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이 년아...... 부모보다 먼저 가면 어떡하니......”
서현이의 어머니가 울부짖으셨다. 사모님의 앞에는 서현이의 영정 사진과 백합 몇 송이가 있었고, 주변에는 절망에 빠진 서현이의 아버지, 동생, 친척, 지인들이 있었다. 표정이 하나 같이 이 세상을 잃은 것만 같은 비통에 빠진 표정이었다.
눈물이 났다. 서현이와의 지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결과, 얼굴. 가녀린 몸매. 같이 웃고 떠들었던 추억들......
이제 그것은 단지 추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장을 빠져 나온 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르스름한 달이 어둠을 조금 비추었고, 쌀쌀한 날씨를 더욱 부각시켰다. 시린 손에 입김을 불었다. 약간 따뜻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판기 한 대가 있었다. 다가가서 캔커피 하나라도 뽑아 마실까 했지만, 전혀 입맛이 돋지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심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자판기를 짚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토 대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에서 여러 개로 변환 되어, 폭포수 같이 떨어졌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내 두 눈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두 눈을 두 손으로 비비고 손목시계를 확인 했다. 어느 새, 11시가 되었었다. 자판기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핑 도는 머리를 손으로 쥐어짰다. 이제 들어갈까, 생각 중에 서현이의 아버님이 밖으로 나오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니, 아버님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착잡하지?”
아버님이 한숨을 쉬시며 나에게 물으셨다. 곧이어, 윗옷 앞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한 개피를 나에게 권하셨다. 어지러운 머리 탓에 손사래를 칠라 했지만, 분위기 탓에 그냥 피자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입에 물자마자, 라이터의 불이 들어왔다. 바로 담배를 빨았다. 니코틴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더 어지러울 줄 알았더니, 오히려 마음과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자네. 서현이랑 몇 년 사귀었었지?”
“3년 반개월 정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님을 보며 대답했다. 서현이와 사귀었던 것이, 3년 반 개월이었다.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다시 서현이와의 지난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
대학교 휴강 중에, 책이나 읽을 겸 도서관에 들렀었다. 책을 고르던 중, 자리 건너편에서 소설을 읽고 있는 여자 한 명이 눈에 띄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첫 눈에 반했었다. 굉장히 예뻤었다. 긴 머릿결과, 고양이 상의 얼굴형, 동그란 눈과 귀여운 볼이 매력적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떨어뜨려 큰 소리가 울려 버렸었다. 그 때,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었고 나와 그녀는 어색한 눈빛을 마주치다 이내 돌려버렸었다.
나는 다시 책을 주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는 듯, 눈빛이 달라 보였지만 이내 우리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갔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가는 그녀를 따라갔다.
“저기요.”
나는 그녀를 불렀다. 부른 동시에 그녀는 나를 향해 뒤돌았다.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왜 그러세요?”
약간 높고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생각이 말로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튀어 나왔다.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다짜고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말이다. 역시 안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쯤, 그녀가 미소를 지었었다.
“네. 그러죠. 뭐. 헤헤.”
귀여운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휴대폰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치마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입력란을 눌러 나에게 건넸다.
“번호 찍어주세요.”
“네!”
기분이 날아가는 줄 알았었다. 그 동안 여자친구라고는 한 명도 사귀어 보지 못했던 나에게 한 줄기의 빛 같은 소식이었다. 믿기지가 않았었다. 내 용기가 빛을 발한 것이었다.
“여기요. 전화했어요.”
“네. 이 번호 맞죠?”
“네. 맞아요.”
몇 가지 번호 교환이 이루어진 후, 그저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어색함이 감돌았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남자친구 있나요?”
내가 용기 내어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없으니깐 번호를 주었겠죠?”
“하하하, 그건 그러네요!”
다행이었다. 애초에 생각해보면 번호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이었고, 또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없으니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었어요?”
“잠시 친구 만나러 가기 전에, 책이나 읽을까 해서 도서관 들렀던 거에요.”
평소, 그녀는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한 눈에 봐도 그렇게 보였다. 손에 들린 책만 해도 그랬다. 똑똑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쪽은요?”
