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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의 본질 (36)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과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1]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이후, 1813년부터 1907년까지 거의 100년간에 걸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영국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방어전략을 이야기합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이 영국을 대신하여 러시아를 막는 역할을 맡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대륙 진출 욕구와 맞물리면서 조선이 힘없이 일본의 손에 떨어지는 비극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도 영국이 주도하던 그레이트 게임에서 하나의 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처도 아주 미숙했습니다.
[2] 지금 상황이 100여년 전 영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그레이트 게임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벌어지는 듯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 각국을 말로 삼아 게임을 벌였다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인근 나라들을 말로 삼아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100여년 전에도 국제 정세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듯이, 지금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3]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사라진 후, 유럽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강국으로 떠오릅니다. 초기에는 영국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영국이 1858년에 인도를 합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급변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왕관 속의 보석” (the Jewel in the Crown)이라고 묘사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왕관이라 함은 당연히 대영제국 황제의 왕관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영국은 인도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인도가 영국 부(富)의 원천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면직물 산업이 번창하던 시기였는데, 인도는 면직물 제조에 필수적인 목화의 대량 공급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어떤 경우에도 인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4] 그런데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인도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북쪽에 위치한 나라로, 겨울철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했습니다. 1800년대 후반 강대국은 강력한 해군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시 강대국의 기본 조건은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부동항의 확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대륙에서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해군력을 확대하고 싶어 했던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려고 했고, 이러한 의도는 남하정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러시아가 해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북해의 발트 함대(Baltic Fleet)가 있었고, 극동지역에 극동함대(Far East Fleet)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 경제는 인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던 두 개의 함대는 모두 경제 중심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5]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전략의 첫 번째 목표는 흑해였습니다. 당시 오토만 제국(the Ottoman Empire)의 힘이 약해지던 상황이었는데,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1853년 오토만 제국을 침범합니다. 이 전쟁이 바로 나이팅게일이 크게 활약했던 ‘크림전쟁’(the Crimean War)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하나씩 침략하게 됩니다. 그리고 1885년 3월 30일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던 아프카니스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파키스탄만 점령당하면 바로 인도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6] 러시아의 아프카니스탄 점령 소식은 4월 7일이 영국에 전해집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영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아프카니스탄 점령을, 인도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 확보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영국 증시에서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영국 정부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준비하고, 인도에서도 병력이 소집되면서 실질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7] 영국 해군은 곧바로 러시아 함대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함과 동시에, 조선의 거문도를 4월 15일에 점령하게 됩니다. 영국이 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84-5년 사이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됐던 ‘조·러 비밀협약’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는 청나라가 대원군을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입니다. 대신, 러시아는 거문도를 러시아 해군의 석탄보급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해군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위치에 석탄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거문도는 지정학적으로 석탄보급기지를 만들기에 아주 적당한 위치에 있었고, 거문도가 가진 이런 지정학적 중요도를 잘 알고 있던 러시아가 거문도의 사용 허가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바로 함정을 보내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8] 하지만 아프카니스탄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지던 긴장은 1887년 양국이 외교적으로 아프카니스탄 국경을 설정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해소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은 같은 해 2월 15일 거문도에서도 철수하게 됩니다.
[9] 흑해와 중앙아시아를 통한 남하정책이 영국에 의해 막히자, 러시아는 이제 극동 아시아지역을 통한 남하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된 지역이 바로 만주(Manchuria)와 한반도입니다. 아시아를 통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1888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으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 아시아로 물자와 장비를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에게는 의미가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10] 그 사이 일본은 당시 국제사회의 예상과 달리,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에 걸쳐 일어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일본은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의 요동반도를 확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륙 진출을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러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해, 요동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합니다. 러시아 하나로도 대처하기가 벅찬데 프랑스와 독일이 연합해 요구하자, 일본은 결국 5월 5일에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11] 이 삼국간섭에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일본은 조선 측 여러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저지릅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국내의 시각으로 보면, 한 나라의 황후를 암살한 말도 안 되는 사건이지만, 국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의 커다란 게임 속에서 파생된 작은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조선측 협조자 가운데, 우범선(禹範善)이라는 고위 관료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후에 대한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우장춘 박사는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내에 들어와 국내 육종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죠.)
[12] 흑해와 중앙아시아를 통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영국은, 아시아에서의 남하도 막아낼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이 찾아낸 방안은 바로 일본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02년 1월 30일, 영국은 일본과 동맹협정을 맺습니다. 이 협정을 통해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군함의 설계도와 건조방법 등도 일본에 넘깁니다. 그리고 일본을 움직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막기 시작합니다. 당시 러시아 남하정책의 핵심은 만주와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는 것이었고, 일본의 대륙 진출 정책의 핵심 역시 한반도와 만주를 확보하는 방안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 그러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각종 제안이 오갑니다. 대동강과 원산을 기점으로 하는 북위 39도 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해 점령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고, 만주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한반도는 일본이 점령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1년 러시아는 한반도를 중립화하자는 제안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만주도 중립화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던 중 1903년 7월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습니다. 한반도의 39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일본의 특수이익을 인정할 테니까, 그 대신 39도선 북쪽은 중립화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1904년 2월 4일 협상 중지를 선언합니다.
