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참 감회가 새롭더라구요. 특히 막판에 1시간 정도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마무리한 피날레도 정말 멋있었습니다.
저는 정청래 의원과 같은 시기에 대학에 다녔습니다. 정청래 의원은 건국대 산업공학과 85학번, 저는 세종대 경제학과 85학번이었어요. 학번은 같은 동기이지만 정청래 의원이 재수를 하고 대학을 들어와서 저보다 한 살이 더 많았죠.
같은 학번 동기라고 하더라도 다른 대학에 있는 학생을 알고 지내기는 힘들지만, 정청래 의원과는 약간 특별한 인연으로 알고 지냈답니다. 그것은 바로 건대앞에 있는 인서점이라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매개체로 알게된 거에요.
지금은 대학교 앞에 서점이 많이 없고, 특히 그중에서도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은 거의 없지만 저와 정청래 의원이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중후반기에는 대학교 앞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무척 많았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은 운동권 학생이든, 아니든 거의 필독서였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민중사,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 역사란 무엇인가? 와 같은 책들은 많은 학생들이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대학교 앞에는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 하나씩 다 있었는데, 82년에 설립된 인서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시초에 해당되는 서점이었습니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다 되셨지만 우리에겐 인서점 아저씨라고 불리운 심범섭 선생님(74세)
제 모교인 세종대 앞에도 서점이 있었는데 하루는 같이 학생운동 하던 친구가 "건대 앞에 인서점이라고 있는데 거기 아저씨 무척 좋다. 책을 사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가서 읽고 책값은 나중에 생기면 와서 그 때 주면 된다."라고 하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도 그 때는 한창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볼 때라서 때론 돈이 없어서 책을 못사 읽을 때도 있었기에 그 때부터 건대앞 인서점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건국대와 세종대는 지리적으로 1km 밖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어요. 게다가 지금은 건대 정문이 건대입구역 부근으로 옮겨졌지만 그 당시에는 어린이회관쪽에 있었어요. 지금 후문이라고 불리우는데가 당시에는 정문이었죠. 건대 정문 앞은 늘 붐볐고 화양리 뒷골목 주점들은 건대생과 세종대생으로 늘 와글와글했었습니다.
하루는 인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좀 허기를 느꼈어요. 그 때만 해도 20대 초반의 한창 에너지 넘치는 때였으니 먹고 나도 금방 배고플 때였기에 자주 배가 고팠죠. 그렇게 약간 허기를 느끼며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당시에는 40대의 젊은 부부였던 인서점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학생들 라면 좀 끓여줄까?"라고 하시는거에요.
서점의 한 쪽 구석에 작은 방이 있고, 그 옆에 딸린 주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책을 오랫동안 읽는 학생이 있으면 라면을 끓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서점의 한쪽 구석 긴 의자에 앉아 깍두기 반찬에 라면을 한 그릇 먹고 있으면 아주머니가 "학생들, 찬밥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그러시면 염치불구하고 "네 ~"하고 배를 채우곤 했지요.
그렇게 인서점 아저씨, 아주머니와 인연을 맺어나갔고, 그 서점에서 다른 대학의 많은 학생들도 만났는데 그 중에 한 학생이 바로 건대생이었던 정청래였습니다.
그제 6월 항쟁 글을 쓰면서 잠깐 제 소개를 했던 것처럼 저는 87년 당시에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하게 되었고, 정청래는 건대 교지편집위원장이었어요. 그리고 88년에는 제가 세종대 교지편집위원장을 했고, 정청래는 건국대학교 총학생회 총무부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조금씩 교류를 하다가 마침 우리가 함께 어떤 일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어떤 일이었냐하면 바로 88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했던 김중기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김중기의 총학생회장 선거공약이 뭐였냐하면 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교가 체육대회를 개최하는데, 그 실무회담을 6월 10일에 판문점에서 갖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연기자로 활동하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였던 김중기.
그 때 그 사건은 전국의 대학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서울대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하자고 고대, 연대, 건대, 세종대, 한대, 서강대, 외대.. 등등.. 수많은 대학교에서 함께 제안에 화답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에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조국통일 특별위원회. 약칭 조통특위 '가 생겨났습니다.
그 때 저는 세종대학교 교지편집위원장겸 조통특위장이었고, 정청래는 건국대 총학생회 총무부장겸 조통특위장이었어요. 덕분에 학교도 가깝고 종종 회의도 함께 하며 내왕을 했었습니다. 당시 정청래에 대한 인상은 같은 학번이었지만 나보다 한 살 위여서 그런지 더욱 어른스럽고, 굉장히 야무진 모습이었습니다. 일을 하는 업무수행능력이 뛰어나고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어요.
그 때 우리 대학생들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전국에 통일의 기운이 넘칠 때 외쳤던 슬로건이었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하며 우리 학생들이 통일의 선봉대가 되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 정도의 규모에는 못미쳤지만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재야, 사회단체에서도 지지하고 호응이 좋았던 두번째로 커다란 또 하나의 투쟁이었습니다.
88년 6월 당시시 남북학생회담을 하기 위해 판문점까지 가던 도중 임진각에서 가로 막혀 누워서 연와시위를 하는 모습
당시 대학교에서 학생 시위를 주동했던 많은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와 정청래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감옥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정청래 의원이 과거 간첩조작 사건의 예를 들면서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으며 폭력을 당하던 장면에서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저 또한 그 때가 회상되면서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 정도에서 그쳤지만 실제로 거기서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이 폭력과 고문으로 조작이 되어 졸지에 신문에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가 되고 간첩이 되어 가족들 모두 빨갱이 가족으로 찍혔던 그 수많은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벌써 28,9년이 지난 사건이 된 것을 보며 이제 정청래 의원이나 저나 50대의 기성세대가 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중에 나이가 먹어도 청년의 의기와 패기 잃지 말고 한 번 살아보자고 다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사실 정청래 의원이 초선 때는 가끔 얼굴도 보곤 했는데, 지금은 저도 바쁘다보니 얼굴볼 기회도 없네요. 아마 정청래 의원이 오유를 하니 이 글을 볼 거라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잠깐 샜네요. 정청래 의원의 미담 하나 전해드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 위에 소개드렸던 인서점은 그 후로 90년대까지는 그만저만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으로 잘 운영을 하다가 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경영 상태가 악화되었어요. 그래서 폐업의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중반, 그렇게해서 위기에 몰렸던 건대 인서점을 살리기 위하여 건대 동문들이 중심이 되고, 또 그 밖에 세종대나 다른 대학교 동문들도 힘을 보태서 인서점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주도적으로 인서점 살리기 운동을 했던 분중에 한 분이 바로 정청래 의원입니다.
정청래 의원.. 오늘 필리버스터를 하는 모습 중에서.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지금은 시대의 흐름 자체가 인터넷 서점에서의 책주문이 많고, 게다가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은 예전만큼 인기가 없다보니 인서점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명맥은 유지하지만 대학교 참고서와 기타 교양도서등을 주로 판매합니다.
하지만 대학시절, 돈이 없어 책을 읽지 못했던 우리 학생들에게 "책을 읽고 싶으면 얼마든지 읽고, 가져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하시며 허기진 학생들에게 라면까지 끓여주던 인서점 아저씨, 아주머니의 그 고마움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보다가 문득 대학시절 자주 다니던 인서점이 생각나서 예전의 추억도 되살려볼겸 한 번 글을 써봤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