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는 남자>
희미한 안개 속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희
미하던 윤곽이 드러난다. 검은? 그래,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누워있다. 이 곳은 어디지?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좀처럼 어딘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안개 속에
서 조금씩 보였다가 흐려졌다 할뿐이다. 가까스로 검은 물체가 있는 방
향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걸어간다. 여자의 옆에 무엇인가가 있다. 사
람? 사람일까? 남자라고 생각된다.
안개 속에서 소리가 울린다. 웅웅웅거리며 귓전을 파고드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린다. 어딘지 모르겠다. 어디에서부터 이 불길한 소리
가 울리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획 젖혀보지만 소리가 들려지는 방향을
알 수가 없다. 깊은-깊은 계곡의 안쪽 같다. 소리란 소리는 모조리 울
리고 또 울려 퍼지는 그런 산 속의 굽은 도로 한 가운데라는 생각이든
다. 공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안개도 차갑지가 않다. 느낌이- 피부
가 느끼고 알리고 지각하는 어떤 느낌하나가 사라져버렸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 가까운 곳이다. 더듬어서 그
곳으로 향한다. 울려서 제대로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파
고든다. 불현듯 안개가 확-걷혀버렸다.
눈앞에, 아니,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자가 누워있다.
도로 위에 길게 퍼진 머리카락, 여자의 머리에서 떨어져나온 등산모,
여자가 매고있던 배낭, 여자는 빨간 등산조끼를 입고, 갈색 등산용 바
지를 입고있다. 여자의 얼굴은 비스듬히 돌려져있어 보이지 않는다. 남
자도 있다. 여자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자가 서있다. 누군가와
같이 서있다. 또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순간
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속살거린다. 그 소리는 계곡에 전해지고,
계곡은 다시 그 소리를 나의 귓가에 전해준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끝난 거지?"
"우리는 이제 자유야"
"그래."
"확인해야되지 않아?"
"아아, 그래야겠지. 올라타."
"나도?"
"그래, 같이 느껴보는거야."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남자는 운전석에 올라간다. 그들은
시체앞에 서있는, 그들이 올라탄 차에서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는 나
를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확
인한다. 시동이 걸려있던 차는 주인의 충실한 명령에 따라 말발굽에 힘
을 주고 스타트를 하는 경주마처럼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
은 나를 향해 오고있다, 아니, 그들은 그녀를- 조금은 꿈틀거리며, 손
가락을 움직이며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그녀의 머리를 향하여 엑셀
을 밟고 달려오고 있다. 그녀는 움직였다. 그러나 경주마는 멈추지 않
았다. 이미 꺾이어진 허리위로 그녀의 검은 머리칼위로 검은 말발굽이
달려오고 있다. 난 아무런 일도 해줄 수 없다. 피하라는 말도, 도망가
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알고있다.
검은 크라이슬러는 장애물을 가볍게 넘고 내게로 달려든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얼굴, 그리고, 그 검고 탄력 있는 경주마가 달고있는
초록색이 선명한 번호판-말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를 향해 조금의 멈춤 없이 달려오고 있을 때
난 눈을 감았고, 내 몸이 경주마아래 짓밟혔다는 의식도 없이 천천히
눈을 떠보았을 때, 내 눈 안에 들어온 건, 잠들기 전에 켜놓았던 스탠
드 불빛이었다. 붉은-
젠장, 뭘 잘못 눌러서 또 벌겋게 되버린거야. 투덜거리며 터치스탠
드를 가볍게 툭쳐서 베이지 색으로 바꾼 뒤 침대옆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메모지에 미친듯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울 러 4385 -- 남자 : 짧은 스포츠형의 머리, 회색빛의 세미정
장에 차이나 칼라, 면도를 하지 않은 조금은 지저분한 이미지, 술에 덜
깬듯한 몽롱한 눈, 여자 : 부드럽게 컬한 머리칼, 강선주와 닮은 듯한
얼굴모양에 --
나는 적다말고 메모지에서 손을 뗐다. 연예인? 연예인? 그녀의 얼
굴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강선주의 이미지? 강선주라는 연예인을 떠올
렸다. 그다지 TV를 즐겨보지 않아서 헷갈리는걸까, 설마 그녀는 아니
겠지?
