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베 연쇄 살인사건.
먼저 하세 준(土師 淳)군 살인사건을 보자.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97년)금년 5월 27일 고베(神戶)시 수마(須磨)구 도모가오카(友が丘) 중학교 정문 바로 앞에서 검은 비닐봉지속에 초등학교 6학년생인 하세 준 군의 절단된 머리가 발견되었다.
피해자 가족이 특별히 원한을 살만한 이유가 없었고 비닐봉지에 동봉된 `사카키바라세이토(酒鬼薔薇聖斗)-범인이 자신의 이름이라 자칭- 명의의 도전장에 ‘자, 게임의 시작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으며 범행의 잔학성에 비추어 살인범은 정신파탄자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범행의 이유와 대상이 특정되지 않아 재발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아동의 단독 외출을 금지시켰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돌아올 경우에는 부모들이 동행하여 범행의 재발에 대비하였다.
수많은 검·경 관계자들이 전과자를 중심으로 추적, 분석하였고 각종 매스컴은 엽기적인 이번 사건의 추이를 매일 집중 취재 보도하였다.
그 와중에 6월초 범인으로부터 고베신문사에 또 다른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자신의 행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의무교육에 대한 분노에 기인한다는 것과 또 살인이 즐겁기 때문에 앞으로도 범행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의 편지가 배달된 것이다.
이렇게 대담한 범인의 도전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은 그후 6월 28일 범인이 체포되자 깜짝 놀랐다. 범인은 놀랍게도 도모가오카중학교의 14살 남학생이었다.
본 사건은 1988년부터 1989년에 걸쳐 유아 4명을 살해하고 그 중 1명의 인육을 먹은 죄로 체포되어 금년 4월 사형이 선고된 미야자키(宮岐 勤)사건과 동기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면이 많아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다.
게다가 조사과정에서 금년 3월의 고베 도오리마(通り魔) 사건 - 길가던 여자, 어린이 2명을 습격하여 1명을 사망케 하고 다른 1명에게는 중상을 입힌 사건 - 도 위의 14세 소년의 단독 범죄인 것으로 드러나 사람들을 아연케 하였다.
범인이 새디스트적인 성도착자나 사회에서 낙오된 부랑아가 아니라 중산층의 14살 자제라는 점에서 또 특별한 이유없이 살인 그 자체가 좋아서 행한 쾌락살인이라는 점-이는 소년의 자술 중 범행대상이 길에서 만난 아무라도 좋았다라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에서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점 특히 교육제도상의 문제점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베시 수마구는 신흥주택지로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높고 교육열도 높은 곳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다른 외국의 신흥주거지에서처럼 급속한 개발에 따른 여러 가지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소지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와 같은 잔인한 살인사건은 잘 짜여진 사회구조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 입시위주 교육제도의 맹점을 틈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랐다.
더구나 범인의 도전장 중 의무교육에 대한 분노라는 문구가 나타나 있고 학교 생활에서 교사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명백함에도 학교측이 이를 부인하고 교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발언으로 일관하자 문제가 증폭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산업사회의 고도화에 따른 인성의 메마름과 조기 생존경쟁에서 낙오된 학생에 대한 교육의 방치에서 야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사건은 물론 다른 외국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아웃사이더가 묵인되고, 또한 소위 풍기가 문란한 국가가 아니라 질서왕국-이는 한신대지진시 주민들의 태도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이면서 공동체에의 순응을 기본가치로 삼는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시사성이 크다.
지배욕이 강한 인간은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로서 배척된 사회에 대하여 복수 즉 범죄를 저지른다고 어느 잡지가 분석해 놓았지만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14세 소년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국 교육문제, 가정문제, 사회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2. 남매간 살인사건. 입시지옥의 실태라기엔 너무 싸이코틱.
● 앵커: 일본 사회가 새해 벽두부터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충격에 빠졌습니다.
유복한 가정의 20대 여대생이 잔인하게 토막살해 당했는데 용의자는 다름아닌 한 살 위 친오빠였습니다.
도쿄에서 황외진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 기자: 어제 도쿄 시부야구의 한 치과병원과 집을 겸한 건물에서 네 개의 비닐봉투에 담긴 여자의 토막시체가 발견됐습니다.
놀랍게도 희생자는 이 집안의 20살 난 대학생 외동딸이었고 살인용의로 체포된 것은 바로 위의 오빠 다케유지 요키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4수생인 오빠에게 여동생이 공부를 못하니 장래희망도 없겠다며 비꼬는 소리를 했다는 거였습니다.
3대째 치과의사집안의 차남으로 치의대 입시에 계속 떨어져 온 용의자는 여동생의 말에 격분해 잔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내 집안 옷장에 집어넣었습니다.
● 희생자 친구: 다른 사람도 아닌 피붙이가 그렇게 했다니 희생자가 너무 불쌍하다.
● 기자: 용의자는 고향에 갔다 돌아온 부모에게는 여동생의 행방을 모르겠다고 말하고 체포되기 전까지 태연히 학원을 다녔습니다.
