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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겁먹게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편 가르기를 통한 분열을 두려워한다. 정녕 분열은 두려운 것일까?
편 가르기에 대한 공포와 연관된 가장 오랜 잠언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를 양립되는 이미지, 이분된 세계의 이미지로 바라본다. 이보다 더 발전된 이미지는 다양한 중도층을 거느리고 양편에 형성된 보수와 진보의 이미지다.
많은 이들이 보수를 현상의 유지하고, 기존 체제를 신뢰하며, 안전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말한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란 어떤 집단이란 이름의 실체이기보다 일정한 힘을 확보하고자 하는 운동에 가깝다. 이 운동을 만들어내는 욕망은 ‘정주定住’, 곧 정착하는 것, 자리잡고 뿌리내리고자하는 것의 욕망이다. 보수의 실체는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 낫다. 많은 이들의 고민하는 고리타분하고 완고해보이는 할아버지의 이미지와 달리 보수는 놀라우리만큼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들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붙잡으려 하는데 있어 그 창조성을 발휘한다. 이들은 불안을 창조하고, 집착을 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탈자들을 자기들로 통합시킨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일견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말에서 광장 안의 시민들이 격렬한 다툼으로 분열되는 광경을 상상한다. 민주당이 분당하고, 분당된 당이 더 갈라지고, 모든 것이 자잘하게 갈려져 나가는 상황에서 리바이어썬이 된 보수가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상상한다. 온갖 단체를 해체시키고 잘개 갈라진 언론을 통폐합시키고, 계엄령으로 해체된 개인을 집어삼켜버렸던 독재 시대, 절대주의의 괴물을 상상한다. 그런 점에서라면 이 잠언은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뒤쫓는다.
단언컨대 이는 실체없는 망령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가 ‘정주’의 움직임이라면 진보란 실은 이탈의 욕망이다. 열차 밖으로 튀어나가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라는 것은 보수가 창조해낸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히려 ‘분열’이야말로 진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정주’된 세계로부터의 이탈, 대안의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보수의 맞은 편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공포가 지배당하는 게임 속에서 촛불시위의 승리를 낙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촛불 시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연대는 의미깊다. 그럼에도 보수는 창조를 거듭하고 있다. 이번 보수정권의 창조는 지난 정권보다 더욱 위협적이다. 노골적이리만치 부도덕하고 부패한 행위들, 국정감사에 대한 선거거부라는 파렴치함에 많은 이들이 이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이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은 이러한 부도덕, 부패가 마치 자신들이 원래 가져야할 일부이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머릿속에 ‘그들은 원래 그렇지.’라는 말로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라면 촛불시위 역시 그리 멀리 나아가지 않고 있다. 시위가 어느덧 일상의 일부처럼 들어와있는 것은 위험의 징조다. 지난 정권의 촛불시위에서 가장 상징적이었던 순간은 명박산성이었다. 이 비일상적이고 적극적인 조치야 말로 이 상황이 ‘비정상’임을 정부가 인정했던 순간이며, 그러기에 어떤 사건보다 상징적으로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촛불시위는 이와는 반대다. 그 어떤 규모, 어떤 형태의 시위에서도 촛불시위는 마치 하투처럼 이 맘때 벌어지는 일상적인 행사의 일부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촛불시위를 이끌어낸 이탈의 욕망이 서서히 보수에 의해 그 자리에 뿌리내려지는, 그래서 보수의 일부로 잠식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이끌어내고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연대의 방법에 질문해야 한다. 연대는 소중하다. 하지만 연대만큼 소중한 것은 분열이다. 분열은 언제나 이탈의 씨앗을 낳고 이탈의 씨앗이 변화를 싹틔운다. 정착과 고정의 욕망에 대항하기 위한 것은 무규정된 운동 뿐이다. 통제된 질서 속에서 통제된 법률 속에서 지정된 형태로의 시위는 이 모든 행위를 거대한 쇼로 정착시킬 것이다. 난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란 말에 단호히 반대한다. ‘깨어있는’의 조건이 특정 규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시위를 참여하거나, 혹은 시위를 참여하지 않거나, 혹은 시위를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단지 또 다른 형태의 정착을 위한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싸움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음 정권에서 보게 될 것은 보수화된 민주당이거나, 정착한 안철수, 문재인 이상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분열해야 한다. 당장에라도 산산히 흩어져 그 형체를 알 수 없을만큼 분열해야 한다. 갈등이 혼재하고 당장에라도 폭발할 수 있는 분열의 한계에 가까운 형태에서 이루어진 연대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연대다. 더, 더, 더 많은 사람을 이라고 외치는 연대가 아닌. 다르게, 다르게, 다른 방법으로 라고 외치는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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