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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이 통과됐습니다. 새누리당은 재석의원 157명 중 찬성 156명, 반대 1명의 숫자가 말해주듯 압도적으로 테러방지법을 의결시켰습니다. 이로써 국정원은 정보수집권과 조사권, 감청권까지 손에 넣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국가기관으로 재탄생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국정원이 자행했던 대선불법개입 사건, 정치공작 사건, 간첩조작 사건, 민간인 사찰 등의 끔찍한 악몽들을 떠올려 보면 테러방지법의 의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강도에게 흉기를 쥐어준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국가비상사태라며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한 정의화 국회의장은 이날 본회의 표결에 앞서 "테러방지법이 (정치적으로) 악용된다면 저부터 앞장서 싸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이브한 인식의 소유자가 다름 아닌 국회의장입니다. 그동안 대통령과 새누리당, 국정원이 국민과의 약속을 누더기로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이념이 민생"이라고 강조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그 민생이 죽지 못해 안달입니다. 민생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가계부채율 1위, 노인빈곤율 1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가장 낮은 사회복지 1위, 자살률 1위 등의 'OECD 50관왕'이라는 지표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는 국민에게 약속했던 대선공약들 대부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노인기초연금 공약,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 무상보육, 군복무 18개월 단축, 책임총리제 및 책임장관제, 대통령친인척 비리 상설특검제, 검찰 개혁, 쌍용자동차 국정감사, 상시·지속적 업무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등 무수한 대선 공약들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의 공약 파기는 일일히 거론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유언비어는 떠돌아 다니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지칭합니다. 그렇게 보면 지난 대선 당시의 대통령 공약집은 한 편의 유언비어 모음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유언비어 살포자를 엄단하겠다며 연일 시민을 겁박하는 검찰과 경찰이 눈여겨 봐야 할 부분입니다.
민주주의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겠다던 다짐도 공염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계승과 발전은 커녕 민주주의는 지금 고사 직전의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시민의 권리는 갈수록 침해받고 있는 반면 집권세력을 위한 공안통치는 점점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시민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테러방지법까지 통과되었습니다. 누구 말처럼 무서워서 댓글조차 달기 힘든 세상이 도래한 것입니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약속들은 지금 어디에서 나뒹굴고 있는 것일까요? 국민과 철썩같이 맺었던 약속들이 하수구의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실체적 증거 앞에서 가정법을 운운하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인식이 얼마나 한가하고 위험천만한 것인지 그는 모르나 봅니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국정 운영이란 거의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류 언론을 통해 사실 관계를 호도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안으로는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온 것입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언제든 북한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상수를 활용해 종북 딱지를 붙일 수 있고, 40%에 가까운 든든한 지원군이 맹목적으로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폭주는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 오마이뉴스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몇몇 생물들은 수억년이 넘도록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생물들이 진화를 멈춘 까닭은 진화할 필요가 없는 우월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우월한 유전자, 즉 지역주의의 단단한 보호 아래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막나가고 있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테러방지법이 테러방지를 구실로 시민들을 감시하는 '국민감시법'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은 야당의원들의 필리버스터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고 법안 처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장 192시간에 걸친 필리버스터로도, 시민단체와 시민사회의 반대로도 테러방지법을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중과부적이었던 것입니다.
본회의 표결 결과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과반이 넘는 원내 다수당의 횡포를 막아낼 방법이 현실적으로 거의 없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날 본회의 장면은 악법 중의 악법인 테러방지법을 폐기시키고, 고사 직전인 이 나라 민주주의와 땅에 떨어진 시민의 권리를 복원시킬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야의 원내 의석을 바꿀 수만 있다면 많은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이 다수당이 된다면 세월호의 진실도 밝혀 낼 수 있고, 사라진 7시간의 행방도 추적할 수 있으며,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도 원점에서 재조사할 수 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성완종 리스트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고, 사자방 비리도 발본색원할 수 있으며,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 역시 다시 추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파탄난 남북관계를 바로 세울 수도 있을 겁니다.
ⓒ 연합뉴스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적 상식과 합리적 이성, 사회 정의에 반하는 정치권력의 역주행에 대한 제어와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력은 점점 뻔뻔해지고 무도해져 갑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사회는 상식과 이성, 정의와 양심을 위해 분투해온 사람들이 오히려 정치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일이 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몰상식과 비이성, 그리고 불의가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저해하고 위협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되돌려야 합니다. 몰상식과 비이성,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이 아닌 상식과 이성, 정의가 넘쳐나는 사회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테러방지법은 시민의 권리에 대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선전포고에 다름 아닙니다. 시민들이 저항하고 이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시민의 권리와 권익은 나날이 축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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