지난 2005년 일본에서는 50여 건의 형제, 자매간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래도 이번 사건은 도저히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일본인들은 경악하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황외진입니다.
공부 못한다 말에 격분" 日 여대생 엽기 살인 용의자는 친오빠
지난 연말 일본에서 발생한 여대생 엽기 살인 사건은 대학 유망학과 진학을 둘러싼 가족 사이의 갈등
이 직접적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살해 용의자인 한 살 위 재수생 오빠(21)는 치과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지만 여동생
'무토아 키요시’(20)로부터 공부를 못해 꿈이 없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 여동생을 살해한 뒤 사체를
무참하게 훼손했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은 밝혔다.
게다가 살해된 여동생은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족으로부터 미움받고 있으
며, 집안에서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숨진 키요시가 소속해 있던 극단 관계자들도 자신은 가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독신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가족 사이의 갈등이 이번 살인사건의 직접적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더구나 부모가 모두 치과의사인 부유한 가정에서 대학의 유망 학과 진학을 둘러싸고 공부 문제로 인
해 빚어진 자녀 사이의 사소한 갈등이 엽기적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본은 물론, 입시에 치우
친 우리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3. 콘크리트 살인사건
평성원년(平成元年1989년) 3월 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이 元年 11월 8일에 강간,절도 등에 의해 소년감별소로 보내진
소년 A를 조사했을 때, 담당의 형사가 무심코 `너, 사람을 죽이면 안되잖아`라고 한 말에 다른 3명이 자백했다고 착각.
담당관은 당초의 목적인 여죄의 절도에 관한 조서를 받는 일 없이, 반신반의인 채, 자백내용에 의지하여 도쿄
코토구 와카스 15호지 해변공원 정비공장 현장공터로 향했다.
(현장일지)
현장에는 드럼통 한 개만 널려있었다.
드럼통에 채울 수 있었던 콘크리트의 틈새로부터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경찰은 305kg정도의 드럼통을 크
레인으로 매달아 올려 경찰서로 가지고 돌아갔다.
다음날 오후 경찰서내에서 콘크리트를 해체, 안에는 보스턴 백에 채워진 이불 2장에 휩싸인 여자의 시체가 들어가 있었다. 사후 2개월 이상 경과에 부패가 진행하고 있어 상태가 나빴다.
피하지방의 두께는 통상의 6%정도로 영양실조 상태. 전신에 구타에 의한 부종(림프액이 다량으로 모여 부어오른 상태)이 있어 死因은 외상성 쇼크 또는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여겨졌다.
안면이 함몰 및 변형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관으로부터의 확인은 곤란했지만, 지문이나 이빨 등의 조합으로부터
11월 25일 밤 아르바이트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이 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타카스 1번지의 현립 야시오南고
교 3학년의 소녀(17)인 것이 확인.
야시오 시내의 아르바이트에 먼저 간 채로 귀가하지 않아 요시카와 署에 수색원을 냈던 부모는 무사히 돌아오
는 것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부친은 일을 쉬어 행방을 찾고 있었다.
(정확한 사건)
s63/11월 25일/20:00
자전거로 귀가 도중의 소녀를 찾아낸 A가 공범이었던 소년C에 소녀를 발로 차도록 지시, 소녀는 도로옆의 도랑
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다. 공범C 도주후 주범A가 나타나 `위험하니 데려다준다`며 말을 걸어 납치.
공범C 소년의 방에 피해자를 데려가 몇사람이 폭행·강간한다. C의 부친은 이때 소녀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어 주의를 줬지만 아들이 고함쳤으므로 그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희생자에게는 도망쳐 경찰에 신고해도 야쿠자가 가족을 몰살로 한다고 위협, 도망을 저지하려 했다.
11월 30일
A의 제안으로 피해자의 모친과 친구에게 `친구의 집에 있으니까 수색원은 내지 마라`고 공중전화로 전화시킨다.
이때, C의 모친은 피해자를 목격하고 있다. C의 모친이 부엌에 있었을 때 현관으로부터 `오늘 밤은`이라며 소녀
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제 늦었으니까 돌아가세요`라고 말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2층에 올라갔다. C의 부친
도 C가 내려왔을 때 `빨리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 아이는 돌아갔다고 말해 C의 부모님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일주일 후, C의 모친이 화장실을 청소했을 때 생리용품이 있었기 때문에 2층에 올라갔다.
2층에는 공범소년 D과 피해자 소녀가 있었다. 이때 피해자와 말을 주고 받고 있었는데 `주소는 사이타마, 고교
3학년, 취직은 정해져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소년C와 그 모친, 소년D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어
도중에 귀가한 C의 부친은 `걸프렌드인가. 나에게도 소개해다오`하고 C에게 얘기했지만 무시된다.
