐?”라면서 딴지를 걸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보틴은 이렇게 외쳤다. “그럼 당신이 직접 해보시죠?” 버호벤은 잠시 보틴을 노려보더니 “그러지!”라고 대답한 뒤 조각칼을 들고 로봇 옷의 모형을 향해 달려가 마구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황당해진 보틴은 버호벤을 뒤쫓아 가 ‘대체 뭐가 문제냐?!’며 따졌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씩씩거렸고, 잠시 후 버호벤은 보틴을 향해 “이건 쓰레기야!”라고 외쳤다. 두 사람은 거의 ‘주먹 싸움’이라도 벌일 태세였다.
훗날 버호벤은 이 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롭 보틴은 나에게 조각칼을 쥐어주고 ‘원하는 대로 고쳐보라’라고 요구했다. 그는 아마도 내가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사실,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싸움’을 넘어선 ‘완벽주의의 충돌’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보틴에게 특수 분장 작업을 ‘일임’했던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버호벤은 보틴의 작업물이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줄기차게 수정을 요구했으며 보틴 역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두 사람은 결국 기적적으로(?) 합의에 도달했고, 보틴은 영화의 촬영이 시작된 첫날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로보캅 의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서 자신이 입을 의상을 본 피터 웰러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웰러는 ‘근사한 로봇 연기’를 하기 위해 제작 준비기간 동안 미식축구 유니폼을 입고 부단히 ‘모션 연습’을 해왔다. (심지어 그의 연기 지도를 위해 마임 전문가인 모니 야킴이 고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롭 보틴이 만들어온 의상은 웰러의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무거운’ 것이었다. ‘저걸 입고 과연 걸을 수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웰러가 그간 준비해온 ‘마임 연습’은 말짱 도루묵이었다. 촬영이 시작된 날, 롭 보틴 팀은 꼭두새벽부터 웰러를 트레일러 속에 가둬놓고 무려 11시간에 걸쳐 분장(?) 작업을 실시했다. 허탈감에 빠진 웰러는 분장이 진행되는 내내 “이건 아니야...이건 아니야...”라면서 중얼거렸고, 보틴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마음 편하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아르마니 정장’을 기대한 건 아니잖아요?”
한편, 촬영장에서 웰러를 노심초사 기다리던 버호벤은 1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살인이라도 할 태세’로 씩씩거리며 트레일러를 향해 걸어갔다. 바로 그때, 트레일러의 문이 열리고 로보캅 분장을 한 웰러의 모습이 나타났다. 버호벤의 ‘분노’는 바로 이 순간 증발해버렸다. 그는 “오! 멋져! 아주 멋져! 당장 촬영을 진행하세!”라고 외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짜 황당한 일이 생겼다
“오! 멋져! 아주 멋져! 당장 촬영을 진행하세!” 폴 버호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육중한 갑옷’을 몸에 걸친 피터 웰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허, 당장 촬영을 진행하자니까?!” 웰러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이 친구 귀가 먹었나?’ 버호벤이 이렇게 생각하던 찰나, 웰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예상치 못했던 황당한 시추에이션에 버호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버호벤은 씩씩거리며 이렇게 외쳤다. “대체 또 뭐가 문제인가?!” 사실, 웰러의 ‘반항’은 단순한 ‘투정’만은 아니었다. 로봇 옷의 무게가 워낙 살인적이었기 때문에 웰러는 ‘실제로’ 한 걸음도 움직이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웰러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예상 밖의 거추장스러운 의상으로 인해 당초 준비한 ‘로보캅 안무’가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본래 웰러는 ‘고트’ - <지구가 정지한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1951)에 등장한 외계 로봇 - 나 C-3PO와 같은 ‘전형적인 할리우드형 로봇’의 이미지를 탈피한 ‘우아하고 부드러운 몸동작의 로봇’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로봇 옷을 입고 나니, 마치 자신이 ‘미이라’가 된 듯했다. 웰러의 불평(?)을 들은 뒤, 버호벤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타일렀다. “이보게. 