노트북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두고 부팅을 한뒤 곧장 하이텔에
접속을 했다. 잠들기전까지 놀았던 중앙대화방으로 향했다.
J
## 손진영님(PHOENIX70)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강희 (LEOCAREX) 어, 다시 와라.
유설희 (TJFGML96) 어, 다시 와. 아직 안잤어?
손진영 (PHOENIX70) 아, 응. 다시. 물어볼게 있는데 말야.
강희 (LEOCAREX) 뭐야. 이 시간에 넌 잠도 없냐. 데이트하고있
는데 들어오구 말이야.
유설희 (TJFGML96) 왜 그래, 강희오빤. 쯔.. 먼데 진영오빠?
강희 (LEOCAREX) 그, 그여자 있지,누구지, 강선주라는 여자, 사
진 좀 볼려면 어디가야하지?
유설희 (TJFGML96) 자료실에 가면 있자나.
손진영 (PHOENIX70) 자료실말구는 없을까? 지금 바루 보게.
강희 (LEOCAREX) 그럼, 연예인정보란이나 인명정보란에 가봐.
유명인들 사진하고.
손진영(PHOENIX70) 오키, 고마워. 강희, 쪽, 고마워, 설희~
## 손진영님(PHOENIX70)님이 톼장하셨습니다. ##
난 대화방을 나와 한참을 헤매 결국 연예인 정보가 실려있는 게시
판을 찾아내었다. 강, 강, 강, 강, 강선주,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탓
인지 비교적 앞쪽에 실려있었다. 이 놈의 하이텔-, 여전히 느리다. 이
시간은, 그제야 컴아래쪽에 시계를 보았다. AM 5:30 흐음, 일찍도 일
어나게 되는군, 번번이 이 놈의 꿈때문에, 프로필이 먼저 올라왔다.
1976년 8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남
1995년 서울예전에 입학
[서울, SEOUL] 여주인공으로 데뷔
청순한 수녀연기로 대종제 여우주연상 및 신인상 받음
1996년 [게임] 여주인공
현대적인 구원의 여성을 구현했다는 호평을 받음.
그랬다. 그녀의 이미지는 천사였다. 말그대로 지상위에 내려와있는
천사, 전성기의 [엠먀뉴엘 베아르]뺨치게 청순한 이미지로 충무로 바닥
을 휩쓸고 다닌다는 여배우였다. 천사의 이미지를 전혀 상하게 하지 않
을만큼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투명했고, 눈은 어린아이눈처럼 맑았었
다. 기억이 났다. 나도 그녀가 찍은 화장품 광고를 보면서 길바닥에 한
참이나 서있곤했었으니까. 이제서야. 사진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수녀복을 입고 있는 서울, SEOUL의 한장면같았다. 저 따스
한 눈, 어린아이보다 혹은 예수보다 더 따스하게 사람을 안아줄 것 같
은 눈을 난 보았었다. 그 눈을 보았었다. 그의 옆자리에 올라 아무런
죄의식없이 그와 함께 장애물경기에 열중하던 그 女子, 욕지기가 났다.
예상대로 사건은 특종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KBS며, MBC며 SBS
에 YTN까지 그녀의 죽음을 보도했다. 화면을 가득메우는 여자는 화장
품회사 재벌 외동딸의 죽음, 한국의 트럼프라고 불릴만큼 부를 쌓고 기
행을 일삼았던 김윤호회장의 외동딸이자, 유일한 본부인의 딸, 김소정
이었다.
검은 머리칼, 붉은 등산복, 꿈틀거리는 손가락, 으깨어져 피로 범
벅이 되어 알아볼 수 조차 없는 얼굴. 잔혹한 범죄, 우연한 뺑소니차사
고라고 보기엔 너무나 잔인하게 널부러져있던 시체, 심심하던 언론과
사람들의 입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그녀의 시체위에
몸을 던져 오열하던 남자가 비쳐졌다. 제주소의 콘도사업때문에 내려가
있다가 사고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다는 남자는 제대로 면도하지 않
은채, 눈물로 범벅이 되어 퉁퉁 부은 얼굴로 화면에 절반쯤 얼굴을 내
리고 그녀의 죽음앞에 오열하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차이니즈칼라를 입은 짧은 스포츠머리를 가진 남자를 카메라는 지
겹도록 비치고, 아나운서는 한술 더 떠서 지극한 부부애라고 멘트까지
더해주고 있다. 병신같은 새끼들.