C의 모친에 의하면 식후 텔레비젼을 보거나 패미콤(게임)을 해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었고.. 소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C의 모친의 설득에 의해 귀가하게 되지만 밖에는 C와 C의 형이 대기하고 있어 실패. 결국 부모님이 잠드는 것을 기다려 전봇대를 타고올라 2층의 C의 방으로 돌아온다. 귀가한 C는 관계없는 일을 하지 말라며 모친을 수시간에 걸쳐 때린다.
63/12월 초
소년A 등 4명이 낮잠 자고 있던 틈에 피해자는 1층에 내려와 110번에 신고한다. 곧 A에 눈치채여 전화가 끊어지고 구타. 경찰이 역탐지하여 다시 걸려온 전화는 A가 나와 속인다. 전원이 린치해 라이터 기름을 발목에 바르고 불붙인다.
12월 19일
C의 집에 A가 와 피해자에게 라이터 기름을 바르고 불붙인다.
재차에 걸치는 화상에 의해 상처가 곪는 이상한 냄새를 낸다.
악취로 C의 부모님이 눈치채는 것을 무서워 해 아래층의 화장실을 사용시키지 않고 종이팩에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이미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2월 20일
소년 A등 3인외에 여자가 1명 와 `화장`이라며 피해자의 뺨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린다.
요즘 소년C는 집에 `재밌는 것이 있다`고 아는 사람에게 공언해 100명정도는 감금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재판기록에 나와있는 것만으로도 10명이 강간 등에 참가하고 있다.
거듭되는 폭행에 의해 뺨이 코높이를 넘을 만큼 부어올라 눈의 위치를 모를 만큼 되어 있었다.
감금 당초 피해자가 가지고 있던 3,000엔으로 요리배달을 시키거나 C가 칫솔 등을 사주거나 하고 있었지만 상
처나 火傷이 심해지는 것에 따라 식사·목욕에 대해 배려하지 않게 되었다. 12월 하순까지의 식사는 컵라면, 빵,
우유, 알 등 집에 있던 것을 C의 형이 먹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쇠약한 탓도 있어 하루에 우유를 한컵 먹일 뿐이었다.
12월 21일
만약 풀려나면 경찰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줄 때까지 뭐든지 한다고 피해자가 말했기 때문
에 `알몸으로 춤춰라` `미치광이 흉내를 내라` 등을 지시.
12월 28일
A와 C, B의 세명이 한밤중에 C의 방에 들어가자 피해자가 배를 누르고 넘어져 있었다. A의 얼굴을 보며 피해자
는 물을 마시고 싶다고 부탁했다. A는 물, 콘스프, 포도빵을 건네주었다. 방에서 나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우유를 먹였지만 토해 버린다. 그 후, 피해자가 팩의 소변을 흘렸다고 A는 격노, 사과하는 피해자의 하복부를
수십회 구타, 상반신을 알몸으로 해 혹한(12월)의 베란다에 서게 해 담배 두가치를 동시에 피우게 하지만 구
토. 양 대퇴부·무릎·정강이 등에 라이터 기름을 바르고 점화. 열이 이는 불을 끄려고 하자 손에도 점화, 불이 꺼지면 다시 점화했다.
1월 4일
JR아야세역 근처 마작소에서 내기 마작을 해 10만엔을 진 A는 초조해한다.
가수 코이즈미 교코의 테이프를 틀어 가사안의 `예-이!`에 맞추어 피해자의 옆구리에 마음껏 구타한다. 피해자
는 소리를 내면 더 맞기 때문에 고통을 참아 얼굴을 비뚤어지게 했다. 그 표정을 보며 소년들은 재미있어 했다.
안면·복부를 구타해 넘어뜨리고 안면 등을 발로 차고, 넘어지면 일으켜 때린다. 코나 입으로부터 피를 흘리고
있는 얼굴에 양초를 늘어뜨려 두 눈위에 양초를 세우는 등의 폭행에 이르고, 또 팩의 용기에 누게 한 소변을 먹였다.
피해자가 카셋트에 부딪쳐 전신을 경련하며 넘어진 것을 보며 `꾀병이다`며 C가 격노, A는 6kg의 철아령을 피
해자의 배에 떨어뜨리고 대퇴부, 안면을 한층 더 때린다.
구타가 끝난 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터 기름을 바르고 불붙였다. 처음은 움직였지만 마지막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폭행은 2시간 가까이에 이르렀다.
공판기록에 의하면 ;
변호사
"그 정도의 폭행을 가하면서,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소년 B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1월 5일
피해자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A는 이전에 근무하고 있던 타일 공장에 가 모르타르·드럼통 등을 조달.
사체를 가방에 넣어 A의 집 앞에서 드럼통에 넣고 콘크리트를 흘려넣었다. 이 때, 공장의 전 상사는 사람을 죽였던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A가 빌려온 웨건을 운전해 도쿄灣의 매립지에 갔지만 적당한 장소가 없어 도로 틈의 풀숲에 버렸다.
주범은 17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당시 17세) 나머지 3명은 출소했으며
현재 '콘크리트'라는 제목으로 영화제작 중입니다.