나는 애당초 로보캅을 ‘발레리나’로 만들 생각은 없었네. 로봇은 모름지기 로봇답게 움직여야지!” 버호벤은 X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웰러에게 침을 튀겨가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버호벤의 설명이 끝난 뒤에도 웰러는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웰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한 메소드 배우였다. 따라서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되지 않는 한, 그는 연기를 절대 시작할 수 없었다. 웰러는 버호벤이 제시한 로보캅 캐릭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버호벤은 자신이 ‘롭 보틴보다 더 강력한 적수’를 마주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롭 보틴은 ‘말대꾸’라도 했지만, 이 ‘새로운 적수’는 아예 ‘침묵’으로 버호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이 ‘엄청난 적’을 꺾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버호벤으로부터 ‘난감한 상황’을 전해들은 제작자 존 데이비슨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면서 피터 웰러를 해고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그러나 이 해고 결정은 (사실은) 웰러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눈속임 전략’이었다. 오라이언 사는 이미 60만 불을 투자하여 ‘피터 웰러의 체형에 맞춘’ 로봇 옷을 만든 터였기에,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것은 유리구두 한 짝만 가지고 ‘발 사이즈가 맞는’ 신데렐라를 찾는 일이 될 터였다.) 그러나 데이비슨과 버호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미 ‘구인광고’에는 ‘웰러를 대신하여 로봇 옷을 입을 호리호리한 체격의 배우를 찾는다’는 문구가 실렸고, 대체 배우가 뽑힐 때까지는 스턴트맨이 로보캅 역을 대신하기로 했다.
다음날, 촬영장에 나타난 웰러는 스턴트맨이 로보캅의 의상을 입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이때가 돼서야 그는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달았다. (에드 뉴마이어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것 같았다. 사실상 폴 버호벤은 피터 웰러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아 그를 굴복시킨 셈이다!”) 웰러는 에이전트 및 변호사, 제작자들과 연거푸 통화한 뒤 머리를 쥐어뜯으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버호벤의 곁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버호벤 씨, 죄송합니다. 앞으로 말 잘 듣겠습니다.” 버호벤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훗날, 웰러는 <로보캅 RoboCop> 제작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작 현장에는 네 명의 ‘불세출의 옹고집쟁이’들이 있었다. 폴 버호벤, 롭 보틴, 에드 뉴마이어, 그리고 나였다. 네 사람은 틈만 나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어댔고, 자신들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으려 했다.” 촬영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로보캅>은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사상 최악의 영화가 되든지, 아니면 사상 최고의 SF-액션 영화가 되든지.
버호벤은 결국 웰러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호소’를 아예 못들은 척 할 수는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로봇 옷의 무게를 감안했을 때, 그에게 ‘안무’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했다. 결국 버호벤은 - 이미 촬영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 웰러에게 일주일 간의 준비기간을 주기로 했다. 웰러는 마임 전문가인 모니 야킴을 다시 불러들여 로보캅의 움직임을 다듬기 시작했다. 야킴은 로봇 옷을 본 순간 (웰러가 그랬듯)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쇳덩어리(?) 의상을 입고 대체 어떻게 움직이란 소리인가?! 하지만 (놀랍게도) 결국 그는 이 의상을 통해 멋진 동작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야킴은 의상의 엄청난 무게를 ‘캐릭터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웰러는 (의상의 무게 때문에) 늘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로보캅은 마치 ‘삶의 고뇌를 양 어깨에 짊어진 듯한’ 슬픈 캐릭터가 됐다. 즉, 살인적인 무게의 의상이 오히려 로보캅에게 ‘인간미’를 부여한 것이다.
