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아주 어릴적에 외할머니는 일명 "미국 아줌마"라는 별명이 있었답니다. 무슨 일을 하셨는진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외할머니는 겉치장에 굉장히 신경쓰는 분이었죠. 외할아버지가 당시 수입이 매우 좋으셨고, 외할머니 집의 안방은 자개 가구로 채워졌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외할머니 댁에 정말 자주 갔었어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외할머니의 자개 화장대에는 신기한 향수들과 화장품이 가득했습니다. 초록색 립스틱이 빨갛게 발색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고, 사람 몸통 모양 향수 바틀은 자꾸 만지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외할머니는 왜 그렇게 새빨간 매니큐어를 모으셨는지 몰라요. 덕분에 제 짧은 손톱에 무한으로 바르고 지우고 할 수 있었어요. 손녀딸이 화장대를 뒤지는 걸 너그러이 봐주셨지만, 역시 화장품 탐색은 외할머니가 시장에 나가셨을 때 해야 더 재밌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그니처 향수였던 랑콤 트레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병도 예쁘고 외할머니 품에서 나는 달콤하고 포근한 향이 참 좋았습니다. 외할머니는 더이상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으시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분입니다. 외할머니 피부와 살은 할머니 특유의 말랑망랑한 촉감으로 변하였어도 취향만큼은 여전하십니다. 제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최근 향수는 불가리 인칸토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외할머니의 취향이 저랑은 완전 다르긴 하지만, 가끔 향수 코너에서 트레조나 인칸토를 일부러 시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외할머니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아~ 울 할미 향이다!" 이 느낌이 정말 좋아요.
2. 울 엄니는 인상이 매우 뚜렸한 분입니다. 외모도 서구적으로 생기셨고, 살짝 꾸미기만 해도 매우 화려해 보입니다. 제가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가 딸기 우유색 립스틱에 어두운 파랑색 원피스를 입었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그때 유행이던 사자머리도! 엄마가 너무 예뻐서 제가 자꾸 쳐다봤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엄마는 요즘 말로 뱀피(Vampy) 립스틱을 애용하셨습니다. 엄마가 예쁘면서도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 "엄마 루즈가 뱀파이어 백작 부인 같아요!"라고 놀렸던 기억이 나요. 유행이 돌고 돈다는 게 마구 와닿습니다.
엄마는 주로 수입 상가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판매하는 외제 화장품을 사용하셨습니다. 당시에 액체 파운데이션이 드물었나? 그랬던 것 같아요. 투웨이케익이 많았던 것 같는 느낌 적인 느낌이 듭니다. 정말 유명한 코티 루스 파우더와 캡슐에 에센스 같은 게 들어있는 기초 화장품, 검은색 팔렛에 색색별로 나열된 립팟, 아이섀도우, 파우더. 정말 생생히 기억나네요. 제가 초등학생 때까진 아빠가 일하시는 회사의 가족모임이 매우 잦았고, 엄마가 멋지게 꾸미는 모습을 자주 구경할 수 있었어요. 지금에서야 컨투어링이 뭔지 알았지, 그때 당시에는 엄마가 왜 피부보다 어두운 색을 열굴 옆면에 칠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한결같은 엄마의 갈매기 눈썹을 볼 때면 엄마는 왜 화나보이는 화장을 할까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ㅋㅋㅋ