바퀴벌레와 다량의 정액, 소변 등을 먹였으며 시체발견 時 손발이 묶인 채로
안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성기는 안면보다 더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온갖 이물질을 성기에 집어넣고 불을 붙혔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감금 사실을 친구들에게 자랑해 대략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간, 폭행에 가담한 사람도 많습니다.
감금 당한 곳이 창고 같은 곳이 아니라 2층 주택이었고 1층의 부모들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감금 중, 폭행되고 방심 상태가 된 피해자는 , F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가해자소년들의 그 후..!
(원문출처 :
http://kodansha.cplaza.ne.jp/broadcast/special/2000_03_22_2/) 1989년 3월, 도쿄 아다치 구내에서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매장 살인 사건」은 전 일본에 충격을 주었습니
다. 소년들이 여고생(당시 17세)을 납치해, 41일간에 걸쳐서 감금, 폭행의 한계를 다해 살해한 사건입니다. 범
행의 중심이 된 4명의 소년들은 성인과 동급의 형사 재판이 타당히 여겨져 실형 판결을 받고 소년 형무소에 송
치되었습니다. 판결은, 주범격 소년A(동18세)는 징역 20년, 부 리더격의 소년B(동17세)는 징역 5년 이상 10년
이하. 또 소년C(동16세)는 징역 5년 이상 9년 이하, 소년D(동17세)은 5년 이상 7년 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벌써 11년이 지났습니다.그 후를 조사해 나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남겨진 채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유족이 사건의 영향으로 병에 쓰러져 범죄 피해자를 구제하는 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드러냈습니다. 또 일부의 소년은 벌써 소년 형무소나 소년원을 나왔지만, 어느 소년은 그곳에서 정
신병에 걸려 갱생이나 사회복귀는 먼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반성조차 하고 있지 않는 소년도 있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은, 2년전 소년들의 그 후를 취재
한 있는 주간지의 기자입니다. 주범의 4명 이외에도 범행에 참가해 소년원에 간 소년들이 있습니다. 그 소년의
한 명이 「잡힌 것은 운이 나빴던 것 뿐」이라며 기자에게 모르는 체 했다고 합니다.
과연 범인의 교정 프로그램이나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적 정비는 믿을만 한 것일까요. 사건 당시 , 일부
의 보도 기관이 「야수에게 인권은 없다」며 그들의 실명을 공표해 파문을 던졌습니다. 지극히 잔학한 사건을
기회로 소년법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이유입니다만, 그때부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요. 죄를 범한 소년들
의 그 후, 범죄를 낳는 가정의 문제, 피해자의 구제, 그리고 소년법의 개정 문제 등. 이번 'NEWS WEB JAPA
N'은 소년 범죄를 다각적으로 검증해 보았습니다. 여러입장의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과 동시에 비행 소년의
회복을 돕는 유효한 수단은 없을까. 왜 소년들은 폭주하는지를 해명해 갈 것입니다.
흉악사건의 무거운 손톱자국
경시청 아야세경찰서는 도쿄 코토구 와카스의 매립지에서 1989년 3월 29일에 콘크리트 매장된 드럼통을 발견
했다. 드럼통을 해체하자, 안에서 이불에 싸여진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콘크리트로 밀봉되었기 때문에 사
체는 부패하고 있지 않기는 했지만 사체의 상황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다.
여성의 안면은 변형과 함몰이 심해 외관상의 판별은 완전히 불가능. 또, 전신이 구타에 의해 부어있었고 라이터
로 구워진 자국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피하지방의 두께는 통상의 3분의 2밖에 없는 심한 영양 실조 상태였다.
이것이 세상을 뒤흔든 「여고생 콘크리트 매장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의 여고생은 41일간에 걸쳐 감금되어 쇠약사 했던 것이다. 귀축과 같은 지독한 폭행과 능욕의 범행 상황은 당시 보도되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재차 접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는 모두 7명의 소년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A(당시 18세), B(동 17세), C(동16세), D(동17세)는 징역형을 받아 소년 형무소에 복역했다. 나머지의 3명은 소년원에 수용되었다.
변호사 이토 요시오씨는, 공판으로 소년 B를 담당한 한 명이다.
「처음으로 접견 했을 때, B는 「그녀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놀아줬으니까 괜찮지 않나?」하고 정색하고 있었
습니다. 그것을 들은 나는 패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4명의 변호사가 접견을 반복하는 동안에
B는 피해자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눈물짓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불만이 쌓인 끝
에 마음이 거칠어져 이런 사건을 일으켜 버렸다고 하는 비행의 메카니즘을 그 자신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성하기까지 된 소년 B였지만, 그는 형무소 안에서 정신적인 병에 시달려 버렸다.
