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04.12.24
읽은날 14.06.09
145p.
그 옛날, 벙거지를 눌러쓰고 세상을 떠돌던 한 불운한 시인이 있어 평대(平垈)를 지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이름은 평평하나(平)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垈) 사람 살 집 아니로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166p.
"뭔 사내가 그리 매정하오? 여자가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면 무슨 수라도 내든가 해야지..."
금복이 토라진 듯 입을 샐쭉거리며 文에게 면박을 주었다.
"지게라도 있으면 지고라도 가겠지만 지게도 없는 마당에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文이 난처한 듯 어물거리자 금복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흥, 여자 하나 업는데 지게는 무슨 지게? 젊은 사람도 아닌데, 지발없이 굴기는, 쯧쯧쯧..."
금복이 혀를 차자 文이 볼멘소리로 응대했다.
"사람들 눈도 있는데 나보고 어찌 벌건 대낮에 아낙을 입으란 말이오?
"여기 보는 눈이 어디 있다고 핑계가 그리 많으시오? 그만두어요.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발로 끝까지 따라갈 테니..."
금복이 짐짓 토라진 듯 일어서려다 발목이 접질린 듯 '아!'하고 약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이 文이 다가가 등을 내밀자 금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그의 등에 업혔다. 文은 등에 찰싹 달라붙은 금복의 물컹한 젖가슴의 감촉과 아찔한 살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귀를 간질이는 뜨거운 숨결에 뒷목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묵묵히 기찻길을 따라 걷기만 했다.
188p.
우리는 이야기에 관한 어느 책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과연 금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주인공이 된 것일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불경스런 질문이며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복은 늪지대에 벽돌공장을 지음으로써 무모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되었다.
242p.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새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섁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후에도 불기둥 논쟁, 남쪽 논쟁, 검불 논쟁 등 논쟁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며 공수논쟁은 그 해가 다 가도록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343p.
"요즘 소설은 점점 더 미니멀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세상이 갈수록 복잡해진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식의 짧은 말 한마디면 사람들은 대개 그의 통찰력에 놀라며 의심없이 그를 자신들과 같은 부족으로 인정해주었다. 혹 누군가가 그의 언급에 대해 좀더 깊이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그는 신중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물러서곤 했다.
"글쎄요, 그냥 제 짧은 소견이 그렇다는 것뿐이죠."
그리곤, 커피를 한 모금 찔끔 마시며 다음과 같은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 문학상은 심사위원들이 너무 보수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요? 물론, 그 작가가 훌륭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 정도면 언제나 충분했다. 그가 한마디 던져놓으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떠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는 적당히 미소를 머금고 앉아 듣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토론의 법칙이었다. 지식인이란 부류는 대개 음험한 속셈을 감추고 있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언제나 수박 겉핥기 식일 수밖에 없었으며 약장수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379p.
춘희는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벽돌을 만들었다. 벽돌을 만드는 중에 그녀는 문득문득 공장으로 들어오는 진입로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녀는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공장을 떠나간 일꾼들이 아니라 바로 그 트럭 운전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세상에 대해 굳게 문을 걸어잠갔떤 춘희로서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쌍둥이자매나 文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굳게 닫아걸었던 문에 일단 틈이 벌어지자 거대한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처음에 진흙을 이기다, 혹은 혼자 밥을 먹다가, 또는 방에 누워 갈라진 천장 틈으로 둥근 달을 바라보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던 트럭 운전사의 얼굴은 어느샌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말았다. 그녀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사내가 한 번씩 다녀갈 때마다 그 혼란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점점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리에 누우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섞여 구더기처럼 바글거렸고 새벽이 올 무렵이면 밤새 뒤척이느라 돌아눕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버렸다. 하지만 해가 솟아오를 때쯤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밖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그것은, 오랜만에, 사랑의 법칙이었다.
416p.
훗날, 대극장을 찾은 한 시인이 있어 지가는 길에 벽돌 속에 담긴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생 말을 하지 못했던 춘희를 위해 자신의 언어를 빌려주었다. 즉, 그림 속에 담긴 춘희의 안타까운 마음을 시 한 수로 남긴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그대, 돌아오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수많은 날들이 흘러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쌍의 족제비가 사랑을 나누듯
한 쌍의 잠자리가 사랑을 나누듯
우리 다시 만나
예전처럼 함께 사랑을 나누어요.
그대, 어서 돌아오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453p.
나의 할머니는 이제 99세가 되었다. 그분은 압구정동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와 결혼한 뒤엔 공덕동에서 오래 사셨다. 할아버지는 마부들을 고용해 마포나루 일대에서 일종의 운수업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마차는 아마도 부잣집 마나님들이 까다롭게 고른 새우젓 동이를 문안으로 실어날랐을 것이다. 할머니는 한때 마포나루의 새우젓 장사들을 상대로 개장국을 만들어 팔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 서울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에게 있어선 세상이 문안과 문밖, 둘로 나뉜다. 그 바깥은 잘 모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