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곧잘 보이는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한번 글을 쓰겠다 벼르고 있었습니다.
근데 하필 필 받은게..
점심시간 끝난 직후더라구요.
그래서,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 이런 부분은 눈쌀을 찌푸릴 수도 있겠다."하는 부분이
더러 있기는 허나.
"싸우자!!"는 의미로 쓴 글이 아니니깐,
아량 넓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반대 누르셔도 되고, 반박하셔도 돼요.
다수의 인정을 받고자 쓴 글이 아니라,
소수의 입장을 두둔해서 쓴 글이니깐요.
허나, 욕은 지양하도록 합시다~ ^^
피에스: 반말 죄송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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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찬성을 받으면 두각이 되고 인정을 받으며,
많은 반대를 받으면 블럭이 되고 비난을 받는 시스템.
현재와 같은 형식 속에서 다수결이라는 힘의 논리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러한 시스템을 채택한 공간안에서는 흔히 보이는 모습이 있다.
칭찬이나 추천을 받고자 하면
다수가 수긍할만한 어조와 논제를 보이고자 하고,
소신의 발언이나 혹은 반대하는 발언에 대해서는
즉각 처분이 내려지는 모습.
다수의 동의는 곧 정답이며, 동시에 힘이 되고.
그러한 힘을 휘두르는 것은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
즉, 일종의 힘의 논리인 것이다.
그로서
소수의 소신은 소외, 다수의 동조는 동지가 되기 쉬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왜 그런 것일까?
1.
소수의 소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지적당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라는 한마디를 함에 대해서도 몇번 오해를 받을까 수정을 할 가능성이 크지만,
다수의 동조에 포함되는 사람은
조그만 실수라도 말 그대로 "묻어가는" 양상을 보이기에 쉽게 의사를 표현할 힘을 누리게 된다.
즉, 다수가 바라보는 소수와 소수가 바라보는 다수는 애초에 시작부터 판이하게 다른 조건 속에서
의사표현을 할 기회를 갖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하여
반대 발언을 했음에도 인정을 받는 부분도 있지 않는가 되묻는다면, 간단히 생각해보면 될 문제다.
발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월등하게 많았던 경우이다.
물론, 이 글의 주제는 "어느 쪽이 정답인가."의 문제가 아닌, "다수결의 정의와 힘의 논리"를 비판하는 내용이므로,
어느 쪽으로 뒤엎든간에 같은 맥락이다.)
2.
중도의 입장이거나 혹은 확실하게 의견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마저
다수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과정으로의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최초로 주어지는 선택의 전제조건은 사실상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굳이 소신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소신을 지킨다 하면 존재 자체가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배제만 될까. 상황에 따라서,
트러블메이커, 혹은 심하게 분란종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함에 대하여 반대를 할 것인가?"
3.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소신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더 날카로운 비수를 들기 마련이다.
"나도 분위기 따라가는데, 니가 뭐라고 반발을 해?"
와 같은 생각에서 시작되며,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고착 상태, 그리고 합리화를 위한 성향이다.
이렇게 말하면, 해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으나,
정치권에서 이슈가 되는 "콘크리트 지지층"과 같은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이 만들어온 역사에 대하여, 스스로 반발을 하게되면
그 자신의 인생을 부정을 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 생기므로 결국 옳다는 경질된 신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정상 할 말은 많지만,
글이 길어지면 피곤하기에 생략을 하고 말을 잇는다면.
이러한 문화들 속에서
사람들은 그토록이나 반발하고, 또 거부해오던
힘의 논리에 대하여, 어느 순간부터 동조를 하고
또 자연스럽게 행하게 되어간다.
"선생님 말씀이니깐,"
"부모님 말씀이니깐,"
"어른이 하는 말이니깐,"
"국민은 정치하는 사람을,"
이러한 성향의 말에 대해서 억한 심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다수의 말이니깐,"
의 경우에는 엄연히 다른 경우로 나눌 수 있을까?
또한 만약 /*else if(*/, 그로서 부당한 피해를 받는 사람이 생기거나,
혹은 옳지 않은 길로 향하였을 때에는
그러면 누가 책임을 질까?
하는 부분도 생각을 해보았으면 한다.
"나만 말한게 아니잖아."
"아니면 말고."
혹은 조용히 묻어가는 모습.
(업무 시간이므로 아무튼 생략~~)
되돌아보면 사실.
스스로 싫어했던 사람들의 행동과
매우 흡사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하다고,
다수결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본이 되어야 할 전제조건 중에 하나가 빠졌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자 하버마스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에서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는데.
아주 쉽고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경험한 것은
온연히 "나"의 범위에 종속이 되는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만물의 이치도 아니고,
내가 느끼는 것이 모든 이의 공감대도 아니고,
내가 경험한 것이 세상 모든 사건과 사고를 포함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로서 이루어지는 행동방침, 혹은 신념에 대하여서는.
오로지 "나"의 범위 안에서의 정답인 것이다.
물론, 같은 생각을 하여 납득을 하거나,
같은 마음이 들어 공감을 하거나,
혹은 이타심에 의해서 이해를 할 수도 있을지언정,
서로가 인정하고 이해하는 범위가 겹칠 뿐.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 입장에서 옳은 말이 학생 입장에까지 일치할 수 없듯이.
혹은 부모님, 혹은 연인, 혹은 배우자, 혹은 친구, 등등.
상호간에 다른 가치관, 신념체계, 행동방식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다수가 따르는 쪽이 보다 옳은 쪽이 아니냐."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정답에 가까운 종교는 아마 가장 많은 신도를 거닐고 있는 기독교가 아닐까.
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에 가깝단 것이다.
나머지를 이단이라 외치면, 소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면,
수의 논리에 기준을 잡아도 할 말은 없겠다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논점으로 돌아오자면,
내가 인정을 받고 싶은 만큼,
다른 그 누군가도 분명하게 인정, 이해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삭막한 시대에,
자신의 의미를, 혹은 자긍심을 상실하고.
인정도 이해도 못받고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에.
내가 먼저 그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그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것이
그렇게 손해보는 것은 아니잖은가.
더군다나,
소수라는 이유에서 핍박받는 소신에 있어서는.
적어도, 다수 사이에서 조그만 목소리를 내는 용기만으로도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