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0대 아저씨인 제가 굳이 테러방지법을 반대하고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는 이유
이 글은 20대 대학생 후배들이 좀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입니다. 여러분들보다는 30년쯤 선배인 저는 지금도 대학교 동아리 후배들이 축제 때마다 불러주는 선배 중에 한 명이랍니다. 그래서 아직도 마음은 20대인데.. 몸은 당연히 그 때 만큼 영 따라주지는 않네요. ㅋㅋ
요즘 국회에서 정부와 새누리당에서 추진하는 테러방지법을 반대한다고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 야당의 의원들이 필리버스터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51살이지만 필리버스터 하는 것은 처음봤네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인 69년에 국회에서 그런 것을 했다고 하는데 그 때는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50대인 제 나이에서도 최초로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하는 모습을 보는 거랍니다.
그런 제가 테러방지법을 반대하고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서 20대 대학생 여러분들께 제 경험을 토대로 해서 한 번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글을 쓴 뚱아저씨의 대학시절. 87년 6월 항쟁 때.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
이 글을 쓰는 뚱아저씨는 서울의 세종대학교 85학번이랍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대통령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동기생이었던 노태우가 그 후계자로 다음 대통령을 보장받았던 시기였답니다.
그 때는 운동권 학생, 비운동권 학생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많은 학생들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어요. 특히 가장 크게 했던 때가 바로 87년의 6월 민주항쟁이었답니다.
저는 그 때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대학의 총학생회장이었어요. 3학년 때 총학생회장이라고 하니까 좀 의아하죠? 그 때 전국의 4년제 대학중에 세종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제주대학교 등 3개 대학만이 3학년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제가 그 중에 한 명이었답니다.
아무튼.. 당시 22살 밖에 안되던 나이였는데 대학의 총학생회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고서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던 거였어요.
87년 6월 항쟁의 가장 큰 이슈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하자' 였답니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서 꼭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슬로건이었어요.
그것을 위해서 전국의 대학생들을 포함해서 재야단체와 함께 대대적으로 일으켰던 사건이 바로 87년 6.10 항쟁이었어요. 그리고 저 위에 있는 단식 투쟁하는 사진은 6월 10일 총궐기를 촉구하면서 6월 5일 ~ 9일까지 5일단 단식투쟁하던 때의 모습이랍니다.
지금 학생들은 아마 상상하기도 힘들 거에요. 그 때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6월 항쟁에 다 참여를 했는데 그 참여하는 학생들의 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와 같은 큰 대학교에서는 보통 한 대학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만 1만명이 넘었고, 세종대는 당시 재학생이 4,500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중 3,000명이 모여서 시위를 할 정도였어요.
그러니 그날 학교에 등교한 학생들은 거의 다 시위에 참여를 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그 때는 각 학과별도 전부 자기 학과 기를 갖고 전부 집회에 참여를 했어요. 한 과에서 보통 100명 이상씩 참여를 하는 정도였으니 참가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러니 당연히 당시 진행되려고 했던 기말고사는 자연스럽게 모든 대학교에서 다 연기 되었답니다.
각 학과별로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
그 때 저희 대학교 학생들도 거리 시위에 참여를 했는데 6월 10일에 시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을 외치던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이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밀려서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갇히게 된 모습이 있었답니다.
전경이 쏜 최루탄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게 된 학생들과 시민들.
그날 시위에서 무사히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이 있었던가 하면 그렇지 않고 명동성당에 전경들에 둘러쌓여 갇히게 된 학생들이 있었어요. 우리 학교 학생들도 20명이나 거기에 갇히게 되었죠.
학교에서는 6월 11일부터 기말고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동료인 학생들이 명동성당에 갇혀서 시험도 못보게 되었으니 우리끼리만 시험보고 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해서 그 때 '연행학생들이 모두 구출될 때까지 기말고사 연기'라는 입장을 가졌어요.
그리고 6월 11일에도, 6월 12일, 6월 13일에도..... 계속 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명동성당에 있는 학생들을 구출하러 나갔답니다.
오히려 점점 늘어나는 명동성당의 시위 학생들과 시민들.
그렇게 매일 같이 시위를 하게 된 큰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바로 연세대생이었던 86학번 이한열 학우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한열 학우는 별종의 운동권 학생이라기 보다는 그냥 정의감이 있는 폄벙한 대학생중 한 명이었어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 때는 한 대학교 학생의 거의 60 ~70%가 시위에 참가하던 때라 운동권 학생, 비운동권 학생의 구분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답니다.