그녀의 질문에 행복했던 기분이 잠시 없어지고 벙쪘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뭘 하러 온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녀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러 왔다고 대답했더니 헤헤 웃으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었다. 겨우 한 걸음 차이였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저는 정서현이에요.”
“아, 저는 정상규라고 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성이 같네요.”
“그러게요!”
확실히 당황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녀와의 거리가 한 걸음 밖에 안 되었기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너무나 아름다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헤헤. 그럼 좀 있다가 연락드릴게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 나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보는 모양이었다.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좀 있다가 연락할 수 있기에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다.
“네! 조심히 가세요! 차 조심하고요!”
나에게서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 쳤다. 그녀의 헤헤하는 특유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
“이제 집에 가보게나. 일도 있잖나.”
“하지만, 전 여기......”
“자네 마음도 알지만, 벌써 이틀째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었잖나. 이제 내일이면 장례가 끝날 것이니, 오늘이라도 이만 가보게.”
한숨이 나왔다. 벌써 이틀 째였나. 한 시간 같았는데 말이다. 벌써 이틀이라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시간이 빠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네. 죄송합니다. 그럼, 장례식 끝나는 대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밥이라도 먹고 가지.”
“아닙니다.”
“흠, 알겠네.”
나는 아버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두 눈을 비빈 후, 장례식장에서 벗어났다. 쌀쌀한 날씨가 폐 속 깊이 찔러,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시크한 밤하늘 밑의 길거리를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향해 솟구쳤지만, 그딴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나에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여기는......”
정처 없이 길을 걷던 나에게 흥미로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작은 카페 하나였다. 이 카페는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카페다. 여기 와서 자주 그녀와 커피를 마셨었다. 빛이 비춰져 밤거리와 대비되는 카페 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커플 한 쌍이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실 것 있으신가요?”
카운터에 있는 반반하게 생긴 여자 종업원이 메뉴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서현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외모다. 서현이가 더 아름답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뭐가, 맛있을까요......”
유심히 메뉴를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끼야또, 에스프레소 …… 그러고보니, 그녀는 카라멜 마끼야또를 좋아했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카라멜 마끼야또 하나 주세요.”
“네. 주문 받았습니다.”
내가 커피를 기다리려고 자리에 잠시 앉자, 종업원이 내게 갑자기 한 가지를 물었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는 같이 안 오셨나 보네요?”
이제 그만. 서현이 이야기는 그만 해달라고 소리 치고 싶었지만, 이내 참았다. 종업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눈치 없기는. 젠장, 그냥 나갈까 생각했었지만 커피가 금방 나왔었다.
“네. 아주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만원 짜리 하나를 카운터에 탕하고 놓은 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커피의 컵홀더를 감싼 채 손에 든 후, 카페의 문을 나갔다. 옆을 슬쩍 바라 봤을 때, 종업원과 커플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알바 아니라고 스스로 타일렀다.
원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분위기며, 흔적이며, 모든 것들이 말이다. 아직도 소파에 걸쳐 있는 그녀의 옷가지가 나를 절망시켰다. 그녀의 옷을 두 손으로 들어 코로 냄새를 훔쳤다. 아직도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눈물이 또 앞을 가렸다. 나는 그녀의 옷을 들고 한참을 울었다.
*(2)
“난 카라멜 마끼야또가 좋아.”
“왜?”
“달잖아.”
나는 그녀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주었다. 헤헤하는 미소를 또 지었다.
“그 미소, 언제나 봐도 마음에 들어.”
“정말?”
“응. 정말로.”
사랑스럽다. 그녀의 미소가. 언제나 봐도 질리지 않는다. 아니, 평생 미소만 보고 싶다. 이 생각만이 들었다. 이것은 내 진실된 마음이었다. 거짓된 마음이 아니다. 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었다.
“그럼 계속 지어야지. 너 보게.”
“바보야.”
나는 꿀밤을 장난스럽게 때렸다. 그녀는 메롱을 했다. 내가 머리를 헝끌였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라는 간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 이 노래는!”
