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난 대선 때 확인된 것처럼 야권은 새누리당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너무 심각하죠.
언론도, 정부 기관도, 심지어 선관위도 새누리당 편입니다.
새누리는 똥을 싸도 최소 30% 먹고 시작하는데
야권, 특히 더민주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도 고정 20% 간신히 먹을까 말까입니다.
여기에 가장 큰 판도를 쥐고 있는 부동층은 종편과 조중동이 완벽히 장악해 뒀죠.
심지어 젊은 세대를 겨냥해서 인터넷 여론까지 조작질을 합니다.
공평한 환경에서 정정당당하게 붙어도 새누리 콘크리트 때문에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아예 정정당당하지 않아요.
프레임 자체가 야권에게 불리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정청래가 백날 잘해봐야 어르신들에게는 "아 그 막말하는 놈?"하면 끝입니다.
이해찬이 백날 잘해봐야 종편에서 친노 패권이 어쩌고저쩌고 하면 그냥 끝입니다.
친노, 좌빨. 이 두 단어로 야권의 백마디 호소를 다 카운터칠 수 있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암울하고 암담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물론 정론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싸운다. 이길 때까지 싸운다"겠지만
당장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호흡기를 뗄 지경인 상황에서 어찌보면 이상론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뭐겠습니까?
프레임 자체를 벗어나는거죠.
그들이 친노라고 한 이들 쳐내고, 그들이 좌빨이라고 한 이들 쳐내고,
아직 딱히 프레임이 걸려있지 않은 이들을 앞에 내세워 선거전을 치릅니다.
이러면 새누리측도 기존 프레임을 그대로 써먹기는 어려우니 새로운 전략을 짜야합니다.
하지만 지금 새누리는 내분 중이니 이게 그리 빨리 이루어지긴 어렵겠죠.
그 사이에 경제 이슈를 선점합니다.
결국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먹히는 테마는 여전히 '돈'이거든요.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했을 때 김종인이 한 말이 함축적으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겁니다.
"색깔론으로 가면 절대 못 이긴다. 경제 이슈를 선점해야 한다."
뭐, 딱 선거공학적인 측면에선 일리는 있는 생각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일단 새누리 과반만큼은 막고 본다"라는 관점에서라면요.
문제는 이 "무슨 수를 써서든"에서 결국 우리는 딜레마를 느끼는 겁니다.
야권이 야권의 정체성을 잃고,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을 잃고,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잃고,
새누리와 똑같은 이미지를 자처하고 포스트 새누리로 어필하여 선거를 이기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거죠.
김종인은 야권 성향의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향은 새누리에 더 가깝죠.
야권 지지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닙니다. 그는 한 번도 야권 지지자들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그로 하여금 야권으로 와서 새누리에 대항해 싸우게 만든 원동력은
자신을 배신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와 경제 민주화에 대한 믿음 두 가지일 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아직은' 김종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아, 여기서 진정성이라 함은 "새누리의 과반을 반드시 막아내겠다"라는 진정성이죠.
이건 진짜 진심일겁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선거를 이길 수만 있다면 야권의 정체성이든, 민주화의 정신이든 전부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그가 생각하는건 딱 하나죠.
"기존 프레임에서는 못 이긴다. 그러니 프레임을 벗어난다. 그러기 위해선 이미 프레임에 걸려있는 요소는 모두 버린다."
그러나 기존 야권 지지자들은 불편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야권으로부터 보았던 희망들, 믿었던 것들이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하나 둘 버려지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새누리 과반은 막고 봐야하는 거 아니냐"라는 관점에선 그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새누리랑 똑같은 놈이 되어서 과반 막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한다면 잘못된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하나의 문제가 더 있기는 하죠.
그렇게 다 버리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건 맞느냐. 확실히 새누리 과반을 막을 수 있는거냐.
글쎄요.
개인적으로도 정말 확실히, 무조건 새누리 과반을 막을 수만 있다면야
김종인의 생각에, 좀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하면 확실히 이기는 걸까요?
어쩌면 선거는 선거대로 실패하고 야권의 빛만 잃는 것 아닐까요?
결국 문제는 이겁니다. 정치는 선거공학적인 접근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역사적으로 보면 전략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진 케이스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완벽한 전략이었고, 그대로 먹혀들어갔지만, 이상하게도 전쟁에서는 패배해 있는거죠.
전 그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정청래를 희생해서 선거를 이기는 결과가 아니라,
정청래도 잃고 선거도 지는 결과가 나올까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