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가 있어 글을 정리하지 않습니다.
* 편의상 띄어쓰지만 의미도 없고, 연관되는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파편만 있는 글입니다. 알아서 게슈탈트화시키면 됩니다.
나는 십자가를 진다. 당신은 나를 봐라. 그리고 정신승리나 해라. 그게 당신 자존심을 채우는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나처럼 되지 말아라. 나처럼 되면 뭐가 남겠는가? 당신에게 얼룩이 묻혀질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뭘까?
행동의 실현일까?
철학은 정신질환자가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
나는 한 사람을 알려고 한다. 여자를 알려고 한다고 해보자.
근데 여자가 뭘까? '여자'라는 단어의 지시대상은 어떤 공간에 있는가? 백과사전의 한 꼭지인가? 아니면 상황인가?
백과사전의 한 꼭지에 있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가 만들어낸 상이며, 현실에서 나타나지도 않을 상이다.
당신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상은 움직임으로만 나타난다. 고정되지 않는다. 특성만 있지 않다. 그 지랄같은 속성만 있지 않단 말이다.
'슬퍼서 운 게 아니라, 울어서 슬픈 것이다.'라는 이 말에 추론이 들어있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 말의 한 면을 읽어내지 못한다.
임의의 자극a를 부여할 때, 어떤 반응b가 나오는가?
이걸 찾아내야 한다.
당신이 알아내야 할 것은 임의의 자극a가 들어갔을 때, 그 대상은 어떤 반응b를 보였는지 찾아내고 정리해두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쓰일 일이 없다 하여도 일단 저장해두라.
나는 한 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랬다간 그가 싫어할 것이다.
내가 어떤 여자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그 여자가 손을 위로 올려서 내 시선을 막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줘. 부담스러워."
나는 그녀가 나를 보지 않을 때, 그녀가 내 옆에 없을 때, 그녀의 미니홈피,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을 들어가 본다.
이것은 내가 한 사람을 알아내는 방식이다. 그녀가 나를 보지 않을 때, 내 옆에 없을 때, 나는 그녀에 대해서 생각한다.
대화를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교환된 소리를 갖고서, 잠시간 잠잠해질 때, 머리속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상을 만들어서 맞춘다.)
나는 인기척이 있는 집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빈집'에만 들어간다. 그리고 벽에 걸린 사진, 책상 위에 놓인 일기장, 컴퓨터 속 다이어리 등을 읽는다.
이것이 정신질환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왜 나는 정면으로 이걸 못하는가? 왜 이걸 하면 컴플렉스에 들어가게 되는가? 왜 억제를 느끼고, 꾸짖음을 의식하는가?
왜 나는 우회하는가? 다른 곳에서 그녀에 대해서 찾아내는 것. 이것은 병적인 증상 아닌가? 왜 이것을 '남들도 다 그래'라는 말로, 말빨 조지는가?
이것은 병적인 증세다. 소위 접근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병자다. 인정해라. 정신병자. 평범하고 정상적이라고 하지 마라.
남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게시글을 들락거리고, 다른 사람의 흔적을 훔쳐보는 사람이 무슨 정상인인가?
당신은 관음증에 걸린, 정신질환자다. 거리가 느껴져야 들어갈 수 있고, 멀리 있어야 살필 수 있고, 가까이 있으면 의식되서 마음을 편안히 못 가지는, 정신병자.
나는 한 사람에 대해서 집착한다.
집착한다 함은,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 생각을 계속해서 떨쳐내지 못한단 얘기다.
나는 집착해야만 한다. 씨발. 그래야만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한단 표시를 할 수 있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집착하는 면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나를 두고 '식었다'라고 할 것이다.
나는 집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착잡하다.
당신이 사랑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하자.
근데 당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종종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쓴다.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데 글을 쓰는 걸 뭐라고 하는가? = 뻥.
억지로 뭐라뭐라 말은 하지만 결국 사랑을 못해봤잖은가? = 뻥2.