목격자없는 사고는 종횡무진이더니, 결국 입구도 출구도 없는 미궁
속에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필요한건가, 난 쓴 입
맛을 다시며 전화기로 다가갔다.
"네, 손해준형사, 부탁드립니다. 아, 접니다. 네, 진영입니다."
경감은 내가 불러준 차번호를 추적했고, 그 여자-강선주-가 사고가
난 오전에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며 차수리를 맡긴 카센타를 통해 그
녀의 원래 타이어 흔적이 시체위에 찍힌 타이어 흔적가 같다는 것과,
인기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진 강선주가, 재벌집사위역에 지겨워하는,
독점욕강한 아내에게 질려버린 남자에게 접근해 마약을 권하고 보험에
가입하게한뒤, 사고를 공모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주마에 올랐
던 그들은 나란히 같은 차에 올라탔고, 서로가 속은거라고 똑같이 발뺌
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손진영]이란 다크호스를 알지 못했던게 패인의
주요원인이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채 장애물을 뛰어넘다가 자빠져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 모든 과정중에 내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이 알려진다고해서 좋은 대접을 받을수도 없을 거
란걸 잘 알고있었다.
죽음을 보는 능력이라니.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도 안되
는 남자를 제대로 봐주겠는가? 나이라고는 24살밖에 먹지않은 놈이, 그
것도 몇달전에야 간신히 제대하고 대학물도 제대로 못먹은것같은 어설
픈 복학생일 뿐인 내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걸 무슨 재주로 알꺼란말인
가.
시작은 5살때였다. 지독하게도 잊혀지지 않는 꿈을 꾼적이 있었다.
뱀이, 지독하게 긴 뱀이 나와서 남자를 칭칭 감고있는 꿈이었다. 난 겁
에 질려서 울면서 잠이 깨었고, 엄마가 달래주었는데도 한참동안이나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그랬었다. 그리고 열다섯쯤이 되었을때야, 외
삼촌이 내가 다섯살때 뱀에 물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
때는 우연의 일치일꺼라고 넘겨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살때 꾸었
던 뱀꿈 이후로 기억되는 꿈도, 특별히 무서운 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꿈은 아주 천천히 내 의식이 자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잠만 들면 꿈을 꾸었다. 그 곳이 낯선 밀림
속일때도 있었고, 추운 얼을산꼭대기일때도 있었다. 난 많은 죽음을 보
아야 했다. 전쟁터도 있었다. 유럽의 어느땅, 포성이 울리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심장을 찢는 듯한 그런 거리의 한가운데 서있기도 했다. 다
리를 건너는 젊은 연인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도 보았다.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게 잠이란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많은 이들이 죽어갔
다.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폭탄에 찢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나보면 분명히 명륜아파트, 7동 1208호에
있는 내 방인데, 거리에는 새벽늦게 귀가하는 취객들의 노랫소리만이
간간이 울리는데, 내 귓가에는 꿈속의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로 터
져버릴것만 같았다. 점점 말라갔다. 집에서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만화가게있는 만화책을 잔뜩 빌려다놓고 밤을 새곤했었다. 그래도 그
꿈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밤에 잠을 못자니
학교에서 쉬는시간 틈틈이 잠들어야했다. 그러나 오분에서 십분남짓한
그 짧은 잠조차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구위에 사람들은, 내가 잠이 들어있는 그 시간에 죽어가는 사람
이란 사람들은 모조리 내 꿈에 연결되어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그들
은 비명질렀다. 난 그들 중 어느 한명도 구해낼 수 없었다. 그것이 열
여섯이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죽음을 보면서고 구해낼 수 없다는 것
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죽어갔고, 나는 보고있었다.