버호벤은 촬영장에서 웰러의 연기 동작을 보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이미 이 순간부터 그는 ‘로보캅’이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 있었다. (버호벤은 지금까지도 <로보캅>을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중 ‘최고작’으로 손꼽는다.) 버호벤은 로보캅을 가리켜 ‘슬픈 창조물’이라 불렀다. 웰러의 슬로모션 하나하나에서는 로보캅의 고뇌 - 그는 ‘기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가 끊임없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 가 그대로 느껴졌다. 버호벤은 종종 카메라 뒤에 우두커니 서서는 웰러의 ‘환상적인’ 움직임을 관찰하며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정작 ‘양철통’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는 웰러의 입장에서는 동작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로보캅의 의상은 사실상 ‘이동식 사우나’나 마찬가지였다. <로보캅>의 촬영은 (하필이면) 1년 중 가장 더운 때에 시작됐는데, 이 때문에 웰러는 하루에도 몇 킬로그램 분량의 땀을 흘리며 연기를 해야 했다. 로보캅 의상 속의 온도는 문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웰러는 거의 질식 직전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촬영을 마치기 전에 탈수증으로 죽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버호벤에게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SOS 신호를 보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버호벤은 로봇 옷의 내부에 냉각 시스템을 장착하도록 스탭들에게 지시했으나, 이 시스템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결국 웰러는 ‘죽음에서 다시 부활한 캐릭터’를 ‘죽음을 무릅쓰고’ 연기한 셈이다.
한편,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로보캅 의상은 버호벤에게 또 다른 (예상치 못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시청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을 로보캅이 체포하는 신이 있다. 본래 이 장면에서 로보캅은 계단을 멋지게 올라간 뒤 벽을 뚫고 인질범을 붙잡게 돼 있었다. 헌데, 이 장면을 찍던 도중 버호벤은 웰러에게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이 의상을 입고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다고요!” 이것은 ‘투정’이 아닌 ‘진심’이었다. 로보캅의 의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정상적으로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는데(웰러는 ‘발꿈치’가 아닌 ‘다리 전체’로 간신히 로보캅의 걸음걸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물며 무릎 관절을 굽혀서 계단을 올라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버호벤은 궁리 끝에 ‘편집의 마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즉, 로보캅이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의 장면만을 미디엄 쇼트로 ‘살짝’ 보여주고는 다른 장면(동료 경찰이 확성기를 통해 인질범과 협상을 벌이는 장면)을 끼워 넣어 관객의 주의를 분산시킨 뒤 웰러가 계단을 올라선 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물론 웰러는 실제로는 계단을 올라간 적이 없다. 이와 유사한 트릭은 ‘로보캅의 운전 장면’에서도 쓰였다. 의상의 워낙 두꺼웠기 때문에 웰러는 의상을 착용한 상태에서는 차의 운전석에 아예 착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반신에만’ 의상을 걸친 채 차를 모는 장면을 연기했다. 영화에서 로보캅이 차를 모는 장면이 늘 미디엄 쇼트(허리 위의 부분만을 보여줌)로 찍힌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 장면에서도 역시 ‘싸구려 편집 트릭’이 사용됐다. 영화를 유심히 보신 분은 로보캅이 차에서 내릴 때는 늘 ‘한쪽 발을 땅에 디딘 상태에서 다른 쪽 발을 차에서 살짝 빼는 동작’만이 화면에 비친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을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로보캅이 차에서 실제로 내리는 모습’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쓰인 트릭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트릭이 쓰인 장면은 <로보캅>의 트레이드마크 신이 되어 포스터에도 등장하게 됐다!) 버호벤은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옹고집쟁이 웰러와의 호흡을 맞춰가고 있었다.
<로보캅 RoboCop>을 연출하며 폴 버호벤은 참으로 ‘진귀한’ 경험을 했다. 이전까지 그에게 있어서 배우란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는 일종의 고용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메소드 배우’라고 여기던 피터 웰러의 생각은 달랐다. 웰러는 영화 제작 현장에서 가장 능동적이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배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버호벤은 가끔씩 웰러의 기막힌 캐릭터 해석에 “허어, 그거 멋진 걸?”이라며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배우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버호벤은 때때로 웰러를 다룸에 있어서 ‘실수’를 범하곤 했다. 간혹 버호벤이 웰러의 정체(?)를 깜빡 잊고 “좋아, 피터. 이제 저 쪽으로 걸어가게!”라고 말하면, 웰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버호벤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버호벤 씨, 피터 웰러는 메소드 배우입니다. 지금 자기 캐릭터에 완전히 심취해 있어요. 그는 지금 ‘피터’가 아니라 ‘로보(로보캅의 애칭)’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버호벤은 웰러를 향해 다시 이렇게 외쳤다. “좋아, 로보! 이제 저 쪽으로 걸어가게!” 웰러는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웰러에게도 버호벤과 일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경험이었다. 웰러를 포함한 배우와 스텝들을 특히 당황케 한 것은 버호벤의 ‘리얼-타임 액팅’ 철학이었다. 버호벤은 대부분의 신을 더도 덜도 아닌, ‘각본의 묘사된 만큼’의 길이로 딱 잘라서 연출하곤 했다. 다른 감독들처럼 그 신에 잡다한 해석을 가미하여 질질 늘린다든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예컨대, 웰러가 “제가 (각본에 묘사된) 이 문이 아니라 저 문으로 나가는 건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버호벤은 이렇게 딱 잘라서 대답하곤 했다. “아냐! 각본에 써 있는 것 그대로 하게. 고민할 필요 없네. 각본 상 방아쇠를 당기라고 돼 있으면, 어떻게 당길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당겨버리면 되는 걸세!”
