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이가 바들바들 팔뚝을 흔드는 통에 취재에 방해가 되었다.
할머니와의 대화는 원을 그렸다. 질문에 대한 답은 커녕
저의를 벗어난 대답들은 동문서답에 서문동답을 반복했다.
인터뷰다운 인터뷰는 끝끝내 이루어지질 못했다.
"할머니, 김성규씨 어릴 적 모습은 알고 계세요?" 말을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뒤를 돌아섰다. 대꾸도 없는 할머니에게 치매가 든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할머니가 향나무 언덕의 완만한 길을 내려가자,
사방 풀잎들이 바스락거리며 요란스럽게 떨어댔다.
키 작은 풀들이 정신 사납게 흔들리자, 지연이는 팔뚝을 쥐고있던
손에 꾹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살을 꼬집어 왔다.
"야! 씨, 그런 걸 믿냐? 강아지 새끼마냥 발발 떨래! 형 있으니까, 겁먹을 거 없어."
"선배, 그게 아니구요."
지연이가 대답함과 동시에 입에서 희뿌연 김자락이 피었다.
한 겨울에나 볼 수 있는 짙은 흰연기는 꾸물꾸물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무리 아침나절이라 하나, 봄이었다.
심지어 근 한 시간을 걸었기에 몸에선 미지근한 열기가 돌아야 정상이었다.
지연이가 이를 앙 다물고 한파 속에 파묻힌 사람처럼 헛바람을 연거푸 내뱉었다.
그 때마다 현실감과 동 떨어지는 연기가 한 덩이씩 토해지고 있었다.
"저 추워요. 선배."
"너 무슨 소리…."
내 얼굴을 바라보고 말한 지연이의 입김이 겨울밤 내내 밖에서 얼어붙었던 서슬과 같았다.
지연이가 잠깐 뱉어낸 입김이 얼굴에 날아들자, 꽃샘추위 칼바람을 쐰 것처럼 왼뺨이 얼얼하게 굳어갔다.
지연이가 이를 달달 떨자, 이빨이 부딪히며 반복적인 탁음이 속도감 있게 들려왔다.
"야, 너 괜찮아?"
"선배. 저 추워요."
지연이의 초점이 명확하질 않았다.
풀려있는 동공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지연이의 흐리멍텅한 눈빛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야! 너 업혀!"
"아, 싫어요."
"왜 싫어 인마!? 업혀!"
날시 탓이고 나발이고 병원부터 가봐야했다.
도시생활만 했던 여자아이가 나와 섞여 풀숲을 쏘다녔으니,
이상한 균에 전염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향나무를 비비적대던 것도 괜히 머릿속을 스쳤다.
"싫어요."
"왜! 춥다며!"
"가슴 닿잖아…."
이 상황에 가슴 같은 소리를, 그럼 진짜 공주처럼 안고 가리?
지연이의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녀석을 들춰 업었다.
“아, 진짜. 선배 잠깐만, 잠깐만 내려줘요. 선배, 저 내려줘요.”
“헛소리 할 생각하지마. 형도 인내심에 커트라인 있어.”
때를 쓰는 목소리가 귀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냉랭한 입 바람이 뒷목을 스치며,
일순 허리에서 가슴까지 경련이 한 차례 타고 올라왔다.
더 심각한 것은 지연이와 맞닿은 등이었다.
얼음장을 들춰 맨 듯 등이 시려 따끔거리는 통증이 들었다.
지연일 업고 10분 쯤, 달리듯 걷듯 발을 옮겼을까.
담장 길에 카메라와 녹음기를 떨궈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지연이가 아픈 와중이었지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혹여 다른 사람이 주워간다면, 몇 백 만원어치의 기재가 한 방에 날아가는 것이었다.
발길을 돌려 기재를 주워 와야 하나, 등 뒤를 돌아보니
향나무 담장이 멀게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발이 동동 굴렀다.
등에 업혀있는 지연이의 냉기가 등을 계속해 따갑게 만들어
이제는 등에 마비증세가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씨발, 훔쳐가만 해봐, 어떤 새끼든 진짜.”
계속 걸어야 했다. 사람 목숨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 나를 달래며 젖먹던 힘을 다했다.
지연이를 병원에 바래다 주고, 쏜살같이 돌아와야만 한다.
속으로는 그 생각뿐이었다.
필사적인 수 십 분여가 지나 마을 회관으로 접어드는 어귀,
심장이 토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리 여자라지만 등에
매고 뛰기엔 내 체력이 너무 저질스러웠다.
숨을 몰아 쉴 때마다 가슴에 격한 통증과 구토증세가 밀려왔다.
입과 입술이 바싹 말라, 한 모금 삼킬 침조차 부족했다.
땀이 비 오듯 내려야 정상이었으나, 등에서 찬 기운을 펄펄 풍기는
지연이 덕에 땀도 별반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회관 앞으로 도착했을 땐, 눈앞이 하얗게 번져버렸다.
분명 회관 앞에 주차 되어있어야 할 내 승용차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지연이 다리를 꼬아 쥐고 있는 오른손을 뻗어 주머니를 확인하니
뾰족하고 딱딱한 감촉이 허벅지에 느껴졌다.
분명 자동차 키는 나에게 있었다.
견인?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마을 회관 앞길이라고 견인을 해갔다고? 이 산동네에서?
여러 생각이 겹쳐 떠오르자, 머릿속은
십 중 추돌 사고가 일어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움직여야 하는가.
지연이는 송장처럼 차갑게 굳어만 가고 있었다.
수 백 만원 어치 기재는 저 멀리 땅바닥에 때굴때굴 구르고,
이 망할 놈의 승용차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연이를 받치고 있는 팔 근육이
한계를 맞이했다며 서서히 힘을 풀어가고 있었다.
입술을 적시려 내밀은 혀에는 고린내 풍기는 마른 침만 남아 끈적거렸다.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을.
- 4부 끝 5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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