결국 난 미쳤다. 더이상 꿈을 꾸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난 죽음
을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 쑤학공식이필기되던 칠판이 사라지
고 군복을 입은 사람이 총을 내 머리에 들이대는 환상에 잡혔다. 수업
시간이고, 야간자습시간이고, 가리지않고 그 환상은 날향해 덤벼들었
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난'왜 나야!"라고 소리질러야했다. 죽음을 예고해줄 수도 없고, 내
가 구해줄수도 없는 죽음을 보는 것이 왜 내 운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그랬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나를 가장 상처입혔다.
나에게는 죽음을 예고할 능력따윈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죽
임을 말해줄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제지할 수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곤했었다.
학교를 그만둔 뒤, 오히려 꿈을 꾸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숫
제 꿈없이 지나가는 조용한 밤들도 내게 다가오곤했었다. 난 내가 가져
보는 드문 평화안에 가라앉아있었고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죽음의
꿈이 끝났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파트단지에서 놀고있
는 대여섯살먹은 꼬마녀석들과 친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귀신 들었다는 애가 쟤야?"라고 내 등뒤에
손가락질하는 아줌마들처럼 날 괴물보듯이 보지는 않았다. 놀이터에서
하루종일 아이들이 노는 것만 보고 있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꼬마녀석
들과 제법 친해졌을 무렵, 감자기 꿈은 다시 날 찾아왔다.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여느때처럼 놀이터로 내려가있다가 어머니가 집을 비우셔서 집
의 거실쇼파에 몸을 길게 빼고 누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
리고 보았다.
산속이었다. 아파트뒤의 야산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에 아버지
를 따라 약수긷는데 따라다녔던 숲길에서 옆으로 어긋나있는 길이었다.
예전에 저녁나절에 내려오다 길을 잘못 든적이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래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가깝게 보였다. 그렇게 가까운 곳을
꿈에서 본 적은 드물었다. 언제나 낯선-태어나서 처음보는 사람들의 죽
음만을 바라봐야했다. 그래서 전쟁은 다큐멘타리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낯선 나라이곤했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보았던 것은 동네야산이었다.
어디에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집에 갈래요.아저씨"라고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귀에 익은거였다. 정신없이 뛰었다. 내가 태어나
서 처음으로 내 능력을 저주하였다면 차라리 날 죽이고 싶을정도로 저
주하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아마 그때가 시작이었으리란 생각이들었
다.
5살먹은 꼬마 기집애. 그날도 여느때처럼 분홍색 원피스아래 빨간
구두를 신고와서 "엄마가 사준거야"라고 내 앞에서 자랑하며 뱅글뱅글
돌던 아이가 거기 있었다. 찢어진 옷가지들과 남자의 손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도 겁에 질려 울어버리지도 못하는 아이는 울지도 못
하고있었다. 본 적이 있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보았던 포르노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눈앞에 지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큰 여자가 아닌, 제
대로 영글지도 않은 어린아이의 입에 자시의 성기를 집어넣고 눈을 희
번덕거리며 자신의 쾌락을 탐닉하느라 숨을 헐떡거리는 짐승이 거기 있
었다. 정신없이 그를 떼어놓으려고 달려가면서 그리고 그를 잡지도 못
하는 날 저주했다.
"유진아-"
잠에서 깨었을 때, 잠시 들었으려니 싶었던 잠은 네시간을 훨씬 넘
겨버렸다. 오후 6시, 이미 해는 어둑히 지고 있었고, 집에 돌아와 저녁
을 짓고있던 어머니는 내 고함소리에 놀라 부엌에서 달려나오셨다. 오
랜만에 집에 일찍 돌아왔던 누나가 아파트문을 들어서자말자 내 소리에
놀라 멍하게 날 보고만 있었다.
나중에 누나가 그랬다.
"너, 미친애 같았어. 정신없이 뛰어나가서 놀이터에서 애들 붙잡고
유진이 어디갔냐구 그러고 갑자기 약수터쪽으로 막 올라갔자나. 난 놀
라서 너 따라서 산에 올라간거였구. 너 정신없이 산길을 이리저리 헤짚
어다니다가 결국 찾아...냈었잖니."