「죄의식에 너무 시달렸습니다.자신의 죄의 무게를 이해하면 할수록, 그것을 받아 들일 소지가 없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에 눌려져 버렸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수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소년 D도 정신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한사람이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해 「소년의 거리」를 쓴 르포라이터 후지이 세이지씨는, 출소후 D의 집에 다니며 모친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래 D는 왕따로, A의 폭력적 지배에 의해 그 사건에 끌려들어왔다. 출소후는 모친과 조용히 살며 집에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후지이씨는 가정재판소에서 중등소년원 송치처분을 받은 F(당시 16세)라고 하는 소년도 사건으로부터 7년 후에 만나고 있다. F는 부모님과 절연 상태가 되었고 친구들과의 접촉도 끊고 있었다. 그 후는 신문 배달로 생계를 세워 적막하게 살고 있었다.
「F는 사건의 전모마저 모른 채 출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F에게 형사 재판의 전기록을 읽게 하여 그와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사건과 마주쳐, 왜 A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일까? 왜 소녀를 도와 줄 수 없었던 것일까를 반성했습니다
감금중, 폭행당한 후 멍해진 상태가 된 피해자는, F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 ...나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이 때의 표정을 아직껏 F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F는 이 때의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피해자의 공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후지이씨)
죄를 인식하고 있지 않은 [가해자]
4명의 소년들의 가족은 사건 후, 곧바로 살고 있던 집을 떠났다. 아직 형기중인 주범 A는, 공판중 「灰谷健次郎
의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자신이 나쁜 일을 했다고 느껴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는 취지의 상신서를 제출했다.
지금도 A가 정말로 반성하고 있다면 나머지 몇년으로 그는 소년 형무소로부터 가출옥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
나, 다른 3명의 소년이 출소 후의 사회 생활로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A의 사회복귀는 어렵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눈도 어렵고, 제대로 한 취직처에 앉힐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후지이씨는 또하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형사 재판을 받은 것은 4명 뿐입니다만, 감금되어 있는 소녀를 구경가거나 강간에 관련된 무리는 그 밖에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감금의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구해 내지 않았던 무리의 존재가 사건을 지지해 버렸습니다.」
범죄에 가담하면서도 사회적 제재를 받는 것이 없었던 소년들도 여럿 있다.그들은 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서두에도 쓴 것처럼, 형사 재판을 받지 않았던 다른 3명의 체포자중에는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소년은 「결혼하려고 했는데 상대의 부모에게 사건이 발각되어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벌써 끝난 것인
데.」라고 취재한 기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소년원에서 죄의 무게를 인식한 것일까. 그렇다면 「벌써 끝난 것」 등의 말은 나올리가 없지만.
4. * 宮岐 勤(미야자키 츠토무) 사건
1988년에 일어난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이다.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은 그 엽기성, 이상성으로 유명하다.
성인 여성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여자아이 4명을 유괴, 살해하고
실제로 그 사체를 먹음으로써 열등감을 해결하려고 했던 검정 뿔테 안경의, 손에 장애를 가진 20대 초반 청년으로 손을 치료해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는 반대로 힘없는 할아버지와 자신을 동일화시킴. (할아버지에게 애착이 강해서 밤마다 할아버지 유해를 끌어안고 다시 살리기 위해 무슨 의식을 치름)
-당시 범인의 방 모습-
<사건 개요>
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a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사후, 그는 비디오 카메라로 a양의 성기에 장난하는 모습을 촬영하였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우시에서 7세의 여자어린이 b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살해한 후, 시체의 옷을 벗겨 성기에 장난을 한다.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c양를 차로 유괴.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는 등 유린한 후, 살해한다.
1989년 2월, a양의 집에 골판지 박스가 도착한다.
안에는 a양의 치아, 뼈, 그리고 "a양, 골, 소, 증명, 감정"이라고 쓰여진 문서를 넣어서 보낸다.
그 후, '이마다 이사무자'라는 이름으로 범행 성명문, 고백문을 매스컴에 보낸다.
1989년 6월 6일, 토쿄도 코토구에서 5세의 여자어린이 d양을 차로 유괴, 살해했다.
a양과 같이, 비디오 카메라로 d양을 유린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1989년 7월 23일, 여자어린이에게 장난을 하려고 했으나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그 이전의 사건에 대해 모두 자백했기 때문에,
1989년 8월 11일,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 된다.