엄마의 시그니쳐 향수는 버버리 우먼입니다. 워낙 자주 사용하셔서 테스터 사이즈를 찾아다니면서 구하셨던 기억이 나요. 제 코가 정말 예민해서 방향제, 향수, 향초 이런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엄마에게서 풍기는 진한 머스크향이 정말 고풍스럽고 우아했어요. 여름에는 다양한 향수를 사용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 제 향수들을 보면 확실히 엄마의 취향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3. 제가 중학생일 당시에 미샤가 생겼습니다. 3300원 화장품, 포장용기를 간단하게 하여 가격을 줄였다는 홍보를하며 마구 성장했죠. 처음으로 엄마를 따라 시내에 있는 미샤 매장에 갔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나요. (인천 부평역 나인티나인 피자집 근처! 이러면 아시는 분이 나올지도!!) 프로모션으로 3만원 이상 구매하면 미샤 꽃 모양 거울을 줬던 것 같아요. 저는 상당히 털털한 녀석이었고 톰보이 느낌이 진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이란 걸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엄마는 사춘기 소녀에게 잠재된 그 무언가를 만족시켜주고 싶었나봅니다. 트러블 전용 기초, 팟 립그로즈, 마스카라, 투명 파우더팩트, 매니큐어 등을 사주셨어요. 그리고는 색조는 학교갈 때를 제외하고 맘껏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엄마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했습니다. 학교에 갈때는 화장하지 않았어요. 아, 중3 때 연한 매니큐어를 칠하고 간적이 있었네요. 하필 그날 선도부 선생님이 기습 검사(?)를 하는 날이었고, 저는 그때 반장이어서 더 많이 혼났습니다. 손톱 바로 윗 부분을 북채로 맞았어요 ㅋㅋㅋ 중3 때는 립글로즈랑 팩트를 가방에 가지고 다녔어요. (엄마 말을 안 들음ㅋㅋ 아 반에 좋아하던 애가 있어서 이뻐보이고 싶었나봐요) 대놓고는 못 하니 화장실에 가서 몰래 바르고 오곤 했죠. 당시에 써클렌즈가 대유행이었지만 저는 렌즈에 크게 관심 없었어요. 반 여자애들의 반 이상은 "동공풀린 눈"으로 수업을 들었습니다.ㅋㅋㅋ 아우 너무 인위적인 그 느낌 ㅋㅋㅋㅋ
고등학생이 되어서 피부는 더 많은 여드름으로 덮혔고 살도 엄청 쪘습니다. 제 고딩 시절은 암흑기였고, 모든걸 놔버린 시기였어요. 외모를 꾸준히 관리하던 일부 반 친구들은 학교에서 적어도 한번 이상 세안을 하였고, 클린앤클리어 훼어니스와 니베아 빨간색 립밤을 기본 중의 기본템이었죠. 저는 그것도 안 했네요 ㅋㅋㅋㅋ 엄마가 안 챙겨주신 것도 아니였어요. 그냥 제가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뚝 떨어진 거죠. 고등 졸업사진도 걍 맨얼굴로 찍었습니다. 근데 또 웃긴 건 중딩 때부터 코스모폴리탄 같은 패션 잡지는 꾸준히 봤습죠. 스크랩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온갖 브랜드에 대한 정보는 꿰차고 있었어요. 이런 아이러니.
수능을 마친 후부턴 엄마가 마구 챙겨주셨어요. 백화점에 입점된 브랜드 중에 브루조아가 딱이었죠. 처음으로 메이크업 베이스, 파운데이션, 애플리케이터로 바르는 립 글로즈, 아이섀도우 등등 본격 색조를 접하게 됩니다. 트러블 피부였기 때문에 메이크업 베이스는 초록색이었어요. 양을 조절할 줄 몰라 그 당시 화장은 정말 못 봐줄 정도로 흐~~~옇습니다.
수능 후부터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해 겨울까지는 제 화장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임과 동시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몇몇 장면들을 남긴 기간이었어요. 피부표현을 너무 두껍고 부분 뭉치기까지 해서 동기가 "아토피냐?"고 물은 적도 있었고, 눈썹 색을 못 맞춰서 빨간 눈썹을 하고 수업에 들어간 적도 있답니다. 블러셔 양과 위치 조절을 못 해서 방금 달아오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동기들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죠 ㅋㅋㅋ
저는 엄마랑 화장품 쇼핑할 때가 정말 즐거웠어요. (물론 엄마 찬스가 가장 좋은 부분ㅋㅋㅋ) 친구들보다 공정한 눈으로 평가해주셨고 엄마 근처에 있으면 지름 자제 버프가 생겼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엄마랑 꼭 로드샵 쇼핑해야겠어요!!!! 캬캬캬캬!
:)
서른이 다 되어가면서, 이제야 내 얼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것 같아요. 물론 여드름드름하던 기름진 피부는 급건조해졌고 (나이드는 걸 매일 느껴요 ㅠㅠ) 목 주름 겉잡을 수 없이 깊어졌지만 ㅋㅋㅋ 뷰게를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가 화장에 이렇게 열정적일 수 있다는 걸 깨우쳐줬어요. 그냥 제 이야기를 한번 쓰고 싶었어요. 오늘 괜히 옛날 생각이 스믈스믈 떠오르기도 했고요.
뷰징들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공감하는 부분은 어딘지, 또 저보다 어린 세대에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일 해야겠어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