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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나 감독의 이름만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영화 선택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년
"이름만 보고 영화를 봐도 되는 감독"을 제 마음 속에서 선정하곤 하는데요,
국내에는 장 훈 감독, 봉준호 감독, 김기덕 감독 등이 있으며
(박찬욱 감독은 재미있었던 작품이 많은데도 볼 때마다 안심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외국에서는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미셸 공드리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메멘토』를 시작으로 모든 작품을 보았음에도
아직까지 100% 안심하고 보지 않았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를 시작으로 제 안에서 "무조건 믿고 보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 리뷰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리뷰는 개봉 초기 작품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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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그리고 보실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테지만,
『덩케르크』는 프랑스 됭케르크 해안에서 일어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탈출 작전"이라 불리는
다이나모 작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해안 3개의 도시 중 덩케르크 단 하나만을 남겨 두고 이유 불명의 진군 중지가 떨어진 독일군,
그리고 민간 선박까지 총동원되어 진행되어 무려 약 40만 명 가량이 구출된 이 작전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연합군의 사기 진작과 투지 회복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으며,
세계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역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단초를 제공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승리할 역량이 이미 충분했던 연합군이 독일군에 대한 과대평과와 공포,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의 덩케르크 해안 사진>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과장들이 훼손할 수 없었던 위대함이었기에
꾸준히 다른 미디어로 재생산되어 온 사건인 만큼
놀란 스타일의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지가 굉장히 궁금했고
또한 그만큼 걱정거리도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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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영화가 아니다
영화 CF를 보신 분들이라면 지겹도록 본 문장이지 않나 합니다.
저 또한 저 문장을 보며 "그럼 뭔데?"라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보고 나니
두 가지 의미에서 정말 이건 전쟁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저는 이 영화는 전쟁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전쟁 영화라기보단 재난 영화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덩케르크』에서는 그저 육, 해, 공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혹은 살리고자 하는 몸부림에 극단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전쟁은 그러한 상황을 현실적이지만 추상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덩케르크』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패리어(톰 하디 役)를 포획하는 장면 외에는
분명히 각지에서 포위중일 터인 독일군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질 않습니다.
그저 총성과 폭발, 그리고 슈투카 폭격기와 제리코의 나팔(폭격기가 급강하 시 내는 굉음)로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고편이라서 안 나오는 것인 줄 알았던 독일군은 정말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액션(작용)의 주체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만큼
리액션(반작용)의 주체가 더욱 더 부각됩니다.
즉,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전투 현장의 긴박감이나 잔혹성과 같이
기타 전쟁 영화에서 많이들 보여준 일반론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그 속에 놓인 자들의 생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고자 했고,
이 때문에 전투 작전이 아닌 탈출 작전에 속하는 다이나모 작전을 소재로 선택하였으며
더욱 더 탈출자들에 주목하기 위해 독일군을 제외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체 없는 공격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을 그린 영화라니,
재난 영화로 분류되기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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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집의 예술, 정보 컨트롤의 극단
『덩케르크』는 세 가지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합니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시점
덩케르크 해안으로 연합군을 구출하러 가는 한 요트의 시점,
그리고 탈출 작전에 동원된 영국 스핏파이어 공군 편대의 시점.
각각은 동시간대에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해안에서는 일주일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요트에서는 하루간의 이야기이며
하늘에서는 한 시간의 이야기죠.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개 이상의 시점이 같은 사건을 겪게 될 때
작품은 관객에게 굉장히 묘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보도록 하죠.
패리어가 소속된 스핏파이어 편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둘씩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 기 중 두번째가 추락했을 때 흔드는 손에
패리어는 무사할 것이라 안심하고는 손을 흔들어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나중에 요트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 당사자가 당장 빠져죽을 상황에 처한 것을 보여주죠.
클라이막스에서는 탈출을 돕는 구축함의 이동을 위한 기뢰 제거선을
슈투카 폭격기가 견제합니다.
그리고 이 폭격기를 세 가지 시선에서 바라보며
(나중에는 세세하게 나뉘어 약 5개의 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 시점에서만이 제공되는 정보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한 사건을 두고 여러 시점에서 보여주는 연출 방식은
필연적으로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반복하게 되는 구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때문에 정보 전달의 컨트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전달되어야 할 정보가 너무 미리 전달되면 쓸데없는 반복이 되어버리고,
너무 늦게 전달될 경우 뜬금없는 구멍 메우기식 정보가 되어 정보의 가치 그 자체가 떨어지게 됩니다.
『덩케르크』에서는 적절한 시나리오 설계와 인원 배치로 당연히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그 인원들을 순차적으로 특정 상황을 겪게 하면서
점진적으로 심도 있는 정보를 제공하여 몰입감은 물론 상황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감을 상쇄합니다.