사정이 이렇다보니, 버호벤의 영화에서 감흥을 자아내는 것은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바로 카메라의 무브먼트와 편집이다. 버호벤과 처음 호흡을 맞춰본 스태프들은 촬영분을 볼 때마다 크게 놀랐다. <로보캅>에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고정돼 있는 신이 거의 없다. 카메라는 늘 누군가를 - 혹은 무언가를 - 계속 쫓고 있다. 심지어 정적이어야 할 ‘대화 신’에서도 역동성이 느껴지는 것이 버호벤의 작품의 특징이다. <로보캅>의 편집을 맡은 프랭크 유리오스트는 버호벤과 작업을 하며 실로 ‘기괴한’ 경험을 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편집실에서 ‘이 장면은 너무 짧은데...’라고 하며 자신이 애써 찍은 장면들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버호벤은 이와는 정 반대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너무 길어!’, ‘아직도 너무 길어!’라고 외치며 편집자에게 가차 없이 가위질을 할 것을 요구했다. 버호벤은 ‘같은 배경이 계속 비치는’ 정적인 신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로보캅>에 이와 같은 ‘늘어지는 느낌’의 신을 단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 즉, 버호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에게 ‘숨을 고를 여유’를 전혀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버호벤의 작품에서 놀라울 정도의 박진감과 속도감, 남성적 리듬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독특한 연출 철학 때문이다. <로보캅>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은 개봉 직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로보캅>은 편집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버호벤은 <로보캅>의 액션 신을 연출함에 있어,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를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로보캅>의 촬영을 맡은 이는 요스트 바카노로 그는 이전에도 <오렌지 군인 Soldaat van Oranje> <스페터스 Spetters> 등에서 버호벤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버호벤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호벤의 ‘앙숙’인 롭 보틴은 그렇지 못했다. 버호벤은 로보캅의 의상에 강렬한 형광 불빛을 비춰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자고 제안했다. 바카노는 이것이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으나, 보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리우드식 영화 제작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던 보틴은 ‘SF 영화에서는 특수효과나 특수분장이 티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조명을 주로 활용해야 한다’는 관행을 일종의 철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강렬한 조명을 비출 경우 ‘당연히’ 로보캅의 특수의상의 약점이 두드러져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틴이 ‘딴지’를 걸자, ‘버호벤 편’이었던 바카노는 ‘강렬한 조명을 로보캅에게 비치면, 의상이 거울처럼 빛나게 되고 주변의 모든 것이 반사되어 그의 신화적 요소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순간, 보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때부터 보틴의 ‘적’은 두 명(버호벤과 바카노)이 되어 버렸다! 결국 보틴은 ‘2:1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버호벤과 바카노에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러나 보틴과 버호벤의 전쟁이 이렇게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영화의 후반부, 로보캅이 헬멧을 벗자 (머피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드디어 두 사람 사이의 ‘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머피의 맨얼굴(뒷통수의 기계 부분과 교묘하게 연결돼 있으며, 이음매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은 매우 정교한 분장술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특수분장의 대가답게, 보틴은 이 부분을 기가 막힌 솜씨로 처리했다. 그러나 버호벤이 이 장면에서도 ‘강렬한 조명’을 쓰려고 하자, 보틴은 기겁을 하며 그것을 제지하려 했다.
