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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컴퓨터를 바라보니 새벽 2시반이었다.
글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지 않고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졸음을 몰아낼겸 기지개를 피면서 스트레칭을 해봤지만
그마저도 금방 그만두며 달게 하품을 내쉬었다.
당직실은 적막했다. 먹다남은 과자봉지와 반쯤 차있는 미지근한 음료 페트병, 미처 치우지 못한 컵라면이 책상 한쪽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불꺼진 복도에는 불침번을 서고있는 후임한명이 돌아다니며 내는 전투화 소리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직사관이 모포를 뒤집어 쓰고 고록고록 코를 고는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시계를 다시한번 흘끔 바라보았다.
2시32분. 근무교대 인솔을 나가려면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아무것도 할게 없었다.
나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총기현황판을 다시금 맞춰놓고서는 디플과 라이터를 챙기고 당직실 문을 열었다.
낡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꽤나 시끄러웠다.
바람이 차가웠다. 밖에서는 아직 늦가을이라고 말하는 11월이지만
이 안은 여전히 깔깔이와 목토시,귀도리 없는 야간근무는 상상할수도 없는 한겨울일 뿐이다.
작년 이맘때쯤엔 나도 이 날카로운 바람앞에서 외초를 서던 입장이었던지라
그때 느끼던 발가락의 고통이 떠올라 절로 몸서리를 치며 능숙하게 디플 한 개비를 입에물고 불을 붙였다.
군대의 밤은 어둡다. 가끔 위병소 밖으로 오다니는 차라이트 불빛을 제외하고는 기도비닉을 위해 불빛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도시에서 살아왔던 나는 빛의 밤이 익숙했지만 이제 휴가를 나가서 보는 도시의 밤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전투복이 아닌 사복을 걸치고 있는 나처럼.
멈춰있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쁘게 움직이는 사회에서 바뀌지 않는것은 입에서 나오는 담배연기밖에 없었다.
“홍뱀, 상황대기 안하십니까?”
“넌 불침번이 씨발 근무지이탈하게 되있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지만 얼굴을 확인하고는 담배한모금을 빨아들였다.
“혼자 피십니까. 저도 한 대만 주십쇼”
“이젠 아주 맞먹지?”
“같이 짬먹어 가는 처지에 너무 섭섭하게 구십니다. 아니,이제 형이라고 해야되나?”
“좆까. 아직 7일 남았어”
“전쟁나면 10년이지 않습니까”
능청스럽게 말을 붙여오는 2개월 후임에게 담배곽을 통째로 얼굴에 집어던졌지만
놈은 재빨리 받아들고는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크게 한모금 빨아들였다.
“후...담배 정말 짝짝 목구멍에 달라붙는것 같습니다”
담뱃곽과 함께 어느새 타온 인스턴트 커피를 건네며 후임이 말했다.
“센스좀 늘었다?”
하는짓이 기특해 칭찬을 건넸더지만 후임은 그저 피식 웃을뿐이었다.
“어떠십니까? 1주일 남으신 기분이?”
“똑같아. 시간 드럽게 안가고, 간부는 짜증나고, 애새끼들은 한심해보이고”
“저는 무슨 애들 문예창작과 교육받고 온줄 알았습니다.”
“병신들이지. 찌를거면 좀 제대로 된걸 찌르던가. 소대장님도 소원수리보고 웃으시더라.”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버리고 다시 한 대를 물고 후임에게 자연스럽게 한 대를 넘겼다.
“후우....그나저나 전역하면 뭐하실겁니까?”
“복학해야지 임마. 내가 칼복학하려고 일부러 겨울에 입대했잖냐.”
“부대에서도 아저씨 소리 듣고 복학하셔도 아저씨 소리 들으시겠습니다?”
“죽어 씹새꺄.”
낄낄거리며 내 빈주먹을 피하던 후임은 떡진 뒷머리를 긁적였다.
