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柳寬順 1902년 음력 11월 17일/ 12월 16일-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지금의 병천면 용두리(당시는 동면 지령리는 자연부락 명치) 에서
유중권(柳重權) 과 이소제(李小悌) 사이에 3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주 영명학교를 2년간 다니다 미국인 순회 선교사 부인 사이러시의 도움과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우 6명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어 탑동공원까지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거기서 경관에게 붙들렸으나 곧 석방되어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에 다시 참여하고
무사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유관순은 학교가 휴교 상태가 되자 사촌언니인 유예덕(柳禮道) 과 함께 3월 8일 고향으로 왔다.
천안에서는 그때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월 9일 주일밤 예배가 끝나 교인들이 흩어진 후 부친의 주선으로 조인원과 그의 친구 이백하(李伯夏) 등
2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관순과 예덕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석에서 아우내(竝川) 장날인 4월 1일(음력 3월 1일) 을 기해 거사를 하기로 계획했다.
지령리에 총본부를 아우내 장을 가운데 두고 상호 5리 거리에 삼각형으로 있는 수신면 장명리(長命里)와 갈전면 백전리(栢田里)에 중앙 연락기관을 둘 것과 아우내 장을 중심으로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 여섯 고을을 망라하여 각 촌 각 면의 연락기관을 분담시키는 동시에 유림의 대표들과 한 마을에 수백 호씩 차지하고 사는 대성(大姓)의 문장(門長) 들을 움직일 계획을 했다. 연락원은 비교적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 애더와 관순이 맡기로 하였으나 몸 약한 사촌 애더가 일찍이 탈락하고 유관순 혼자서 연락일을 담당하였다.
병천 장날을 하루 앞둔 1919년 3월 31년 밤(음력으로 2월 그믐). 동생 관복과 친척 유제한에게 미리 준비해 둔
여러 자루의 홰를 돌려 매봉 꼭대기로 올라가 불을 붙여 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龜坪) 우각산, 강당산, 백적리 돌산, 세성산 등 동서남북에서 24개의 불꽃이 하늘을 밝혔다.
이튿날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로 나섰고 정오가 가까워 오자 3천여 장꾼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고 쌀가마 위에 올라서서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태극기와 조인원을 선두로 군중은 가쟁이 장터에서 병천 헌병분견소 앞까지 잇따라 만세소리를 높이며 행진해 갔다.
유중권, 김구응, 김상헌, 김구헌, 김교선, 주병호 등이 조인원을 뒤따랐다. 곧 그 뒤에 유관순과 어머니 이씨와 각 고을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대열을 지어 나아갔다.
헌병들이 해산을 명했으나 듣지 않자 상등병 진상부(溱相部)가 기총(騎銃)을 발포하여 3천 군중이 일단 물러섰으나,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과 남씨의 남편이 사망하자 약 40여명의 군중들이 그 시체를 떠메고 헌병분견소로 몰려왔다.
유관순은 "제 나라를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로 대들었다.
1천 5백명의 군중도 함께 몰려와 헌병분견소에 돌을 던지며, 소장을 잡아 끌고 밀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을 때 천안 헌병분대에서 20여 명의 응원병이 도착하여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19명이 즉사하고 43명이 부상하여 피바다가 되었다. 유관순의 부친에 이어 모친 이씨도 현장에서 숨졌고,
그 날 유관순은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가 헌병에게 검거되어 헌병 분견소로 끌려갔다.
이후 유관순은 서대문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0월 14일 정동예배당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유족 3형제와 동창생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그녀의 무덤은 도로개설로 손실되어 그 근방 어디에 옮겨졌다가 그 조차도 유실되고 말았다...
자알..헌다...
그. 런. 데.
프랑스의 聖女 쟌다르크와도 비견되며 일제통치에 항거하는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존재인 유관순 열사,
이러한 역사의 주축이 되는 중요한 인물을 2010년 2월,
신학기 초등학교에서 사용될 새 국어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빠진 사실이 드러났다.
2010년 2월 25일 교육과학기술부 등에 따르면 최근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그동안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린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3월 새학기부터 빠지게 됐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유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지역 기관.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는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강력 반발하면서 이날 이사회를 개최, 유 열사 전기가 교과서에 다시 수록되도록 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고.
그런 단체 뿐만이 아니지... 반발하는 사람들이. 어쩻거나,
류근창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장은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의 전기가 교과서에서 빠진 것은 매우 잘못된 일로 참담하다." 며 "교과서 재수록을 위한 추진위를 구성하고 정부 등을 상대로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 다시 싣도록 강력히 요구할 것" 이라고 밝혔다고 하고,
매년 3.1절 전날 유관순 열사의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봉화제' 주관단체인 '병천JCI' 도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JCI 는 또 뭐야.. -..-;;).
병천JCI 한봉균 회장은 "유 열사의 전기문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며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숨진 유 열사와 19명의 순국 선열의 분노가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 하다." 며 분통을 터트렸다.
또한 유 열사 추모각과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천안시 사적관리소도 유감의 뜻을 밝혔다.
김희순 천안시 사적관리소장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나라사랑과 민족사랑을 교육할 수 인물로 유관순 열사를 능가할 인물이 드물다." 며 "더욱이 올해는 처음으로 주요 인사가 참석하는 정부주도의 3.1절 공식행사가 유 열사 기념관에서 열리는 마당에 교과서에서 유 열사의 전기문이 빠지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 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바로 하루 뒤인 2월 26일 오전 10시 께,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가 교육과정 개편으로 삭제됐던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5학년 단원에 수록된다고 기사가 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 2월26일, "7차 교육과정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에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실렸으나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전기문 관련 단원이 5학년에 배정됐다." 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교과부는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주시경 선생을, 2학기에는 유관순 열사를 전기문을 통해
소개한다는 계획이란다.
초등학교 5학년의 새 국어 교과서는 내년부터 사용된다고 하고.
역사 과목이 수능에서 선택이라고 하던데..허... 참 재미있는 나라야...
그렇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