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조선일보와 소설가 이외수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혹시 불편할 소지가 있는 분은 그냥 지나가시면 됩니다.
저는 기자입니다. 신호 위반했을 때 신분증 내밀고 선처 한번 빌어보지 못한 소심한 기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슴에 이 빠진 칼날 한번 품어보지 못한, 누구하고 대차게 싸워보지는 더욱 못한, 그저 서정적 잡문이나 쓰는 그런 사람입니다. 더구나 내년이면 퇴직해야 하는 ‘낡은 기자’이기도 합니다. 제 소개가 이렇게 장황한 것은 익명 뒤에 숨었다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하 존칭 생략)의 오랜 지인입니다. 저는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형님으로 생각하고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는 저를 제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고 가끔 형이라 불러 달라고 하고 친구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저는 어차피 ‘그의 편’이라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명색이 기자인지라, 그를 위해 객관을 벗어나거나 억지를 부리는 말은 절대 하고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언론‘끼리’, 혹은 언론인‘끼리’는 서로를 비난하는 행위를 피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동종업계의 의리라고 할까요? 아니면 일종의 ‘보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제가 굳이 언론계의 ‘묵계’나 ‘불문(不文)적 담합’을 언급하는 이유는, 저 역시 한 신문사에 적을 둔 사람으로서 그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쓰는 글은 어디어디에 소속된 기자가 아닌,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쓴다는 걸 분명히 밝힙니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연일 이외수를 ‘까고’ 있습니다. 긴 설명 늘어놓을 것 없이 조선일보 홈페이지 검색창에서 ‘이외수’를 쳐보겠습니다. 4월 들어서만 해도 21일까지 무려 22건의 기사가 쏟아지는군요. 테러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참 대단한 양입니다. 물론 기사 중에는 타인의 발언을 옮긴 것도 있고(<홍준표 "혼외자식 두고 진보의 대표인양 설쳐도 되느냐"> - 진보와 혼외자식이 무슨 상관? 이외수가 언제 진보의 대표라고 설쳤지? 그렇게 백설 같은 본인은 왜 관용차 타고 동창회 가지? *이 발언은 한 개인에게 열 받아서 한 소립니다), TV조선 프로그램을 소개한 것(<친부 논란, 낸시랭 입을 열다>도 있고, 재판소식을 전달한 기사 (<이외수 혼외아들 소송' 첫 재판 16일 오전 열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작심하고 노력해’ 쓴 기사더군요.
기사 내용을 전부 거론할 수는 없고 가장 최근 기사 하나만 보겠습니다. 4월21일자 기사는 <이외수 혼외子,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였습니다. 기사 형식은 TV조선의 방송 내용을 옮긴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방송을 소개하는 정도의 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사 제목부터 ‘제법’ 선정적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한 개인이 아버지의 생각을 묻고 싶은 게 신문과 방송에서 다룰 만큼 그렇게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였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쯤에서 저는 제가 신문사를 건성으로 다닌 게 아닌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제가 배운 기준과 다를까요? 그래서 조선일보에 묻고 싶습니다. 이 사안이 어떤 중요한 가치를 가진 뉴스입니까? 국민들이 궁금해서 몸살이 날 만한 내용입니까? 그 정도 지면을 할애 할 수밖에 없었던 중차대한 내용이었습니까? 사회 변혁을 이끌만한 내용입니까? 새로운 문화 트렌드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파급력이 큰 뉴스입니까? 아니면 이제부터는 재판마다 찾아 다니며 땅 밑까지 파헤치기로 방침을 정한 겁니까? 이건 범죄를 대상으로 하는 형사재판도 아니고 개인과 개인 간의 민사재판입니다. 꼭 그렇게 중요한 것만 신문에 실어야 하느냐고요? 그 질문 자체가 억지라는 건 아시지요? 기사를 재는 비중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기사의 단수를 정하는데도 어느 정도는 통념(?)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이외수가 피고가 된 재판이 그렇게 크고 집요하게 쓸 기사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아다시피 한 개인의 아주 오래 묵은 과거사입니다. 이미 그 과거사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서 파생된 또 개인적 ‘사건’, 즉 재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쯤에서 들이대고 싶은 말이 있겠지요. 이외수는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 설령 그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조선일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전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약간 소름이 돋습니다. 언제 그를 공인으로 대접해줬는데요? 언론이 이외수를 오늘날의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하고 싶은 겁니까? 그를 키웠다고 주장할만한 기사 있으면 들이대보시지요.
공인 소리는 한 적도 없고, 그가 아이를 낳은 것을 탓한 적도 없고, 자식이 크는 과정에서 외면했기 때문에 그런다고요? 외면했다는 사실 확인됐습니까? 설령 외면했다고 해도 개인과 관련된 일을 늘 이런 식으로 씁니까? 재판이 진행 중인 사항이지만 얼른 징치를 내리고 싶은가요?
그게 정 문제가 된다면 똑 같은 잣대 하나 마련하시지요. 지난 얘기 하나 할까요? 우리나라 유명 정치인들 중에도 혼외 자식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지요? 그들에게 그런 얘기가 나왔을 때도 이런 식으로 했던가요? 끊임없이 발가벗겼나요? 잣대는 변하지 않을 때만 잣대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일벌백계의 의지를 품었던가요? 이외수 하나 두드려 패서 다시는 혼외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증류수처럼 맑은 가족문화를 이룩하고 싶었던가요? 정말 이 사회에는 파내고 캐내고 비판할 부조리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이외수 혼외' 어쩌구 하나만 남은 겁니까? 억지 쓰지 말라고요? 우선순위를 말하는 겁니다.
아니라면 왜 그러는 걸까요? 진정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이외수를 소위 ‘종북세력’의 수뇌쯤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요? 그래서 이참에 아예 입을 틀어막아 ‘종북’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은 겁니까? 제가 아는 그는 종북주의자는커녕 골수 반북주의자입니다. 선친이 국립묘지에 묻히고 자신이 사병으로 제대하고 아들들 군대 보낸 이야기를 하며 억울해 하는 그를 보며 사상이야말로 들이댈 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보적 발언 좀 한다고 종북주의자로 낙인 찍힌다면 그런 족쇄야말로 국민을 편가르는 독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무척 부끄럽습니다. 제 자신이 기자로 살아온 게 부끄럽습니다. 신문산업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가십을 다루는 신문으로 정체성을 바꾼 게 아니라면 이젠 그만 하지요. 세상에 신문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개인사’를 거의 날마다 도마에 올려놔야 하는지요.
끝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성경 구절 한 줄 인용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외수는 죄가 없다’는 추론이나 끌어내려는 게 아니니까요. 전 누구의 죄를 가릴 자격 같은 건 애당초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쯤에서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자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