조명이 강렬하면 특수분장을 한 부분에서 ‘가짜 티’가 물씬 풍길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보틴이 거칠게 ‘반항’하자, 버호벤은 ‘그럼 테스트 쇼트를 한번 찍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보틴과 버호벤은 시사실에서 완성된 테스트 쇼트를 검토했다. 버호벤은 쇼트를 본 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보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보기에는 아주 멋진 것 같은데?”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여기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버호벤은 사실상 보틴에게 “제발 딴지 좀 그만 걸고 내 말대로 하자고! 응?!”이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틴의 대답은 이랬다. “폴... 제 생각에는 조금 더 손질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약간만 더 손보면 이 장면의 퀄리티는 더 향상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보틴이 이유 없이 버호벤에게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 분장이 너무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틴의 대답을 듣고 버호벤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향상? 향상이라고! 내가 보기엔 훌륭하기만 한데 무슨 소리야! 롭, 지금 자네는 무슨 외계 괴물 영화라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건가? 이건 ‘경찰 영화’라고!” 버호벤이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보틴은 결국 시사실을 뛰쳐나갔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그는 사직서를 내기로 결심하고 로비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로비의 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버호벤이 씩씩거리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버호벤은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외쳤다. “도대체 왜 그렇게 고집이 센 건가? 응?!” 어이가 없어진 보틴은 ‘이 양반이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분을 삭이지 못한 버호벤은 근처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걷어 찬 뒤 그 곳을 떠났다. 잠시 후 제작자 존 데이비슨이 보틴 앞에 나타났다. 보틴은 고개를 흔들며 “대체 저 사람 왜 저런데요?”라고 물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데이비슨은 이렇게 능청스러운 대답을 했다. “걱정 말게나. 저 사람 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일세. 하지만 정말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수차례의 ‘대전’을 치르면서 버호벤과 이미 ‘정’이 들어버린 보틴은 결국 버호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당황스럽게도) 두 사람은 버호벤의 다음 작품인 <토탈 리콜 Total Recall>에서도 다시 만나 환상적인(?) 앙상블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듬해, 보틴은 <토탈 리콜>의 빛나는 특수 분장/효과를 진두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생애 최초의 아카데미 상을 거머쥐게 된다. 1987년 7월에 개봉한 <로보캅>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선풍적인 인기와 더불어 로보캅과 관련된 각종 부가상품(장난감, 티셔츠, 비디오 게임)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으며 로보캅을 소재로 한 만화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부지불식간에 <로보캅>은 아메리칸 팝 컬쳐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버호벤은 이 작품 단 한편으로 ‘특급 상업영화 감독’의 대열에 끼게 됐다. 이 모든 경이적 현상들은 버호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시사회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로보캅>을 처음 본 날의 ‘짜릿한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날, 버호벤은 ‘제발 야유나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초조한 심정으로 관객들 중에 섞여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관 안은 불이 꺼진 직후부터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관객들은 ‘정확히’ 버호벤이 원했던 대로, 웃어야 할 곳에서 웃고 스릴을 즐겨야 할 곳에서 숨을 죽이며 스릴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를 넘어선 폭력 장면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그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관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버호벤은 ‘폭력 장면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격렬하면 오히려 유머를 유발한다’는 독특한 철학을 지닌 감독이다. <로보캅>에는 그의 악랄한 유머감각이 빛나는 장면이 상당히 많다. 당장 ED-209가 ‘에러’를 일으키는 영화의 초반부 신부터가 그렇다. ED-209가 기관총을 마구 난사해 OCP의 직원 하나를 ‘벌집’으로 만들어놓은 뒤, 직원 하나가 “누가 응급의료팀 좀 불러요!”라고 외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로보캅이 딕 존스를 쏴버린 뒤 OCP의 회장(‘올드 맨’)이 “총 솜씨 좋군! 자네 이름이 뭔가?”라고 묻자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영화의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일제히 “머~~피~~~!!!”라고 외쳤다. 버호벤의 영화 인생에서 이보다 더 짜릿했던 순간은 없었다
글이 좀 길긴하지만 <로보캅> 팬들이시라면 재미나게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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