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즉 초인사상이라는 것에 대해 대충은 알겠는데요 이 위버멘쉬라는 대상에 대한 니체 (혹은 책 중 짜라투스트라)의 입장이 뭔지 모르겠어요
인간은 초극을 통해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며,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아니면 되어야 하지만 될 수 없다는 건가요?
아니면 되어선 안된다는 건가요 (이건 아닐거같은데...)
그렇다면 짜라투스투라는 제가 이해하기엔 위버멘쉬에 도달한게 아니라 단지 그 존재를 알려주는 역할일 뿐인거 같은데, 짜라투스투라가 위버멘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책 중에서 하는것 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그 이유는 뭔가요? 짜라투스투라는 이미 위버멘쉬에 도달한 것인가요?
1 그렇다면 니체의 사상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 내에서만 보자면..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것 만으로도 위버멘쉬에 도달하는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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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빠로서 답변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1. 먼저 위버멘쉬에 대한 니체의 입장
한 때 니체의 위버벤쉬가 "초인"이라는 단어로 부정확하게 번역된 적이 있었는데요. 우리 말 초인은 영어의 superman에 해당하는 뉘앙스가 강하죠. 말 그대로 일반인보다 우월한 존재, 일반적인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 그게 바로 니체의 초인이라고 잘못 이해된 거죠. 특히 서양 학문을 일본을 통해서 수입하던 시기에는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이러한 오해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어 위버멘쉬는 영어로는 overman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맞습이다. 번역하자면 "인간을 넘은 자" 정도가 되는데, 이는 초인이 가진 "우월한 인간"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성, 인간적인 척도에서 벗어난 사람"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럼 그 다음으로 니체가 말한 "인간성, 인간적인 척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겠죠? 이에 대해서는 니체의 <인간적이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만, 간단히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두 가지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세의 "신적 권위"에 복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의 이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입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신의 죽음을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신은 죽은 것 같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중세의 신적 권위"가 "근대 과학과 이성의 권위" 혹은 그것을 등에 엎은 "국가"의 귄위로 대체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짜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부분 나귀제는 그런 면에서 상징적이죠. 근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인간들이 모여서 새로운 우상인 나귀를 섬기고 있는 꼴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근대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대인은 이성과 과학의 발전이라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 왜소하고 추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죠. 이는 근대 자본주의 비판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고 이 점에서 맑스와도 조금은 공통 분모가 있죠. 그렇다고 니체가 과학기술 자체를 부정한 거는 아니고요. 맑스가 자본의 대량생산을 찬양하면서도 그 속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했듯이 니체도 이성과 과학기술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 그것이 인간을 나약하고 비겁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죠. 니체가 고대 그리스인들을 찬미하면서 그들을 위버멘쉬에 가까운 사람들로 묘사한 것도 그들은 신적인 권위에 얽메이지 않고 세상을 개척하는 사람들이고 강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니체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극복하고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2. 짜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에 도달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책 초반부에는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까운 상태였고, 책 후반부에는 위버멘쉬에 도달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여행을 떠나면서 다양한 자신의 적수를 만나게 됩니다. 아주 독실한 성직자라던가, 시장 사람들이라던가, 그를 무턱대고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던가, 왜소한 난쟁이, 중력의 영 등이죠. 이들은 짜라투스트라를 조롱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면서 그가 위버멘쉬에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초월적 권위인 신으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새로운 우상을 만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최후에는 다 포기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하는 것들이 위버멘쉬에 도달하는 방해물이죠. (이걸 그냥 말로 안 쓰고 문학적인 비유를 들어서 쓴 니체는 정말 천잰거같다능) 특히 강적이 바로 허무주의인데 이것 때문에 짜라투스트라는 죽을만큼 아픈 병에 걸리고 큰 좌절에 빠집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각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극복해내죠. 이때 나온 니체의 위대한 개념이 바로 "아모르 파티" 즉 "운명애"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거 제대로 이해하면 지립니다. 니체빠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죠. 운명애와 긍정의 놀이를 통해서 짜라투스트라는 결국 위버멘쉬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3.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 만으로도 위버멘쉬가 되는가?
앞의 글을 다 읽으셨다면 대략 짐작하실 겁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위버멘쉬가 되는 길의 첫걸음이지만 완성은 아니라고.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초월적 권위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킹왕짱 쎈게 바로 "신"이죠. 개독교가 아직도 정치까지 좌지우지 하면서 사회 전방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고, 신도들은 목사가 수천억을 횡령해도 무조건 아멘 하고 외치고 있죠. 니체에 따르면 그게 바로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겁니다. 사람들이 다 무언가를 숭배하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과 안식을 얻을 수 없는 나약한 상태에 있는 거죠. 그 다음이 바로 국가입니다. 나의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주길 바라고, 국가가 나의 정체성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일종에 국가에 대한 의존이죠.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면 그런 게 좀 심하지만 중국이나 미국은 더 한 것도 같습니다. 뭐 어떨 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뭐 그 외에도 나를 구속하고 있는 초월적 권위는 많이 있겠죠. 니체는 이런 초월적 권위를 해체하고 이를 수평적인 관계로 재구성하기를 바랐습니다. 우정같은 거죠.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는 학생들끼리만 경쟁하잖아요. 선생, 교수 이런 사람들은 제왕이죠. 모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 문제 마음대로 내고 평가도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왜 학생과 선생은 경쟁하면 안 될까요? 니체는 수평적 관계가 많을 수록 좋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초월적 권위 = 신 을 부정하고 나면 끝판왕인 허무주의가 남겠죠. 이게 정말 강적인데 이에 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을 읽으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초월적 권위 그 딴 거 없으니 쾌락이나 추구하면서 내 멋대로 살겠다는 건데 이거 정말 강적이죠. 니체도 사실 이 허무주의를 완벽하게 이긴 건 아닙니다. 허무주의와는 거의 평생을 걸쳐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에는 초월적 권위로 다시 도피하거나 아니면 인간성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인간 이하가 되버리는 "동물화"로 가는 거죠. 그래서 니체는 비장의 무기로 인간의 삼단계 변신을 제안합니다. 초월적 권위에 복종하는 낙타에서 초월적 권위에 대항하는 사자로, 다시 초월적 권위가 해체된 지점에서 허무주의와 맞서싸우며 새로운 가치와 에너지를 창조하는 어린아이로의 변신이죠.
니체는 우리가 신적 권위를 극복하고 나면, 다시 허무주의의 강적과 싸우게 될 거라는 걸 100년 전에 미리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킹왕짱이죠. 님이 좋은 질문을 해준 덕분에 저도 이렇게 니체에 대해서 쓰면서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요즘 허무주의 동물화의 끝판왕인 리그 오브 레전드와 싸우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저는 언제쯤 롤을 극복하고 위버멘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