[14] 협상이 중단되자, 1904년 2월 4일 여순항(Port Arthur)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바로 해군을 움직여 2월 8일 여순항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 함대를 여순항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합니다. 러일 전쟁(Russo-Japan War)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은 여순항을 봉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순항 안으로 진입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육지를 통해 여순항을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04년 12월 5일 일본은 마침내 육지의 요지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바로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파합니다.
[15] 당황한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긴급 아시아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당시 석탄으로 함정을 움직이던 시기라 함대가 장거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원활한 석탄 보급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에즈 운하와 주요 보급로를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4년 10월 14일에 발트해를 떠난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220일만에 아시아에 도착합니다. 프랑스 령이었던 인도차이나의 반퐁항에 일단 정박하지만 이곳에서도 충분한 보급을 받지 못합니다. 중국의 여순항이 여전히 러시아의 손에 있었다면, 여순항에서 부족한 석탄과 물품을 받으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여순항은 이미 일본의 손에 떨어진 뒤였습니다. 따라서 대서양과 인도양을 거쳐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러시아 함대가 갈 수 있는 곳은 블라디보스톡밖에 없었습니다.
[16]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지나쳐 가야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세 가지 경로를 두고 고민하던 러시아함대는 가장 가까운 경로인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통해 가는 방안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1905년 5월 17일 러시아함대는 반퐁항에서 대한해협을 향해 출발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던 일본 함대는 5월 27일 새벽 대한해협에서 러시아함대를 발견하고는 추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시 55분, 마침내 일본 함대에 공격 명령이 떨어집니다. 연료 부족과 오랜 항해에 지쳐있던 러시아함대는 일본함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습니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의 예측을 깨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로써 러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7] 전쟁이 끝나자 영국 측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일본 편에 섰던 미국이 협상 중재자로 나섭니다. 이 협상은 1905년 9월 5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뉴햄프셔 주의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협상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입니다. 이 협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게 됩니다.
[18] 그리고 2년 뒤인 1907년 영러 협상(Anglo-Russian Entente)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에 걸친 중앙아시아의 세력 범위를 조약으로 확정하면서, 근 100여년을 끌어왔던 그레이트 게임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영국의 전략을 충실히 이행해,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보면, 일본도 결국은 그레이트 게임판 위의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고종은 미국이 끝까지 조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고종의 기대와 달리, 전혀 조선을 협상이나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각은 1905년 John Hay 국무장관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 정책에 개입할 수 없다. 한국은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주먹 한 번 못 날렸다.” (We cannot possibly interfere for the Koreans against Japan. They could not strike one blow in their own defense.)
그런데도 고종은 미국에 밀사를 보내 조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얼마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고종과 정치인들이 당시의 국제 정제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국제사회가 바라보던 한반도 상황입니다.
[20] 이후의 진행과정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에 대한 서명이 이루어지고, 같은 달 29일에 해당 조약이 정식 발효됩니다. 그리고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라 불리던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21] 이 시점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먼저, 그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1970년대 이후의 경제 발전의 기반에는 새로운 라운드의 그레이트 게임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당시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전 영국에 의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게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산화된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공산주의가 일본으로 확대되는 것 또한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은 다른 개도국들 사이에서 경제발전의 모범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했던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the Second Great Game)이 없었더라도, 과연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은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22] 다음으로, 지금 다시 새로운 라운드, 즉 세 번째 그레이트 게임(the Third Great Game)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번에도 막고자 하는 주체는 여전히 미국이지만, 그 대상은 공산주의에서 중국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영국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듯이, 다시 미국은 일본을 움직여 중국의 확장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는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만 하고 있습니다.
[23] 지금까지의 글을 모두 읽으신 분들은 일본이 온갖 수모에도 불구하고 왜 끝까지 친미 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큰 힘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고, 이 커다란 게임에서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일본이 독자적인 힘의 주체가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결국 어느 편엔가 서서 말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안보법 개정부터 자위대의 역할 확대 등 최근의 일본 움직임을 보면, 이런 결정을 확실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24] 첫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국은 희생양이 되었지만, 두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수혜자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번 세 번째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요. 희생양이 될까요, 아니면 수혜자가 될까요… 분명한 것은 이번 그레이트 게임에서도 우리나라는 하나의 아주 작은 말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일 겁니다.
출처 | https://vivitelaeti.wordpress.com/2015/09/11/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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