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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황
경제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미국 원조는 우선 당장의 곤경을 해결 하는 데 기여했다. 45년에서 61년까지 약 31억 달러 원조. 1950년대 전반기까지는 식료품 등의 소비재 중심의 구호원조였고, 전쟁 후에는 군사 원조적 성격이 강했다. ICA(국제협조처 원조)는 53~61년까지 17억 달러로 제공되었고 이는 팽창한 군사비 지출로 인한 한국 정부의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준군사적 방위 원조였다. 56~61년 까지 제공된 미 잉여농산물 원조인 PL480호 원조 판매 대금도 주로 군사비로 사용.
전쟁 후 정부 재정은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 미국은 원조를 지레대로 한국의 경제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1952년 4월 한국과 유엔군 사이에 맺은 마이어협정에 의해 설치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미국에 대한 원조업무를 통할하는 역할, 실제로 한국 경제운영의 최고의사결정기구처럼 활동.
미국 원조는 관료독점자본을 형성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업과 농업 간의 연계를 파괴했다. 소비재 위주의 공업으로 재편, 상업.서비스업의 팽창을 초래. 원조는 신흥재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1950년대 들어오면서 광.공업의 자본의 비중이 현저히 커지면서 전반기에는 중소기업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이후 경제가 대기업 중심으로 편성되고 미국원조 못지않게 귀속기업체의 부하가 큰몫을 했다.
대기업체나 큰공장은 대부분 귀속기업체였는데 50년대에 대개 불하되었는데, 불하가격이 실제 가격보다 낮았고, 연고자도 조작되는 경우 多. 또 인플레이션 심했던 당시 재벌은 액면 가격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지가증권이나 은행 융자를 받아 매각 대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특혜를 받아 비대해졌다.
정부가 경제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정경유착을 불러왔다. (50년대 매판자본, 관료매판자본, 관료독점자본 등으로 부르는 것은 정경유착과 관련이 크다) 정경유착은 정치자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기 마련이다. 정경유착으로 재벌이나 대기업체 사장은 부정축재자 또는 특권 세력으로 부정적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한국 경제는 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치경제 성격이 컸는데, 미국은 자유경제를 강조했다. 미국은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귀속시 업체와 정부 관리 물자의 불하를 촉구했다. 한국 경제는 외부 의존적 성격이 컸을 뿐만 아니라 산업구조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수립되던 해부터 1,3차 산업의 비중이 높았다 ※1차산업: 농업.목축업.임업.어업등 자연에 작용하는 산업의 총칭, 2차산업: 원시적 산업을 제외한 모든 생산업 산업, 3차산업: 서비스산업)→경제의 파행성을 단적으로 보여줌. 하지만 희망적읜 요소로 전쟁 직후 혼란스러웠던 한국경제 서서히 회복(한국전쟁으로 천정부지로 뛰었던 인플레이션 현상 수습, 대부분의 시설이 부흥궤도 오름, 연평균 성장률도 다른 후진국에 비해 양호, 58년 원조 감소로 불황이 닥쳤으나 다시 꾸준한 성장률 기록. 4.19후 2.1%로 떨어짐)
미국의 원조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원경제라 표현할 정도로 미국의 원조가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원조는 해방 이후 점령지역구호원조(garioa원조)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면서 한미원조협정에 의한 ECA원조로 좀 더 장기적 원조로 바뀌었다.ECA원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SEC원조로 바뀌어 1953년 까지 지속 되었으며 전쟁 중에는 긴급구호물자 제공 및 전쟁 후의 복구를 위한 유엔명의의 CRIK원조, UNKRA원조등이 제공되었다. 휴전이 성립되면서 남한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미국의 원조는 45년부터 61년까지 총 원조액 31억 달러에 달했으며 42%원재료 및 중간제품 25%가 밀 옥수수등 농산물로 소비재 중심의 경제 원조를 하였다. 미국의 무상 원조가 한국전쟁을 통한 심한 식량난과 극도로 감퇴한 공업생산력을 극복하고 남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어느정도 안정시켜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던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원조의 목적은 남한을 미국의 영향력이 발휘 되는 자본주의 경제권에 묶어 사회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것과 한국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원조물자 대금인 대충자금(국방예산이 예속)을 통하여 전쟁이후 과잉 생산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을 위해서가 아닌 자국의 이익을 위한 목적이 더 강하였다. 이렇듯 긍정적인 영향뿐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한국경제가 미국의 원조 물품의 판매대금인 대충자금을 통하여 남한 경제의 운용 전반에 간섭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의 경제는 필연적으로 미국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로 인하여 농업에 있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PL480원조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국내의 수요와 필요량을 넘어서 도입되어 이에 저곡가정책으로 인하여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업기반이 완전히 허물어져 한국경제의 유기적인 발전을 저해하였다.
4.19 혁명
4.19 혁명 전개과정
배경: 조병옥 후보가 병으로 죽게되자 이승만의 단독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장면이 건재하였고 이에 이기붕을 당선 시키기 위해서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전개과정 : 이에 2.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처음 시위를 펼쳤고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고 이후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었는데 최루탄이 박힌채 죽은것이 알려지고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4. 18 고려대생 시위가 일어났는데 4. 19시위를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한 매개였다. 이 시위를 조폭으로 데모진압. 4. 19 화요일 아침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게 된다.
서울대생은 국회의사당 선점, 후에 동국대생이 3차 저지선앞에서 대치시 경찰 발포가 시작. 그때부터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로인해 정부는 계엄을 선포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불길 치솟고 파출소 파괴되는 등 막기 어려운 상태였고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대학교수단도 동참한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의 시위는 계속. 다음날 더욱 늘어나면서 25일 이승만 하야가 점차 소리가 커지며 결국 이승만이 무릎을 꿇음. 국회는 이승만 즉시 하야, 정. 부통령 선거다시 할 것.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여기서 군의 중립도 4. 19 성공의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의 한계)
사회.정치적 해결문제 모순이 많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개혁이나 의지가 없었다.
무능하고 부패의 정부: 친미.반공으로 뒷받침하였다. 모든 반대세력 제거에 중점 이로 인해 민중의 저항이 커지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짐.
(한계): 혁명이란 체제의 성격이 바뀌어야 하지만 체제나 권력의 성격이 바뀌지 않음. 4.19 혁명에서는 야당이 들어서긴 하지만 체제자체의 변화는 없었으며 새로운 대안이 없었고 이후 5.16 군사 쿠테가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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