이 사건은 사건의 잔인성이나 엽기성만으로도 굉장하지만,
그것이 한층 더 굉장한 인상을 주는데는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목적이었던 일, 성기에 장난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던 것,
'4명 중 한 여자어린이의 양손을 먹었다'(본인손에 장애가 있는것에 피해의식이 강함) 라고 자백한 것, 미야자키의 방이 공개되었을 때, 그 모습이 특수 촬영이나 애니메이션, '기니핏그'와 같은 공포영화 등의 비디오 테잎이나 만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
최근 이상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화제로 떠오르는 '정신감정'이 이 때 세상에 클로즈 업 된 것, 등이다. 이 사건이 세상에게 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워낙 파문이 컸던 사건이라 친아버지가 지쳤다는 유서를 남기고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했는데, 이에 대한 미야자키 츠토무의 코멘트는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 시원합니다" 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로는 모 출판사에 300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서, 교수형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둥, 사형 집행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죄나 반성을 할 수가 없다는 둥 「무죄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등을 주장, 피해자나 유족에게는 끝까지 사죄하지 않는등 여러가지로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사형판결
2001년 6월 28일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사형판결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상고를 기각
2006년 2월 2일 사형 확정 2008년 6월 17일 사형집행
5. 집과 재산을 노려 다섯 일가를 살해한 연쇄살인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떠들썩하다. 친척, 사돈 일가부터 지인의 가족까지 가릴 것 없이 학대나 폭행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잔인무도한 살인사건의 주범은 스미다 미요코(여·64). 손녀까지 둔 할머니지만 저지른 범행은 여느 흉악범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시신만 5구가 발견되었고 사건에 휩쓸려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도 자그마치 10명에 이른다. 스미다는 이미 2011년 살인 및 시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아왔는데 올 10월 중순부터 끔찍한 시신이 계속 발견돼 충격을 더하고 있다. 일본의 남부 아마가사키 시 일대에서 지난 20여 년간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전말을 살펴봤다.
# 스미다의 잔혹한 범행
2011년 11월. 몸무게가 30㎏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비쩍 마르고 시퍼렇게 멍든 눈에 눈꺼풀에는 담뱃불로 지진 화상이 남아 있는 한 40대 여성이 돌연 오사카 경찰서에 나타났다. 그녀는 "스미다의 강압에 못 이겨 어머니를 간이헛간에 가둬놓고 죽였다"고 자백했다.
수사에 돌입한 경찰은 여성이 살던 집 근처 창고 안에서 드럼통에 든 60대 여성의 시신을 찾았다. 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져 참담하게도 목뼈와 다리뼈가 죄다 부서진 이 시신은 살아생전 스미다와 친했던 오에(여·사망시 66세)란 사람이었다. 땅도 집도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빼앗겼다.
결국 스미다는 체포되었고 스미다의 행동대원 격인 스미다의 시누이, 사촌조카, 며느리도 함께 붙잡혔다. 스미다를 비롯하여 공범들은 오에 일가와 2011년 9월부터 약 두 달간 함께 살면서 오에의 두 딸과 사위가 오에를 폭행하게끔 한 후 오에가 죽자 시체를 드럼통에 유기했다.
자수한 딸은 감금과 끊임없는 살해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여동생 부부와 함께 어머니를 학대했다고 털어놨다. 스미다의 지시에 따라 어머니를 감금한 후 약간의 밥과 물만으로 연명시키면서 스미다한테 땅과 집을 넘기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자수한 딸과 여동생 부부 역시 살인죄로 체포됐다. 경찰에 잡힌 스미다는 범행동기와 경위에 대해 일체 함구하며 묵비권을 행사했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에를 죽인 게 다가 아니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스미다가 죽인 이들의 시신이 연달아 발견되기 시작했다. 스미다의 명의로 된 한 주택에서는 3구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공범들의 진술에 따라 경찰이 콘크리트가 두텁게 발라진 집 방바닥을 뜯어내 2m를 파내려가자 처절하기 그지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방부제와 방취제가 가득 뿌려져 썩다만 듯한 시신들이 나온 것이다. 마치 거대한 비누덩어리 같았다. 조사결과 시신 3구는 각각 스미다 며느리의 친언니 및 백부 이렇게 사돈 2명과 스미다의 오빠의 애인으로 판명됐다. 이들은 모두 10여 년 전 실종되었는데 사라지기 직전 친구를 찾아와 돈을 꿔갔다고 한다. 경찰은 2008~2009년경 살해되어 암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10월 말에는 아마가사키 시 인근 항구 앞바다에서 시신이 든 드럼통이 인양됐다. 경찰이 잠수부를 동원해 일주일 남짓 바다 속을 뒤져 드럼통을 발견해 끌어올렸는데 통 속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50대 남성의 시신이 나왔다. 그나마 부패가 덜한 몸에는 심하게 맞은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죽은 남성은 스미다의 시누이 미에코(59)의 시동생 하시모토였다. 그는 1987년 실종된 어머니, 그리고 2005년 스미다와 미에코와 함께 섬에 놀러갔다가 의문의 실족사를 한 형에 이어 1년 전 실종된 바 있다. 스미다는 그간 하시모토의 형이 유산으로 남긴 아파트에서 시누이 미에코와 하시모토 형의 사망보험금 1억 엔(약 13억 원)을 챙겨 사치스럽게 생활해왔다. 주변에서는 하시모토가 오랜 기간 어머니의 실종과 갑작스런 형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어오다가 스미다 일당에게 살해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미다의 엽기적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시신 3구가 발굴된 스미다의 집은 원래 스미다의 전남편의 중학교 동창이 소유하던 집이다. 공무원으로 착실히 일하던 동창은 2002년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스미다가 집을 차지했다고 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동창의 연로한 어머니,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이 2003년~2007년 사이에 하나씩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란 점이다. 이들 가족은 하나둘씩 실종되던 당시 스미다와 함께 살았다.