그 때, 그녀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어떤 소리에 집중했다.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노랫 소리였다. 꽤 흥겨운 노래였다.
“이 노래 알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아니. 무슨 노래인데?"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자기의 볼로 향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볼이었다.
"계속 듣다 보면, 중독성이 강한 노래인데......"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내려 놓고는 서현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노래 이름은 스노우라는 곡이야."
"레드...... 뭐?"
난생 처음 들어보는 가수 이름이였다. 아니,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이름을 가진 외국인은 없을터니 밴드 이름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이름 정말 특이한 걸.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이름 되게 특이하지?"
"응...... 특이하네."
서현이가 헤헤하고 까르르 웃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헝끌이고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서현이가 뾰루퉁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현이와 내가 즐겁게 대화할 동안에도 카페 안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랫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가 방 안에 쓸쓸히 울려 퍼진다. 불과 저번달에 서현이와 함께 매장에서 산 시디 앨범이다. 그 시디가 오디오에서 멀쩡하게 돌아간다.
서현이는 내 곁을 떠났는데.
그 시디만은 오디오에서 멀쩡하게 돌아간다.
"으어어어어어!"
오디오를 향해 절규했다. 절규의 끔찍한 소리와 노래가 순간적으로 겹쳐 불협화음으로 섞여버린다. 짜증이 날 정도의 불협화음이었다.
삑 -
더 이상 듣기가 싫었다. 이 노래만 들으면 서현이와의 아련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자꾸만 갉아 먹어 아팠었다.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냉장고가 있는 부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안을 살폈다. 유통기한 지난 스팸 한 통과, 깡 소주 두병.
그리고 서현이가 날 위해 만들어 놓은 랩에 쌓인 토스트 두개가 접시에 외로이 있었다.
"아......"
한숨이 나왔다. 또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서현이는 이 세상에 없는데 정작 그녀의 흔적이 내 주변에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이러니 해서, 가슴을 부여 잡았다.
나는 토스트에 쌓인 랩을 벗기고, 한 입 베어물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두 입 베었을 때, 목이 메어 넘길 수가 없어 그대로 식탁에 두고 깡소주 한 병을 들고 소파로 걸어가서 누웠다.
불이 꺼진 원룸 창문 안으로 달빛 하나가 들어왔다. 그 은은한 빛은 소파에 누워 깡소주를 들이키는 비참한 나를 정확히 비추었다.
"흐흐흑......"
이마를 움켜 쥐었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인해 살아야 하는 걸까. 내 인생의 전부였던 정서현. 그녀가 이 세상에 없는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해답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마음과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3)
"컴 투 디사이드 댓......"
"헤헤헤! 오빠 발음 저질인거 알아?"
"뭐가, 어때서."
달빛에 비친 소파에 누워있는 서현이가 까르르 웃었다. 아무래도 내 영어발음이 웃겼나 보다. 나름 자신 있었는데.
"오빠 발음 레드 핫 칠리 페퍼가 들으면 욕하겠어."
"또 까분다."
꿀밤을 꽁 때렸다. 또 서현이는 뾰루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창문을 바라보며 내 손을 깍지끼며 미소 지었다.
"달빛도 낭만적이고...... 오빠, 우리 꼭 이러니까 영화 속의 주인공 같지 않아?"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지! 오빠는 낭만도 모르네."
나는 서현이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 요즘 세상에 로맨스. 낭만을 타령하는 여자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녀를 꼬옥 안아줬다.
"널 사랑해서 이렇게 안아주는 것이 낭만이지, 뭐겠냐."
그 소리에 서현이가 내게 안긴 채로 까르르 웃었다.
"대박. 오글거려!"
"서현아. 이럴 때는 가만히 안기는 것이 분위기야......"
곤란한 표정을 지으니, 서현이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서로 안은채로.
*
"눈을 떠봐."
가녀린 목소리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건 서현이의 목소리다. 확실히.
"눈을 떠봐!"
