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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눈 버렸다.
그의 뮤비는 아주 전형적인 모방의 산물인데, 그것은 자기 모방의 차원, 그것도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 해석의 실패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성공의 바탕이된 강남스타일에 대한 그 해석의 완성본에 가깝다. (속편은 항상 망한다.)
강남 스타일에 담겨있던 대상으로부터 설명되지 않는 불확실성이 휘발되어버린 그래서 확실성만이 남겨진 - 그로 인해 그것이 성공했다고 자신하는 부분만을 - 그렇게 확실한 부분만을 - 강남 스타일의 뮤직비디오의 성공의 특징으로서 그는 해석하고, 그것을 순수하게 추출해내어 잰틀맨은 태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남스타일이 전형적인 마초의 실패의 서사였다면 잰틀맨은 이런 마초의 서사를 폭력적으로 선취한 마초-지배의 서사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지만 명확하게 다른 지점은 존재한다.
강남스타일에서의 그 마초는 자신이 이야기가 자신이 존재하고 거주하는 공간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비동시대적인 상황에서의 자기 방황을 그려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방황과 불일치의 지점에서 자기 서사 또한 가능해진다.
강남스타일에서 그는 자기 소외의 주체다. 그는 그 문제를 주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는다. 오직 방황하며 도처에 출몰한다. 그러면서 그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조되지도 않으면서 결국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단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강남스타일의 노래 가사의 형태로 드러나는 독백의 형태는, 그 거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심을 읆조리는 자기 긍정을 언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말하는 공간, 시간의 차원들은 결코 그에게 어떤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고,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기력함 그 자체다. 그것을 보는 많은 이들의 정념은 그 실패에 투사된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 동시에 포착된 시공간은 더이상 단일한 시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서 그는 무언가를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이를 말할 때 그 불확실한 - 자기 환상- 실제로는 자기 실패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웃음의 코드로 생산한다. 이것이 강남스타일의 환상적인 부분들이고 - 그것을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것이 그 성공의 요인이었다.
그것은 실패한 것이기에 타인들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들.. 동시에 누구든 언급가능한 부분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부분들 - 그 자기 서사의 빈공간이 - 이제 확실성으로 명확하게 해석되고 이제는 모방될 수 없는 부분들로 화석화되어 이제 사회의 도덕적이고 통속적인 평가로만 받아들여지는 잰틀맨으로 진화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는 모든 짓꺼리는 성공을 위해 하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 잰틀맨은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것이 저질인 이유는 그의 뮤비의 내용이 여성 학대적이라거나 하기 때문은 아니다. 선정적인 성적 코드 때문도 아니다.
실제로는 오직 타인의 정념과 일상적인 소외의 동기가 더이상 그것에 개입할 여지를 그가 완전히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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