또한 스미다와 가깝게 지내던 친척 일가도 쑥대밭이 됐다. 일가의 할머니가 스미다의 큰어머니에 해당하는데 장남 부부(스미다의 사촌)가 199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스미다에게 거액의 돈을 갈취당했다. 그러던 중 1999년 이들 부부의 20대 아들이 스미다와 부모, 가족이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떨어져 의문사했다. 또 용접공이던 사촌형(할머니의 차남의 아들)은 1998년 주변에 "스미다의 주변에서 말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실종되고 말았다. 이후 장남 부부, 차남 부부 일가는 야반도주라도 하듯 몰래 스미다를 피해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
10월 30일 효고현 경찰청이 바닷속에서 시신이 든 드럼통을 꺼내고 있다. TBS방송 캡처
# 범행동기와 수법
스미다의 잔혹한 범행 동기는 대체 뭘까? 연쇄살인사건의 과정을 보면 다름 아닌 돈이 목적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경찰은 일본의 역대 가족살해 범죄 중 최다희생자를 낸 스미다의 여죄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어 아직껏 공식 수사발표가 나오지 않고 있다.
스미다는 40세가 되던 1987년 범행을 시작했는데 맨 처음 실종된 이가 스미다의 시누이 미에코의 시어머니다. 그 후 미에코의 전남편에게로 시어머니의 유산이 상속되었으며 이어 미에코의 전남편이 실족사를 하자 아파트는 스미다와 미에코 차지가 됐다. 스미다는 젊었을 적 술집을 경영했는데 술집서 같이 일하던 얼굴마담 미에코의 오빠와 결혼한 바 있다.
스미다는 1990년 초부터 친척 일가와 막역한 사이가 됐다. 장례식에서 큰어머니를 우연히 만난 후 사촌 일가와 어울리다가 사촌 일가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된 것. 같이 살면서 스미다는 사촌 부부에게 도자기나 옷을 들고 나타나 고액으로 강매하기도 하고 치매가 생긴 큰어머니를 꼬드겨 큰어머니 소유의 땅을 양도받기도 했다.
2003년부터는 전남편의 동창 일가와 친해졌다. 스미다는 이들 가족과 함께 살면서 늙은 동창 어머니의 연금을 챙겼으며 실종된 동창의 집도 자신 명의로 만들었다. 이 무렵 스미다는 자신의 사촌조카를 보디가드로 삼았는데, 스미다는 거구인 사촌조카를 주변에 "전 야쿠자 조직원"이라 소개했다 한다.
이때부터 스미다는 자신의 사촌조카를 비롯해 건장한 20~30대 청년 대여섯 명을 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경찰조사에서 스미다는 이들을 자기 아파트에 머물게 하면서 오에 일가를 폭행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근 식당가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스미다가 언제나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들과 사이좋게 밥을 먹는 모습이 목격됐다. 식당주인들은 인상이 험악하고 난폭한 청년들이 싫어서 이들이 식사하러 오면 '돼지군단이 왔다'고 흉을 봤다고 한다.
10월 14일 시체 3구가 나온 주택과 내부. 경찰은 콘크리트 방바닥을 뜯어내고 시체를 발굴했다. 사진출처=산케이신문
한편 스미다가 나중에 사돈이 되는 일가와 알게 된 것은 스미다가 소위 '돼지군단'을 행동대원 격으로 둔 시점이다. 스미다의 전남편 동창 가족 중 실종되지 않은 유일한 이가 동창의 여동생인데 그가 바로 스미다 며느리의 어머니다. 동창 일가가 차례로 실종될 즈음 스미다는 동창 여동생과 친해졌고 곧 며느리 집안에도 불행이 닥쳤다.
2003년 여름께 (동창의) 여동생은 남편, 두 딸(당시 10대 후반)과 함께 스미다 집에서 살게 됐다. 그런데 연말 즈음에 이 여동생 부부는 스미다의 집을 나와 도망을 가서 자취를 감췄다(여동생은 이후 의문의 객사를 했다). 스미다는 앞서 사촌 일가에게 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이 여동생 부부를 압박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스미다에게 남겨진 이 여동생 부부의 두 딸. 그중 큰딸이 스미다 소유의 집 방바닥에 묻힌 시신 3구 중 하나다. 작은딸은 2007년 스미다의 아들과 결혼했다. 스미다는 작은딸을 무척 아껴 며느리로 삼고 "꽃"이라 부르며 "내 후계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큰딸과 함께 살해 유기된 백부는 조카들을 구하러 갔다가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미다의 교묘하고 잔인한 범행수법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극명한 사례는 오에 살인사건이다. 스미다는 2009년 전철역에서 역무원과 다툼을 벌이다 화해하고 난 후 금세 친해졌는데 이 역무원이 바로 드럼통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오에의 사위다. 이후 스미다는 오에 일가족 모두와 친해지면서 가족을 이간질시켰다. 오에의 사위한테는 "역무원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리라"고 꼬드기면서도 그 아내인 오에의 작은딸에게는 "사업하려고 정신 못 차리는 남편과 헤어져라"고 충고했다.
