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군대를 가게 됐을때, 나는 나라를 지키러 가야했다. 명목상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의 의무였지만 현재 군에 있는 사람들과 전역한 사람들은 알고있다. 나는 그저 북괴의 침략을 막는 그런 전술에서의 한 부품, 게임으로 치면 마린 하나밖에 안되는 그런 존재다.
전쟁이 나도 우리집 대문 앞에서 총 한자루 들고 북괴가 들어오지못하게 막는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들, 친구들, 얼굴은 몰라도 같은 국민들을 위해 내 가족의 생사를 몰라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작전 수행을 해야한다.
훈련중에 산에서 굴러 넘어져 무릎에 피멍이 참외만하게 났다. 훈련중에는 전투복을 벗을수 없어서 상태를 몰랐지만 너무 아파서 정상적인 임무수행이 불가능했다. 내가 속한 분대의 간부분대장은 왜이렇게 쳐지냐며 인상을쓰고 또 쳐지면 얼차려를 주겠다고 화를 냈다. 작전중이라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못했다. 환자가 발생하면 우리 분대의 위치가 들통날뿐만 아니라 작전을 중단해야 했으니까. 그때가 상꺾때였는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었으면 아프다고 말 할 수 있었을까.
2015년 8월, 목함지뢰와 대북 확성기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군 내의 모든 장병 출타금지와 전방부대가 준전시상황 대기중이었을 때도 우리 군 장병들은 군사령관, 사단장, 여단장의 서신으로 정신교육을 받았고 대대 간부들로부터 전쟁 준비, 대외에 유언비어 발설금지등 강도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때의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몇가지 예를 들자면 비흡연자인 사람들은 그 불안함과 초조함을 못이겨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들은 언제 저 산 너머에서 미사일이나 전투기가 넘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하늘도 제대로 못보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한사람이 북한군 세명만 죽이고 죽으면 우리나라가 이기는 게임이라며 쓴웃음 지으며 긴장을 달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내무부조리와 폭언과 각종 가혹행위는 존재했다. 수시로 선임들에게 끌려가 욕설과 폭언을 듣는 이도 있었고 취침시간에 선임이 침상앞으로 와서 '야 000너 나와' 라고 하는 날이면 화장실에서 쥐죽은듯이 갈궈지며 침낭속, 모포 속에서 눈물로 세수하며 이를 꽉 다물고 자살하고싶은 마음을 다잡고 멘탈을 붙잡아야 했다.
가족이 너무나 보고싶었다. 친구들도 너무 보고싶었다. 그래도 휴가나가면 예비역 선배들이 '네가 근무 서줘서 내가 발 뻗고 잔다! 고맙다'며 말해주면 그거 하나로 만족했었다.
전역한 이들은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아 내가 이러고 있는거 엄마, 아빠가 알면 울텐데...' 심장 한켠, 가슴이 너무 시리고 아파도 참고 버티는걸 배워왔다. 어쩌면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일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군대를 갈 필요가 없는이들에게 마초부심을 부리면서 군대로 남과 싸우기 싫다. 그렇다고 고생했다고 말해달라는 구걸을 하기는 더 싫다. 나는 사회의 한 부품이고 조각이다. 사회를 유지하기위해, 국가를 위해 2년 안되는 시간동안 '왜?' 라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살았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곳에 존재하는지 이유를 찾다가 미쳐버릴것 같았다. 혹자들은 임신과 군대를 비교하고, 군가산점제와 취직후 호봉, 연봉의 차이로 대립한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은 상호 에너지만 소비할 뿐이지 발전이 없다는것을 다년간의 사회 인식 변화로 알 수 있다.
군필자들은 많은걸 바라지 않는다. 개선장군처럼 카퍼레이드를 하며 축하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전역후 알바를 구하며 '군필자 우대' 를 보고 씁쓸한 웃음 지으며 그뜻을 곱씹는다. 그냥 인정해 달라는거다. 요즘 급식들이 쓰는 ㅇㅈ? 이런 가벼운 소리가 아니다. 군 복무기간때의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동감해달라고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곳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고통속에서 돌아왔음을 인정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