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번 썰물처럼 지나간 후라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뒤늦게나마 감상평을 써봅니다.
라라랜드를 보고 감상평을 쓰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나 게시판에 라라랜드라 검색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대다수의 리뷰가 로맨스 영화 혹은 뮤지컬 영화로서 감상평을 쓰셨더라구요.
미아와 세바스찬의 관계나 꿈과 현실의 간격에 대한 서사도 물론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아도 세바스판도 아닌 LA라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감독은 LA가 담고있는 그 안에 사람들, 그 사람들의 관계들, 그리고 헐리우드라는 거대한 장치에 대한 뻔한 이야기를 굳이 다시 늘어 놓고 관객과 같이 쓴웃음을 지으며 돌이켜 보고 싶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같이 이 영화를 본 친구는 영화 안에서 너무나 산적해있는 클리쉐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며, 표값이 아깝다고 하더라구요.
맞습니다. 이 영화는 클리쉐로 가득합니다. 일단 여주인공 미아는 영화 배우가 되길 꿈꾸는 아가씨입니다. 남주인공 세바스찬은 실패한 음악가죠. 당장 헐리우드나 LA 다운타운에 있는 아무 바에만 들어가도 주인공 같은 사람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한 인물입니다. 더러운 인상만 남긴 첫만남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 자꾸 마주치다 나중엔 모든걸 다 던지고 달려갈 정도로 사랑에 빠지는 연인의 이야기도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이미 너무 많이 사용된 클리쉐죠. 심지어 주인공들이 타고 다니는 차 마져도 클리쉐입니다. 하이브리드를 타는 배우지망생과 고물과 빈티지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캐딜락을 타는 재스 피아니스트.
조금 더 클리쉐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요. 농담 반 진담 반, LA에서는 작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자기 노트북 안에는 (특히 사과 로고가 그려진 것이라면 특히) 미완성의 원고가 있다고 하죠. 줄줄히 오디션에서 떨어진 미아가 연극 극본을 쓰는 장면에서, 피식 웃음이 나더라구요. 또 다른 실패한 여배우 지망생의 클리쉐죠.
장소 역시 그렇습니다. 오프닝의 꽉 막힌 고속도로는 LA의 시그니쳐 같은 겁니다. LA traffic이라는 표현도 있죠. 그리피스 천문대 역시 그렇습니다. LA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중에서 이곳에서 찍은 신 하나 없는 영화는 드물겁니다. 특히나 해질녁이면 배경으로는 아주 단골입니다. 영화 후반 낮에 두 주인공이 그리피스 천문대 바로 밑에서 이야길 나누다 미아가 그러죠, '낮에 온 건 처음이네.' 영화 안의 인위적 클리쉐를 스스로 비웃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바스찬과 미아가 재즈바에서 마주쳤을 때, 세바스찬의 연주와 함께 보여지는 대체 회상신에선 정말 로맨스 영화의 뻔한 장면들을 줄줄히 늘어 놓습니다. 물론 음악과 춤, 영상적 장치로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으나 그 안의 서사엔 새로울게 없죠. 그 회상이 끝나고 세바스찬의 표정은 허탈하기만 합니다. 헐리우드적인 그 상상 속의 장면들은 아름답고 행복하지만, 허무한겁니다. 단지 상상일 뿐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건 오픈닝과 대구하고 있습니다. 오프닝과 엔딩 모두 의도적으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거칠게 맞닥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대비에서 오는 이질감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강제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느꼈던 불편함은 이런 부분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왠지 옛날 에바 극장판 중간에 관객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 넣었던게 생각나는건..)
결국 감독은 제목과 연결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LA에 오면 라라노래만 부르고 살 수 있을거 같지?'
+ 덧
미아와 세바스찬의 관계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죠. 그 둘은 거울 관계라고 생각해요. 미아는 현실 - 꿈 - 현실, 세바스찬은 꿈 - 현실 - 꿈 순으로 서로를 반대로 비추고 있죠.
영화 초반에 미아는 계속되는 오디션 낙방에 낙심하다 데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명하고 힘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들을 쫓아 파티에 갑니다. 몹시 현실적인 결정입니다. 하지만 파티는 지루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차까지 견인 당하죠. 꿈보단 현실을 택했는데 그나마의 현실도 냉혹하기만 합니다. 그때 우연히 피아노 소리에 이끌린 미아는 식당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연주를 하는 세바스찬을 다시 마주칩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반항하는 세바스찬을 미아는 동경하게되고, 동시에 현실적 결정이 맞는 것인가 고민을 시작합니다. 미아의 고민은 또 한번의 엉망인 오디션, 자신과 맞지 않는 기존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되고, 결국 세바스찬을 향해 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뛰어가며 현실에서 꿈으로 변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바스찬의 꿈은 굴욕스러운 일거리, 옛 동료와의 재회, 미아와 미아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 등으로 마모되어가고, 결국 세바스찬은 옛 동료와 다시 일을 시작하며 현실적으로 변화됩니다. 미아가 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뛰어가며 현실에서 꿈으로 이동했다면, 세바스찬은 미아의 방 천장에 얼룩을 통해 현실로 이동합니다.
그 뒤 미아는 연극의 실패로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세바스찬은 사진 촬영으로 미아의 연극에 불참하고 그로인해 미아를 잃으면서 현실에서 다시 꿈으로 회귀합니다. 미아는 결국 배우로 성공했기 때문에 꿈을 이룬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아의 성공적인 오디션 이후 세바스찬과 둘의 관계에 대한 대화를 보면 결국 미아는 현실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미아는 파리에 가야하고, 이 둘도 없는 기회를 잡기 위해선 일에만 집중해야 하니까요.
영화적 장치겠지만,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미아도 세바스찬도 기대하지 않던 운이 작용한 것 역시 재미있습니다. 세바스찬이 처음 옛동료를 만나러 갔을 때 매주 천불씩 받고 다른 공연 수익도 배분해 주겠단 이야기를 들은 세바스찬의 표정과, 오디션 장에서 파리에서 극본을 같이 작업하겠단 이야기를 들은 미아의 표정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LA는 사실 계절이란게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사시사철 별 변화 없이 화창하기만하죠. 하지만 감독은 계절을 굳이 이야기합니다. 전 그게 계절이 매년 반복되듯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LA 속 인간 군상에 대한 감독의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맨 마지막 서로를 응사하는 미아와 세바스찬의 미묘한 그 표정은 그 끝나지 않는 현실과 꿈 사이의 방황을 서로와 스스로에게서 확인하며, 끝나지 않는 꼬리잡기의 허망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