휙. 암흑에서 순식간에 눈부신 빛으로 바뀐다. 마치 혼돈에 빛을 비춰, 바로 잡듯이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서현이는 빛나고 있었다. 마치 여신 같았다.
"이제야 떴네. 헤헤."
빛이 그녀의 하얀 이와 분홍빛 입술을 감싼다. 서현이가 어떻게 내 앞에 살아있는 건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어봐도 내 앞에 있는 정서현. 긴 머릿결과 맑은 눈웃음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내 앞에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정서현!"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쌓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본 순간, 먹먹했던 가슴의 응어리가 눈 녹듯이 풀어졌다.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서현이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몸 속으로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
"당연하잖아......"
"바보."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에 그녀, 서현이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었다. 그 이하,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렇게, 서현이를 안고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다.
"울지마. 오빠."
그 말에 눈물이 더 나오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그녀의 가디건에 눈물자욱이 생겨 버렸다.
안 울 수가 없잖아. 젠장.
"계속 우네...... 남자는 우는 거 아닌데......"
"제발, 이대로 있어줘."
제발 이대로 있어줘.
"나 오빠랑 할 일이 산더미 같았는데...... 같이 유럽여행도 하고, 놀이동산에서 손 잡고 바이킹 타고 소리도 질러 보고, 크루즈에서 타이타닉 흉내도 아직 못 내봤네. 이제 시간이 없어."
나는 그녀의 말에 서현이를 포옹한 팔을 보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저 빛만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천국 같았다.
"이제 여기는 무너질거야."
"뭐?"
서현이의 말을 끝으로, 저기 수평선부터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빛을 잡아먹는 어둠.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우리까지 잡아먹을 기세였다.
나는 서현이의 손을 잡았다.
"여기가 뭐하는 덴지는 몰라도, 도망치면 될 거 아냐!"
서현이는 고개를 저었다. 왜, 도망치지 않는거야.
"널, 이렇게 또 보내기 싫어...... 제발, 도망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응시할 뿐 이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걸까. 왜, 나와 함께 가려 하지 않는걸까. 나는 절규했다.
"오빠 말 들어!"
어둠은 순식간에 우리들 앞까지 저돌적으로 달려왔다. 나는 강제로라도 서현이의 몸을 끌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서현이의 몸은 마치 돌덩이처럼 그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현이의 팔은 싸늘한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서현아, 사랑해."
나는 서현이를 안았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이 우리를 침식시키기 시작했다.
**
"달빛도 낭만적이고...... 오빠, 우리 꼭 이러니까 영화 속의 주인공 같지 않아?"
내 앞에 그녀가 있다. 매혹적인 살갗이 달빛에 비춰, 하나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이런 말 한 적 있던가.
"그런가."
나도 모르게 성의없는 대답이 나온다.
"사랑해."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온다.
"난 달빛 이야기 꺼냈는데, 갑자기 사랑한다고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달콤했다.
이것은 내 자아가 하는 것일까?
이것은 내 행동이 하는 것일까?
"오빠, 저 어둠은 뭐야?"
"응?"
입을 맞추다 말고, 서현이의 얇고 긴 손가락이 노란 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을 가리킨다. 너무나도 어두워, 어둠이 있는 자리는 아무런 생명도 솟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곳으로 오고 있어."
서현이가 어둠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 어둠은 모든 달빛을 먹은지 오래였고, 이제 방 안으로 침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떡해?"
그녀가 나를 보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겁에 질린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나는 서현이를 안아줬다. 그 때 서현이의 정수리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내 눈물이었다.
***
"난 아메리카노가 좋아."
"왜?"
"달잖아."
나는 서현이의 머리에 꿀밤 한 대를 꽁 때렸다. 뾰루퉁한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바보야. 아메리카노가 어떻게 해야 다냐?"
"왜? 달거든? 안 쓰거든?"
"그러셔요?"
나는 비아냥거리며 그녀의 머리를 헝끌였다.
그런데 그 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마자 눈물은 멈추었고, 다시 손을 뎄을 때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오빠, 우는거야?
서현이가 빨대를 물며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고 머리에서 손을 다시 뗐다. 그러고는 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싱겁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어, 이 노래는!"