그때 정말 난 미친 놈 같았다. 다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내
가 본 것이 꿈이기만을, 내가 알고있는 유진이녀석이 아니라, 다른동
네, 다른 아파트에 사는 유진이를 닮은 다른 여자애면 차라리 좋겠다
고, 내가 모르는 사람이길 몇 번이고 바라면서, 약수터로 올라가는 산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벤치뒤쪽의 샛길로 빠져들어서 헤멘뒤에 내가
보았던 것은 유진이가 자랑하던 빨간 구두 한짝이었다. 먼지에 채이고
굴러서 형편없이 너덜너덜하게 되어버린 구두 한짝만이 그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유진이는 돌아왔다.
낙엽에 묻혀있어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버린 뽀얀 살결은 모포에 둘
둘 감겨 있었고, 아이는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채 묻혀있었다고, 사람
들은 말했다. 난 내 발로 경찰서로 걸어갔다.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
범인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범인으
로 몰리기까지 했었다.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게 이유였다. 그러다
가 만난 사람이 손해준 형사였다. 그는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아무런 조소도 보내지 않았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기쁨도 보이
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녹음해서 듣고 난 뒤 참
고하겠다고 할뿐이었다. 범인은 아파트 어귀의 슈퍼가게 아저씨였다.
그는 아이의 목에 나있는 손가락모양과 구두에 묻혀진 지문 등에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채 형량을 받았다.
사건이 끝난 뒤, 손형사는 나를 불러내었고, "고맙다.고생했다."라
고 짧게 말해줄뿐이었다. 그앞에서 처음으로 난 마음놓고 울음을 터트
렸다. 그는 "죽음을 보는 것이 능력이라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
해 사용해야지."라고 말해주었고, 난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서 어깨를
들먹거렸다.
이후로 꿈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찾아들었고 점차 꿈을
편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덕분인지, 꿈없이 깊은 잠에 들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저께 꾸었던 꿈처럼 아무 예시없이 누군가
의 죽음이 보여지곤 했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수능을 봐서 대학에 들
어간뒤, 몇 달동안 꿈은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나도 손형사를 찾
지않았다. 단지 유난히 피곤하다거나, 머리속이 텅 빈채 술에 취해 잠
이 들었을 때, 꿈은 나를 어디론가로 데려가곤했다. 그 곳은 밤늦게 시
장에서 돌아오던 아주머니가 뺑소니차에 치여쓰러지는 길바닥이기도 했
고, 잠에서 깨어나, 강도에게 말도 제래도 못한채 죽어버리는 어느 노
인네의 방안이기도 했다. 거의 예외없이 나 말고는 목격자가 없는-경우
였고, 언제나 비밀에 감추어지는 내 조언은 적절한 효과를 나타내기 마
련이었다.
나는 어느새 내 꿈에 길이 들어있었다. [죽음을 보는 꿈]은 나를
죽음에 취하게 만들었다. 점점 더 타인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져갔다. 내
눈앞에서 피가 흩뿌려지고, 목이 졸려져 죽은 사람의 혓바닥이 길게 빼
어나온채, 쓰러져버려도 난 무감각했다. 더 이상 그들을 도와줄 수 없
다는 것이 내 한계임을 알고 난 뒤 난 냉정하게 꿈을 관찰 할 수 있었
다. 범인들의 몽타주를 작성하고 범인들의 옷이며, 머리스타일을 자세
하게 서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전, 또 한 번의 꿈을 꾸었다.
[남자]는 어디론가 끌려가고있었다. 산? 산이었다. 절벽같기도 했
고, 끌려가는 [남자]는 무엇인가에 취한 듯,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있
었다. 의식도 희미해보였다.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표정으로 새벽산에
끌려가고있었다. 그를 끌고가는 사람들은 모두 셋, 그들은 하나같이 입
을 꾹 다문채, 무거운 표정으로 그를 끌고 올라가고있었다. 그저 임무
에 충실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임무의 옳고 그르고의 판단여부는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재수없이 들키면 황이라는 표정으로 새벽
의 가파른 절벽길을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초겨울에 들어선 산은
그다지 좋은 날씨도 아니었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적당히 높고 가
파른 곳에 이르자, 그들은 [남자]를 절벽 아래로 굴러버렸고 난 잠에서
깻다.