1분정도 서로 아무말없이 담배만 피우다 문득 후임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홍뱀, 정말 홍뱀 전역하면 기분이 이상할것 같습니다.”
“사랑고백이냐? 드디어 니가 다른쪽에 눈을 뜨는구나.”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를 잡는 후임에게 멋쩍어 어물쩍 농담으로 넘기고는 서둘러 담배를 끄자, 후임도 담뱃불을 튕기며 다시 웃음 지었다.
“뭘 또 그리 수줍어 하십니까. 다 들었습니다. A급 전투화랑 야상, 마스크팩이랑 기타 애들한테 뿌린거 말임다.”
“어떤 새끼가 말하던. 내일 내밑으로 다 집합시켜.”
“냉동 쏘시려고 집합시키시는거면 모일겁니다.”
“믿을새끼 하나도 없다. 진짜”
인상을 찡그리는 나를 후임은 어물거리며 빤히 바라보았다.
“.....홍뱀.”
“왜?”
“잘 사십쇼. 가끔 부대에 연락하시고.”
“........니가 말안해도 할거야 새꺄."
“저희 잊어버리시면 안됩니다.”
후임은 평소에는 볼수없던 무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어떤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춥다 들어가자”
나는 이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어, 홍뱀. 이거 눈오는거 아닙니까?”
문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후임이 건넨말에 나도모르게 하늘을 보았다.
검은 하늘을 후레쉬로 비추자,11월에 내리는 것 치고는 꽤나 굵은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러게, 이거 많이 올것 같은데.”
“.......애들 기상시킵니까?”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들은것처럼 찡그려지는 후임의 얼굴을 보며 난 싱긋 웃어보였다.
“10분만 있다가. 눈구경좀 하고 보고하자.”
“....애들 근무복귀하면 짬시키려고 하시는거 아닙니까.”
“짬을 똥구멍으로 쳐먹은건 아니구만.”
발광하며 벽을 발로 차대는 후임의 지랄을 바라보며 나는 박장대소하며 돛대를 빼어물었다.
지긋지긋한 겨울이 지나가면 여전히 추운 짧은 봄이 찾아오고,짧은 봄이 지나가면 언제 추웠다는 듯이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겠지.
귀를 찢을듯이 울려대는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와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작업도 바뀌지 않겠지.
그리고 또 짧은 가을이 오고, 다시금 겨울이 찾아오겠지.
그때도 너희는 나를 기억할까.
어느덧 전역한지 반년이 흘렀다.
전역하자마자 등록금을 모으기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난 웃는 모습이 예쁜 아가씨를 만났고,
그녀가 싫어하는 입에 늘 조사처럼 붙어나오던 욕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복학하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이어지는 술자리와 온갖 과제들 사이에서 그렇게 가지않던 시간은 무엇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전역한 후임들에게 전화가 몇통 오기는 했지만, 전투복을 걸쳤던 그 시간동안 느꼈던 끈끈한 정은
장롱속에 쳐박힌 전투복처럼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 밀린 과제를 처리하느라 새벽까지 타자를 두드리던 나는 머리를 식히러 현관으로 나섰다.
담배를 물고 한모금 빨아들인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새벽 2시 45분.
내 손에 들린 담배는 디플에서 말보로로, 왼손에 문신처럼 붙어있던 전자시계는 핸드폰으로,
귀를 아릴듯이 불어대던 바람은 기분좋은 훈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잊는걸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잊어가는구나.
허탈한 웃음이 나도모르게 입으로 배어져 나왔다. 섭섭하지도, 아쉽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내가 2년동안 느끼고 배워나간 감정은 전부 무의미한 추억인걸까.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튕겨끄고 어두운 하늘을 한번 보았다.
아직 채 다 지지않은 벚꽃 이파리 몇 개가 드문드문 떨어져 마당에 쌓여가고 있었다.
그때,바로 그때 떨어지던 눈꽃송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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