사랑이란 뭘까? 언어적으로 분석하면 이것은 어떤 동작과 느낌을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애착'을 사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애착은 뭐냐? 애착은 단순히 말하면 계속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움직임이 먼저고 그 다음에 추론으로 명사가 나온다. 애착이란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때 인식되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렇게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생겨나는 그것이다.
당신이 엑소 빠순이라면, 엑소를 보면 생겨나는 미소, 망상, 그런 것들이다.
이것은 정신질환적 증세다. 이런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먼저 정신질환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정신질환을 겪고, 그 다음에 겪은 것을 찧어야 한다.
모든 것은 정신질환이다. 정신질환이 아닌 게 없다.
다만 도가 지나치지 않은 것을 정상이라고 할 뿐이다.
철학을 한다는 건
내 머리 속을 낱낱이 분석하고 싶은 충동을 끊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병이다. 정신질환이다. 병적 충동을 갖고 있어야만 이렇게 된다.
당신은 분석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강박증 환자다.
그리고 진리가 있다고 믿고 '사실'에 의거하여, 오로지 사실만을 숭배하려는 사실 중독증 환자란 얘기다.
당신은 '굳이' 미신을 숭배할 수 있음에도, 사실의 편에 서려고 한다. (그 사실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마음으로만 본다면 뇌의 가소성일 뿐인데?)
철학은 모범생이 하는 게 아니다.
철학이 올곧고 바르게 되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현실을 보라. 현실은 오류로 가득차있다. 현실직시를 한다는 말은, 현상으로서의 오류현상을 직시하겠다는 얘기이고, 이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정상인이 이걸 한다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불신으로 가득찬다.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봤던 것을 '바로 잡으려'하는가? (바로 잡겠단 말의 뜻은 뭔가? 당신이 뭔데 바로 잡는가?)
당신은 모범생인가?
그런데 철학을 하겠다고?
나는 당신의 글은 읽지 않을 생각이다. 왜? 틀렸을거니까.
당신이 모범생이라면, 당신의 철학은 거짓이다. 척봐도 안다. 당신이 어떻게 철학하고 있는지 말이다. 눈치 살살 보면서 하고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정신질환이 나와야 하고, 현상으로서 오류가 나와야 한다. 오류는 체계적인 망상이다. 체계성을 갖춘 결함이란 얘기다.
당신이 갖고 있는 신념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버그라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을 보라. 그는 자기 자신의 신념을 가진다.
그런데 올바른 걸 찾겠다? 진리를 찾겠다?
그렇다면 정신질환으로서 병적 충동과 강박증적 현상으로서 진리에의 추구, 이 정도는 나와야 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야만 올바른 게 나온다. 안 그러면 올바른 건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말빨 조질 생각은 접어두라. 당신의 행위를 좋게 포장할, 습관성 정신병을 접어두란 얘기다.
철학은 '정신질환'이라는 프레임으로, 가둬져야 한다.
그렇게 철학 스스로 정신질환으로 들어갈 때, 사용자는 기만을 하지 못하게 된다.
철학이 '진리'를 찾는것이라는 명분을 획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악용된다. '좋은 명분'에 몸을 숨겨, 더러운 권력욕을 표명하게 된단 얘기다.
그러니
철학은 더렵혀져야 하고, 정신적으로 병들어야 한다.
철학은 정신질환자들이 해야 한다. 철학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병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철학을 가지고도 명분을 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철학과 현실이 대등하게 된다.
진리(또는 논리)에의 집착은 병적 충동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보인다.
그 상태에서, 이성과 미신으로의 갈래에 놓여야 하며, 둘 다 병적인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
둘 다 대등한 것일 때, 둘은 둘을 알아볼 수 있고, 대등하게 치고박을 수 있다. 한 쪽이 올라서기 시작할 때, 한 쪽은 불평등을 조장하려 들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정신병이다. (권력에의 집착, 내가 맞다 라고 우기는 정신병적 현상.)
있는 그대로의 빛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당신은 정신질환자여야 한다.
나 역시 정신질환자의 창으로 당신을 봐야 한다.
그래야만 보인다. 인류가 병들어있다고 여기고 봐야 한다.
건강하다는 표현은 인류 최대의 기만이다.
(생각이 바뀌면 수정하거나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