이틀 뒤, 민주계의 초석이며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던 [남자]는 그가
즐기던 새벽등산로에서 실족사했다고 기사가 발표되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희생양이라고 그의 주검을 가르켰
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는 팩스를 통해 손형사에게 내 메모를 전해주
었고, 경찰계의 시선은 점차 여당계의, 거물인사에게로 집중되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난 또 꿈을 통해 보았다. 회색 소나타2를 향해 고
의적으로 달려드는 대형트럭. 산에서 보았던 남자중에 한 사람이 그 트
럭을 몰고 있었다.
꿈을 꾼 다음날과 오늘까지, 손형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삐삐
와 핸드폰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경찰서에다 대고 투서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회색
소나타2의 뺑소니 사고는 어느 신문에도, 뉴스에도 발표되지않았다. 누
구의 죽음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신고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초조하게 저녁내내 손형사에 호출을 걸어놓고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주말마다 바쁜 누나는 양평으로 엠티를 갔고, 부모님은 결혼
기념일이라며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셨다. 유난히 조용한 아파트, 텅 빈
어둠속에 잠겨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며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았다.
남자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계단
을 올라오고 있었다. 비상벨아래 깨어져버린 등으로 인해 가뜩이나 침
침한 곳이 어둑어둑해져버렸다. 몇 층이나 올라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
다. 그저 남자는 코트 깃을 잔뜩 올리고 발소리를 최소한 죽여 걸어가
고 있었다. 눈에 익은 곳 같긴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환장하게 무서운 날씨였다. 소름이 돋을만큼 번쩍거리는 번개
와 왠만한 소리쯤은 죽여버리는 폭우로 인해 남자의 구두소리조차 제대
로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남자는 그가 목적한 층에 이르렀는지, 아파트 복도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를 따라 걸어가며, 옆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둑해
진 하늘탓에 재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복도등마저 절반쯤 깨어져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는 아파트 문을 따고 있었다? 도독?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도독처럼 서두르지도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열쇠를 열고 돌릴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그를 본다
면, 그의 손가락에까지 뻗혀져있는 감각으로 자물쇠를 열고 있음을 알
수있었을 것이다. 레인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는 문을 열고 아파트로 들
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눈에 익은 구조. 아파트란 곳은 어
느곳이나 다 그곳이 그곳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집에도 있는 가짜새가 들어있는 작은 조롱하나, 오른쪽 신장옆
에 달려진 거울, 번쩍이는 번개로 인해, 거실의 전경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오늘자 톱기사가 실려있는 스포츠 신문, 중국집에서 시켜먹
고 그냥 거실탁자위에 올려놓은 짜장면 그릇, 누군가가 켜놓고 잠들어
버려 정규시간이 끝난 뒤, 점점이를 돌리고 있는 24인치 테레비 한 대,
남자는 잠들어있는 누군가에게로 다가갔다. 난 누가 잠들어있는지 알고
있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언제나처럼 REBOK 남색 체육복을 입은채, 리
모콘을 손에 쥐고 마시다 만 맥주가 입가에 묻어있는 스물 세 살먹은
대학생.
순간 눈을 떳고 난, 내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칼을 내리찍는 남자의
손을 보았다. 그의 눈은 내가 알고있는 눈이었다. 아무런 죄의식없이
명령에 충실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빠른 손놀림. 그러나 난 몇번
이고 피부를 찢고 들어오는 칼의 촉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주 무표
정하게 그의 움직음을 보며 눈앞에 튀겨오르는 붉은 액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지난달, 손형사가 중고 소
나타2를 헐값에 구입했다고 자랑했던 일, 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아
무도 모르리란 사실. 내일 아침이면, 나의 죽음은 그저, 강도에게 당한
재수없는 일로 신문에 한두줄짜리 기사로 실릴꺼란걸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칼놀림이 잦아들었다. 그는 헐떠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
눈 역시, 내가 보아왔던-십여년간을 내내 보았던 그들의 눈동자처럼 그
렇게 허망하게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
식은 바닥 카펫위에 스며드는 피처럼, 잠으로- 깨어나지 않을 잠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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