그러다 결국 작은딸 부부 사이가 소원해지자 스미다는 오에에게 "집안이 시끄러우니 손자손녀를 우리집에 일단 맡겨라"고 호의를 베푸는 척했다. 아이들이 스미다의 집에 가자 걱정이 된 작은딸 부부, 큰딸, 오에 이렇게 일가족은 모두 스미다 집에 이사하게 됐다. 이내 스미다의 마수가 뻗쳤다. 어느 날 스미다는 아파트 현관문 열쇠를 밖에서만 잠그고 열 수 있게끔 바꿨다. 오에 일가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끝내 오에의 두 딸과 사위는 학대와 폭행, 살인의 공범이 됐다.
한 범죄학자는 < 주간포스트 > 와의 인터뷰에서 "스미다가 돈을 목적으로 타인의 가정에 끼어들어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여 종국에는 연쇄살인까지 마다않게 됐다"며 "스미다는 반사회적인 사이코패스"라 지적했다.
# 여왕벌 스미다, 대체 누구?
중학생 시절 스미다 미요코
희대의 다섯 가족 연쇄살인사건이 드러나면서 일본의 각 언론이 연일 스미다의 가정환경이나 성장배경, 성격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 주간포스트 > 에서는 스미다의 친오빠에 대해 다뤘는데 친오빠는 아직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는 '그리코 사건'에서 용의선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리코 사건은 1984년 일본의 대형제과업체 그리코의 사장을 납치한 범인들이 거액을 요구하면서 제품에 청산가리를 넣겠다고 협박한 사건으로 영구미제로 남았다.
< 주간문춘 > 에 따르면 스미다의 아버지는 미장이, 어머니는 게이샤(일본 전통의 기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유흥과 주색에 빠져 재산을 잃으면서 어머니와 극도로 냉랭해졌고 가정에는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스미다는 조숙하고 냉정한 성격이 되어갔다.
초등학교 때 스미다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행여 주변에서 괴롭히려고 하면 "아버지가 야쿠자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때리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또래를 때려 소년원에 가기도 했다. 여러 번 그런 일이 되풀이 되면서 스미다가 손을 쓸 수 없는 말썽장이가 됐다. 학교 선생님들조차 학기 초 스미다가 들어간 반을 맡지 않으려 몸을 사렸다고 한다.
고교 담임은 스미다의 고교 시절 일화를 털어놓았다. 등교가 매번 늦어 때렸더니 스미다가 정색을 하며 "부모님은 한 번도 날 때리지 않았다"라며 "잘못을 깨닫게 해줘 고맙다"고 몹시 감사해하더란 것이었다.
스미다의 성장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20대 전후의 일이다. 19세 때 스미다는 16세 소녀에게 성매매를 시켜 체포된 전력이 있다. 서너 해가 지나고 스미다는 젊은 나이에 술집을 차렸다. 항간에는 스미다가 술집을 경영하며 성매매 업주를 했단 소문도 떠돌고 있다.
스미다는 세 번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불륜을 하다가 들켜 한겨울에 속옷만 입은 채로 집에서 쫓겨났다. 스미다는 이후 그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두 번째 남편은 공범인 시누이 미에코의 오빠다.
미에코 남매는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 스미다는 두 번째 결혼에서 잘생긴 아들을 얻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스미다는 아들을 탤런트로 키우겠다며 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손녀를 매우 끔찍이 여겨 어린 손녀에게 샤넬 옷을 입히고 손녀가 금붕어가 귀엽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금붕어를 600마리나 사서 선물했다고 한다.
끔찍한 연쇄살인을 하며 얻은 돈으로 스미다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스미다와 미에코는 각기 아우디, 벤츠를 끌고 다녔다. 오에 일가를 감금한 아파트에는 2억 엔(약 26억 원)에 달하는 귀금속, 도자기뿐만 아니라 호화스런 가구, 그릇이 즐비했다. 심지어 고급 맥주 제조기도 놓여 있었다.
또 스미다는 짬짬이 자신의 '돼지군단'을 이끌고 일본 전국 각지의 파친코를 순례하는 여행을 다녔다. 인기 높은 파친코에 가서 도박을 즐긴 것이다. 스미다는 파친코에 입장객이 많으면 오빠의 애인(시신 3구 중 하나)을 줄서 있게끔 했다. 그동안 스미다는 돼지군단과 지방 명물 요리를 먹는 등 식도락을 즐겼다.
같이 흥청망청 놀긴 했지만 스미다 일당 내 서열은 엄격했다. 돼지군단 및 며느리, 시누이 등 스미다 일당 중 스미다의 말을 되받아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우스운 농담을 주고받더라도 스미다한테는 격의 없는 반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출처: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20121114014507118
Daum까페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은 없다
http://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BGfV&articleno=17349177 네이버블로그 건프라유토피아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lsdn3656&logNo=60112011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