그 때, 서현이가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청해보니,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꽤 흥겨운 노래였다.
"오빠 이 노래 알아?"
"응? 무슨 노래인데?"
노래 제목을 묻자 서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헤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밴드의 스노우라는 곡이야."
"레드, 뭐?"
난생 처음 들어보는 가수 이름이였다.
아니,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즐거운 느낌보다는 슬픈 느낌이 더 나는 곡이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꽤 인상 깊었는데 말이다.
그 때, 진하디 진한 어둠이 나와 서현이 주변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이 어둠. 처음인 것 같지가 않아."
"응. 나도 그래."
나는 서현이의 따뜻한 볼을 쓰다듬었다.
****
대학교 휴강 중에, 책이나 읽을 겸 도서관에 들렀었다. 책을 고르던 중, 자리 건너편에서 소설을 읽고 있는 여자 한 명이 눈에 띄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첫 눈에 반했었다. 굉장히 예뻤었다. 긴 머릿결과, 고양이 상의 얼굴형, 동그란 눈과 귀여운 볼이 매력적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떨어뜨려 큰 소리가 울려 버렸었다. 그 때,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었고 나와 그녀는 어색한 눈빛을 마주치다 이내 돌려버렸었다.
나는 다시 책을 주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는 듯, 눈빛이 달라 보였지만 이내 우리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갔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가는 그녀를 따라갔다.
“저기요.”
나는 그녀를 불렀다. 부른 동시에 그녀는 나를 향해 뒤돌았다.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왜 그러세요?”
약간 높고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생각이 말로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튀어 나왔다.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다짜고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말이다. 역시 안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쯤, 그녀가 미소를 지었었다.
“네. 그러죠. 뭐. 헤헤.”
귀여운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휴대폰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치마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입력란을 눌러 나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 장면 어색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 같았다.
“번호 찍어주세요.”
“네!”
기분이 날아가는 줄 알았었다. 그 동안 여자친구라고는 한 명도 사귀어 보지 못했던 나에게 한 줄기의 빛 같은 소식이었다. 믿기지가 않았었다. 내 용기가 빛을 발한 것이었다.
“여기요. 전화했어요.”
“네. 이 번호 맞죠?”
“네. 맞아요.”
몇 가지 번호 교환이 이루어진 후, 그저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어색함이 감돌았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말이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남자친구 있나요?”
내가 용기 내어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없으니깐 번호를 주었겠죠?”
“하하하, 그건 그러네요!”
다행이었다. 애초에 생각해보면 번호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이었고, 또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없으니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었어요?”
“잠시 친구 만나러 가기 전에, 책이나 읽을까 해서 도서관 들렀던 거에요.”
평소, 그녀는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한 눈에 봐도 그렇게 보였다. 손에 들린 책만 해도 그랬다. 똑똑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쪽은요?”
그녀의 질문에 행복했던 기분이 잠시 없어지고 벙쪘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뭘 하러 온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녀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러 왔다고 대답했더니 헤헤 웃으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었다. 겨우 한 걸음 차이였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저는 정서현이에요.”
“아, 저는 정상규라고 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성이 같네요.”
“그러게요!”
확실히 당황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녀와의 거리가 한 걸음 밖에 안 되었기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너무나 아름다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헤헤. 그럼 좀 있다가 연락드릴게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 나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보는 모양이었다.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좀 있다가 연락할 수 있기에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다.
“네! 조심히 가세요! 차 조심하고요!”
나에게서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 쳤다. 그녀의 헤헤하는 특유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시야에게 사라졌을 때 내 손바닥 위로 물 한 방울이 떨어졌었다. 처음에는 비라도 내리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Fin.)
(오늘 아침 7시 20분 경, ○○구의 원룸에 사는 26살 회사원 정모씨가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과량의 본드중독에 의한 중독사입니다. 사망 당시, 가슴께에 연인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손으로 쥐고 있었습니다. 연인은 일주일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었으며, 정모씨는 죽은 연인을 못 잊어 본드 중독으로 자살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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