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재발견 이래 100년간 역사학과 미술사, 건축학, 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막대한 연구성과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석굴 원형과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해 다기한 학설들과 목조전실 유무나 돔 얼개 기원 등을 둘러싼 논란도 거듭되면서 석굴암 담론은 풍성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화강석으로 돔 천장에 원형당을 만든 석굴의 건축적 성격이 무엇인지, 왜 토함산 꼭대기 언저리에 터를 잡았는지 등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석굴암에서 가장 큰 석재인 본존상 석굴암의 건축적 실체를 탐구해온 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최근 주목할 만한 새 학설을 내놓았다. 학술지 <미술사와 시각문화> 13권에 실은 ‘천궁으로서의 석굴암’이란 논고와 지난달 열린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대회 초청강연에서 그는 석굴암은 천상의 초월적 존재(천인)들을 위해 만든 천궁(天宮)이란 견해를 제기했다. “천궁 왕래” 삼국유사 구절 주목 “초월적 존재 위해 만들어” 주장 샘물 위 건립·동향 설계 등 들며 “인간 위한 건축 원리와 달라” 이 천궁은 불교신 제석천이 머무는 천상세계인 도리천 33천에 있는 신들의 거처이며 바로 김대성이 창건한 석불사를 가리킨다는 추론이다.
<삼국유사> 기록대로 김대성이 전생의 어머니 명복을 빌기 위해 토함산 정상 동쪽에 석굴을 지은 것은,
도리천궁에서 석가모니가 생모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는 장면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석불사가 수행과 신앙 공간이기에 앞서 석가가 친히 설법하는 신의 공간을 상징했다는 게 그의 논지다.
이런 ‘천궁’설을 바탕에 깔고 남 교수는 석굴암의 건축적 특징을 새롭게 풀이한다.
왜 석굴이 산 정상부에서 동쪽을 보고 세워졌을까.
여느 건축물과 달리 샘물이 솟아나오는 지반 위에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동해의 습기 서린 해풍이 몰려오는 험난한 산중에 단단한 화강석으로 돔형 원형당 양식을 구축했을까.
그가 보기에, 김대성은 명실상부한 천궁을 짓고자 했다.
천궁은 천신을 위한 공간이란 점에서, 입지 조건이나 구조, 재질 등에서 완벽한 창의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 등 인도 불교 성지의 주요 사원과 자이나교 사원 등은 대개 동쪽을 바라보고 지어졌다.
남 교수는 이런 전례에서 석굴암 입지가 고대 인도사원의 동향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 샘물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건축사적으로 인간을 위한 건축의 기본 원리에 반하지만, 신들 거처로 이해하면 납득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이나 중국 선진시대 사당인 진사(晉祠), 서울 북한산의 승가굴처럼 샘물·우물과 결합한 종교건축 사례들은 많다.
남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석굴암 본존상 뒤 십일면관음상 앞에 있다 사라진 석조제단을 샘물과 연관된 불교의례 흔적으로 꼽았다.
전체를 돌로 축조한 혁명적 발상 또한 천궁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남 교수가 보기에, 김대성은 천궁으로서 석불사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할 재료가 불타지 않고 썩지 않는 돌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에 화강암 제약을 뛰어넘어 석굴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석굴암을 도리천 천궁으로 지었다면, 교리상 석굴은 토함산 최정상(745m)에 있어야 맞다.
그러나 석굴 전체를 돌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고려하면, 흙산인 토함산 꼭대기로 원하는 크기의 화강암을 제대로 조달할 수 없다.
석굴암에서 가장 큰 석재인 본존상의 경우, 3~4배에 달했을 원석 무게는 100톤이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석재 운송 탓에 산 아래로 입지를 정하면, 천궁의 요건인 산 정상부를 포기해야 한다.
산정의 입지와 돌 조달이란 엇갈리는 조건을 함께 충족하는 최적의 장소는 어디일까.
고심 끝에 김대성이 찾아낸 터가 바로 해발 565m의 현 석굴암 자리라고 남 교수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