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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lovestory_68296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2
    조회수 : 2792
    IP : 59.7.***.160
    댓글 : 15개
    등록시간 : 2014/08/22 21:51:03
    http://todayhumor.com/?lovestory_68296 모바일
    [BGM] 새벽녘 밤을 밝히는 시 - 첫 번째 이야기



    1.jpg

    김소월,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2.jpg

    이정하, 멀리서만

     

     

     

    찾아 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 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 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만 멀리서만 그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3.jpg

    고두현, 20분




    아침 출근길에 
    붐비는 지하철 
    막히는 도로에서 짜증낼 때 
    20분만 먼저 나섰어도 
    날마다 후회하지만 
    하루에 20분 앞당기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요 

    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 
    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 
    노랗게 달궈놓은 길 옆에 앉아 
    꽃 피는 모습 들여다보면 

    어스름 달빛에 찾아 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데 17분 
    꽃잎 활짝 피는데 3분 

    날마다 허비한 20분이 
    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이었구나.







    4.jpg

    황경신, 첫눈이 온다구요?

     

     

     

    당신은 그냥

    밤으로 오세요.

    꿈으로 오세요.

    눈길에 발자국 하나, 얼룩 하나 남기지 말고

    내가 왔어요, 소리도 내지 말고.

     

    그래야 내가 모르죠.

    당신이 온 것도 모르고

    어느새 가버린 것도 모르고

    떠나는 사람이 없어야 남는 사람도 없죠.

    행복이 없어야 슬픔도 없죠.

    만남이 없어야 이별도 없죠.

     

    첫눈이 온다는 날

    기다림이 없어야 실망도 없죠.

    사랑이 없어야 희망도 없죠.

    잠시 왔다가 가는 밤처럼

    잠시 잠겼다 깨어나는 꿈처럼

    그렇게 오세요.

     

    그렇게 가세요.







    5.jpg

    고정희, 고백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전되었다







    6.jpg

    이장근, 왜 몰라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연꽃만 칭찬하지만

     

    연꽃을 피울 만큼

    내가 더럽지 않다는 걸 왜 몰라.

     

    내가 연꽃이 사는

    집이라는 걸 왜 몰라.







    7.jpg

    백석,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8.jpg

    정지용, 호수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9.jpg

    서정주,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니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 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10.jpg

    기형도,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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