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05.02.15
읽은날 14.07.24
94p. 나의 가자미 색시
한번은 커다란 잉어를 낚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의 권유도 있고 해서, 옆집으로 들고 갔다. 할머니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기뻐하셨다. "우리 색시가 요즘 왠지 몸이 허해서……"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색시'라는 말이 유난히 귀에 와 닿았다. 뭔가 아름답고 따뜻하고 정겨운 말인 것 같았다.
101p. 나의 가자미 색시
"할머니, 왜 할아버지랑 결혼하셨어요?" 어느 날 저녁, 내가 물었다.
"내가 아직 여학교 다닐 때였는데 말이다, 매일 정미소 앞을 지나가야 했지. 그때 이 양반은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볼 때마다 추운 날엔 따뜻한 물을 주고, 더운 날엔 찬물을 주고 하더라고. 내가 연애를 시작해서 남자 친구랑 정미소 앞을 지나가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남자 친구랑 헤어져도 또 그렇게 하고…… 그래서 내가 먼저 가서 결혼하자고 했지."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왜 물을 드렸더랬어요?"
"이놈아, 예쁜 색시가 지나가면 뭐든 줘야지, 암."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약간은 부끄러우셨던지 얼굴을 붉히셨다.
168p. 눈꽃 놀이
하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우리에겐 새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그 시간을 무엇으로 메우겠는가. 이는 영서와 나의 사랑이 소위 어린애들의 불장난에 불과하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서로의 추억에 대해 불성실하기 때문도 절대로 아니다. 지금 내게 영서에 대한 배신감이나 증오 따위가 남아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 내게 영서에 대한 배신감이나 증오 따위가 남아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라면, 내가 아파한 시간보다 영서가 아파한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며, 내가 흘린 눈물의 양보다 영서가 흘린 눈물이 더 많았으리라고 확신한다. 행여나 어떤 상황적, 감정적 계기가 주어진다면, 그 무렵 못다한 사랑을 '소나기'나 '별'이 아닌 '화양연화'라는 이름으로 환성시킬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쉘부르의 우산'은 우리들의 젊었고 그랬기에 아름다웠던 그 한 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더 깔끔할 것이다. 설사, 과거의 흔적이 사진이나 일기, 심지어 자신과 같이 구체적인 물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 살아낸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서 재생시킬 수는 도저히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잊혀지는 생각처럼 외로운 존재이며, 인간의 기억은 그 인간 자체보다도 더 외로운 것이 아닌가. 과거는 어찌해도 현재의 적수가 될 수 없다.
184p. 내 몸 속의 곰팡이
내가 비뇨기과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의사가 내 등뒤에다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딸은 과년한 처녀니, 행동을 조심해야 될 겁니다."
나는 비뇨기과 맞은편에 있는 산부인과로 갔다. 그런데 비뇨기과와 내과 의사의 딸은 과년하고도 한참 과년한, 이미 노랗게 시들어가기 시작한 오이 같았으며,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은 내가 그녀 앞에서 무례하고 노골적인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취할 그런 행동에 나 자신이 방어를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인듯 싶었다. 원래 학적 관심과 호기심이 대단하고 지금껏 남자의 성기라곤 구경도 못해본 듯싶은 노처녀 의사는 아버지가 써준 소개장과 진찰 기록을 보더니 처음부터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 비상한 열의를 보였다.
"아주 독특하군요. 너무 독특해서 진찰 역시도 독특하게 할 수밖에 없겠고, 다른 환자들, 특히 환자들의 보호자에게 방해가 되므로 정기 진료가 끝나는 오후 여덟시 이후에 다시 와주세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산부인과를 그냥 나왔다.
268p. 절망
선생의 시신을 태워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을 보면서 나는 한순간 희극적이리만큼 처절했던 절망의 끄트머리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아쉬움을 보았다. 끝끝내 이 말을 차마 하지 못한 것, 그것이 내겐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선생님, 제가 기대한 것은 그 말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전 선생님께서 그것과는 다른 말씀을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