공군의 시점에서는 연료가 바닥나는 상황을 알고서도 남은 폭격기를 쫓아가는 장면만을 보여주고,
요트의 시점에서는 이 둘에 대한 긴박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요트에 그 공군의 동료가 타게 되는 상황을 만든 것은 또 얼마냐 영리한 선택인지요.)
그리고 해안에서는 그 폭격기가 탈출 작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를 내포한 대사를 던지죠.
그리하여 관객은 반복되는 상황임에도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정보를 전달받아
이를 조합하여 온전한 인과관계를 지닌 완성된 정보로 전달받게 되며
이를 다시금 결정적으로 조합된 장면을 통해 확인받습니다.
너무나도 영리한 정보 컨트롤과 그에 맞는 각본 구성 덕분에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이 정말 짧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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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스 짐머의 음악, 영화의 완성을 넘어 체험의 영역으로.
이 영화의 음악은 『배트맨 트릴로지』,『인셉션』, 『인터스텔라』를 통해
놀란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한스 짐머가 담당했습니다.
음악이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결정적 요소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만,
영화의 이야기 그 자체를 간접적으로 체험시키는 요소로서 사용되는 영역에 다다르는 것은
좀처럼 영화에서 겪기 어려운 귀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한스 짐머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에 이어 다시 한 번 이 영역을 건드립니다.
<『Non Regrette Rien』라는 곡의 변주를 통해
영화의 줄거리, 꿈의 속도감, 인과관계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바 있는 영화 『인셉션』>
이미 많은 영상물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입니다만,
영화 『라 비앙 로즈』에서『Non Regrette Rien』를 부르는 역할의 배우가
『인셉션』의 멜 역을 받은 배우라는 점,
가사의 내용이 주인공 코브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Non Regrette Rien』의 반주를 느리게 틀면 『인셉션』의 메인 OST와 흡사하다는 점 등
많은 부분에 있어 곡의 선택과 구성에 치밀함을 보인 바 있습니다.
『덩케르크』에서는 어떤 식의 음악을 보여주었는가?
먼저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리는 두 가지입니다.
"제리코의 나팔"이라고 불리는, 슈투카 폭격기가 급강하할 때 나는 사이렌음과 흡사한 소리
그리고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
처음 사이렌과 같은 음악이 들릴 때, 폭격기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음악은 아무 일 없이 끝나죠. 그런데 지나갔다 싶을 때 폭격기가 등장하여
음악과 유사한 사이렌 음을 내며 모래밭에 폭격을 가합니다.
이런 상황을 두세 번 반복시키면,
관객은 점점 음악과 폭격기 강하음을 혼동하게 되면서
등장인물의 반응 없이는 상황을 판단하기가 헷갈리는 상황이 됩니다.
즉, 음악만 들어도 폭격기를 떠올리며 긴장을 갖게 되는 거죠.
전쟁을 겪지도 않은 사람에게 PTSD를 간접 체험시키는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계가 째깍이는 음을 통해서는
단순히 하나의 사건, 하나의 작전의 경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점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시간"이라는 코드를 뇌리에 박아넣습니다.
배가 빠져나갈 수 있는 타이밍으로,
고장난 연료계를 시간 계산으로 대체하는 모습으로,
죽어가는 요트 선원의 모습으로
점점 긴박하게, 하지만 막을 수 없이, 그리고 막고 싶지 않게 찾아오는 시간의 무게감을
계속해서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이 긴박한 소리는
탈출에 성공했음에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탈출 작전을 평하는 신문기사를 읽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군인들이
진정 안심할 때 거짓말처럼 멈춥니다.
여기에서 째깍이는 소리는 한 가지 효과를 더 보여줍니다.
우리는 경과하는 시간을 보는 동시에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다려 온 심정을
소리의 멈춤을 통해 표현합니다.
"몇 시간만 버텨내면 살 수 있어" 라며 시간의 흐름에 집착하던 이들이 더 이상 시간을 신경쓰지 않아도 될 때.
몇 번의 배의 폭발을 겪으며 바다에 뛰어드는 경험을 지나고 시간 생각 없이 잠드는 것이 허락될 때.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시민들과 마주치는 시간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때.
그 때 뚝 끊어지는 시계바늘 소리를 통해 이들의 심정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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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영화를 전쟁 영화가 아닌 재난 영화로 분류한 만큼
기존의 전쟁 영화를 생각하고 관람하시는 분들은
지루하고 지진하며 밋밋한 영화로 생각하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점만 해결된다면 충분히 최고의 영화로 보기에 손색이 없으니
놀란의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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