최루탄에 맞고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학우 (연세대 86학번)
당시 이한열 학생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우리들은 비록 같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동료 학생의 입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한열 학생의 안타까운 상황에 분노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결코 시위를 중단할 수 없었답니다.
6월 9일부터 시작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하자'라는 그 투쟁은 기말고사가 전 대학에서 연기되고 여름방학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았답니다.
당시 연세대학교 앞의 대학생 연합 시위 모습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한열 학생을 그렇게 마든 군사정권을 규탄하는 시위.
현수막 뒤로 우상호 연세대총학생회장, 이인영 고려대총학생회장, 김연정 덕성여대총학생회장이 보이네요.
그 시위는 서울 뿐만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의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까지 모두 같은 목소리로 퍼졌답니다. 당시에 부산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재야단체 중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의 대표가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습니다.
부산시민 시국토론회 모습.
마이크 잡고 발언하시는 분이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대통령님.
최루탄을 쏘며 막아서는 전투경찰들
최루탄에 반대하는 시민들
이렇게 치열했던 약 20일간의 공방전이 끝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노태우의 6.29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이 대통령 간선제로 선거를 치루겠다는 '호헌'을 우리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맞섰는데, 그 때 차기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한 거였어요.
그러면서 마치 자기는 전두환과 다른 사람인냥 쑈를 했던 거죠. 하지만 어쨌든 요구사항이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수용되면서 전국적으로 거리 시위에서 대통령 선거 모드로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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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집회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는 모습.
저는 그 때 다른 대학교의 총학생회장들처럼 매일 시위를 주동하고, 앞장서다보니 경찰에 집시법 위반으로 수배가 되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6.29 선언이 있고 난 이후에도 집에를 가지 못하고 늘 학교 총학생회실에서 먹고 자고 했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정말 아쉽게도 김대중, 김영삼의 두 야권이 분열되면서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전체 득표의 40%도 아닌 36%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그 대통령 선거 패배의 아픔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 이후 수배중이었던 저는 잠깐 학교 밖을 나갔다가 다시 학교로 들어오는 길에 어떤 사복입은 사람들에게 연행이 되어 눈을 가리운채 어디론가 끌려갔답니다.
대공분실 내부 모습 : 조사실. 목욕조 1개, 간이침대 1개, 책상 1개. (영화 1985 중에서)
그 때 눈을 가리운채 제가 끌려갔던 조사실이 저렇게 생겼습니다. 눈을 가리우니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몇 개의 철문을 덜컹 열고 들어서서 눈에 가린 것을 풀어주니 보이는 장면이 바로 저 곳이었던 거에요.
순간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미 끌려갈 것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장소에 끌려가보니 문득 '박종철 열사'가 생각나는 겁니다.
박종철 열사는 1987년 2월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대 84학번 학생이었어요. 85학번인 저와 동시대에 이한열, 박종철 두 열사가 함께 살았던 것이죠.
그곳에 있는 조사관들은 일반 경찰들과는 부르는 호칭부터 달랐습니다. 보통 경찰의 계급이 순경, 경장, 경사, 경위, 경감, 경정, 총경.... 이런 식으로 불리지만 이곳 대공분실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고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 사장님, 회장님..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밖에서도 그곳을 보기에 00실업 주식회사 이렇게 간판이 달아져있더군요.
그렇게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구타를 당하고 잠안재우고 손가락에 모나미볼펜으로 썼던 것 또 지웠다 또 쓰기를 수백장을 반복했습니다. 너무도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그나마 그 전 해에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더 혹독하게 조사를 받았을텐데 그 사건 이후로는 고문이 좀 덜해져서 구타와 잠안재우기가 기본이었습니다. 그래도 너무너무 괴로운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고, 그곳에서 다시 또 서울구치소로 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4개월의 감옥 독방 생활을 마치고 출소를 하게 된거에요.
그 때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였어요. 저는 올림픽 개막식 일주일 전에 출소가 되어 올림픽은 밖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얼마전에 방송이 끝난 응답하라 1988을 보면 더욱 기억이 새롭답니다. 아무튼.. 그렇게 감옥도 갖다오고 남은 학기를 마쳐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도 마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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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느덧 50대 아저씨가 된 제가 테러방지법을 반대하고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는 이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저는 제 친한 군동기와 함께 미국으로 나갈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 친구의 사촌형님이 미국 LA에서 인쇄소를 크게 했는데 한국에 있는 우리들을 미국에 초청해서 그곳에서 인쇄일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영어도 배우고, 또 컴퓨터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된거였어요.
그 때 부모님과 상의를 해서 그렇게 미국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데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어요. 그중에서 여권은 먼저 갖추어야할 필수였죠.
