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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서기의 무분별한 인용에 대한 비판.
이덕일은 자기 책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 | 김현구는 이 책 곳곳에 백제의 지배를 강조해서 마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 번째 논법이 등장한다. (중략) 임나일본부를 지배한 것은 백제인데,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1] | ” |
“ | 『일본서기』가 왜곡과 과장이 많은 역사서라는 것은 국제적 상식인데, 스에마쓰가 그랬고, 쓰다 소키치가 그랬던 것 처럼 일본서기를 사실로 전제하고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2] | ” |
이는 실제 김현구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언급해, 백제가 임나라는 영토를 운영하는 데 있어 왜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와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 수도 없이 일본서기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유효한 비판이다.
2. 김현구의 시각이 한국이 아닌 일본의 입장에서 기술되었다는 비판.
김현구의 원문은 이렇다.
“ | 그렇다면 적어도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고 있는 『일본서기』에 의거하는 한, 야마또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관계는 과거 스에마쯔설로 대표되던 통설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 ” |
“ |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4] | ” |
이덕일은 이렇게 비판했다.
“ | 김현구는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백제 및 임나를 본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고구려에서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고구려는 사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야마토 정권이 신라·고구려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上國)이란 뜻이다[5] | ” |
3.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를 비판해서 입을 다물게 했다는 내용에 대한 비판.
김현구 교수의 문장은 이렇다.
“ | 제 1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때 위와 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하자 일본 측 대표 S씨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야마또정권의 임나와의 인적·물적 교류가 백제에 비해 아주 미미한 것은 임나가 야마또정권의 직할지(미야께, 屯倉)이거나 임나에는 직접 책임자를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야마또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 의사도 대부분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씌어 있다고 말하자 아무 말도 없었다.[6] | ” |
“ | 위 내용을 보면 야마또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7] | ” |
이덕일은 이것을 이렇게 비판했다.
“ | 일본학자는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통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스에마쓰의 주장을 되풀이 한 것이다.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형도 내면도 일본인인 일본 국적의 S씨와 외형은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일본인인 한국 국적의 김현구 사이의 논쟁같지도 않은 논쟁이다.[8] | ” |
4. 백제-신라-고구려가 왜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김현구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 | 야마토 정권은 전후 5회에 걸쳐 한반도에 원군 내지는 인부들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전부 백제를 위해 파견했다는 것이다.… 537년 신라의 임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도 최종적으로는 백제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이때 오토모노 나나무리 오무라지(大伴金村大連)의 명으로 백제에 파견되었던 일라(日羅)는 46년 간이나 백제에서 관료로 근무하다가 586년에야 귀국했다.[9] | ” |
“ |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 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였던 것은 군사 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10] | ” |
“ | 한편 백제의 군원 요청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9회에 걸쳐 원군이나 말, 배, 활과 화살, 식량 등의 군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9회에 걸친 야마또정권의 군원에 대해 백제는, '조(調, 조세)'라고만 씌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로 9회에 걸쳐 오경박사를 중심으로 학자나 전문지식인, 승려·불경·깃발 등의 불교 관련 문물을 보내고 있다. 백제가 보낸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 제공이 야마또정권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면 야마또정권은 9회에 걸쳐 군원을 제공하고 그때마다 백제로부터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제공받았던 셈이다.[11] | ” |
“ | 야마또정권의 군원 제공이 백제로부터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은 왜가 15회에 걸쳐 백제에 파견한 사자가 분명하게 요구한 것이 전부 선진문물이나 오경박사 등이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결국 이는 당시 야마또정권이 백제와의 관계에서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 전문인이나 선진문물의 획득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두나라의 관계를 보면 백제는 야마또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또정권은 백제에 군원을 제공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12] | ” |
“ | 적어도 『일본서기』에 의한다면 케이따이천황(재위 507~31)이 등장하는 507년에서 임나가 멸망하는 562년 사이의 야마또정권과 한반도 각국과의 관계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 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13] | ” |
이덕일의 해석은 이렇다.
“ | 김현구에 의해 백제는 졸지에 야마토 조정에 군사 원조를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14] | ” |
[출처] 대전법원 집단성폭행 가해자 봐주기로 일관|작성자 newsbeminor
[출처] 대전법원 집단성폭행 가해자 봐주기로 일관|작성자 newsb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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