지금은 여권을 신청하면 금방 나오지만 그 때는 한 일주일 정도 걸렸어요. 그렇게 대학 선배님이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서 여권을 신청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삼주일이 지나도록 여권이 안나오는 것이었어요. 정말 답답했습니다. 빨리 여권이 나와야 미국에서 초청한 것을 근거로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을 가는 계획이었는데 여권이 발급이 안되니 아무 것도 못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시간이 한 달, 두 달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여행사 선배님이 잘아는 경찰을 통해서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저에 대한 기록이 당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리스트에 보안사범으로 올라가 있는데 그래서 여권이 발급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정말 암담하고 갑갑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고, 또 이미 형도 살고 나왔는데 안기부에는 보안사범리스트에 올라가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중에 하나인 여권이 발급이 안되는 거였어요.
어떻게든 그것을 풀어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풀지를 못했고, 제 친구와 함께 미국 LA에 돈도 벌면서 유학을 하려던 제 계획은 그렇게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제 친구는 저를 더는 기다려줄 수 없어 미국에 혼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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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권은 그 후 세월이 더 흘러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 발급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일주일이면 발급되는 여권이 제게는 1년도 훨씬 넘는 긴 시간이 흘러서 발급이 된 거였습니다.
아마 대학생 여러번들 중에 "그럼 시위 안하면 될거 아니냐, 착하게 살면 될 거 아니냐, 나는 조용히 공부만 하고 취업준비에 전념할텐데 테러방지법은 우리같은 학생들이랑 관련없는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지도 몰라요. 아마 평생을 쥐죽은듯이 정부가 하는 일에 아무런 참견도 안하고 비판도 안하고 그렇게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면서 살면 테러방지법하고는 무관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대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이 평생 살면서 이명박 같은 대통령, 박근혜 같은 대통령, 혹은 또 다른 어떤 나쁜 대통령이 나왔을 때 그 사람 욕한 번 안하고, 정부가 하는 어떤 일에 반대하지 않고 그렇게 평생을 살 수 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 그렇게 조용히 침묵만 하며 사는 학생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친구중에 조금이라도 정의감이 있는 친구들은 아마도 그 테러방지법의 희생양이 되어 저처럼 국정원의 보안리스트에 걸려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 대상자가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주점에서 박근혜 대통령 욕한 번 했다고 해서 보안사범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예전에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주점에서 막걸리 마시다가 박정희 대통령 욕했다고 중앙정부보(안기부의 전신)에 끌려가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당하고 고문당하고 결국 온 몸과 마음이 불구가 되어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은 그렇게 무서운 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카톡 대화에서 "뭐 나라가 이 모양이야?"라고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전부 국정원에서 녹취하는게 가능한게 테러방지법이에요. 그 순간 여러분은 졸지에 빨갱이가 되고, 국정원의 보안리스트에 올라서 해외여행도 못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테러방지법의 탈을 쓰고 국민감시법이 될 그 법에 대해 결사 반대하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하는 야당의 국회의원들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헌법과 법률적 의미에서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주제로 연설하며
필리버스터를 하는 정의당 서기호 의원.
저는 이번에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며 필리버스터를 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구나. 그래도 역시 국회의원들이 제 몫을 하는구나.."
한 사람당 평균 5시간이 넘는 연설, 테러방지법 반대라는 주제의 제한 속에서도 자신이 평소 하고 싶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을 하는 그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세금이나 축내는 식충이들'이라고 비하했던 국회의원들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뜨거운 80년대를 보냈을 그분들이 이제 국회의원이라는 기득권의 틀안에 머물고 있는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아닌 의심을 했던 저였지만, 이번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아, 역시 이 분들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뜨거운 뭔가가 살아있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그래픽. 오유 네티즌전 문성문성님 작품.
저도 어떻게 글을 쓰다보니 무척 길어졌네요. 여기까지 다 읽어주신 분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단 몇 명의 후배들만이라도 이 글을 읽고,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뜨겁게 살았던 선배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주고, 우리 후배들 세대에는 더 이상 그런 인권의 침해에 대한 불안감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세대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6년 2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통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아직은 죽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여러분들의 선배인 50대의 뚱아저씨 올림.
P.S. 뚱아저씨는 20대 였던 그 때 미국 유학이 좌절되고,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4년 전에 우연히 유기견 두 마리를 입양한 것이 게기가 되어 지금은 안락사 직전에 있는 유기견, 유기묘들을 구해내서 좋은 가정으로 입양보내는 유기동물 구호단체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