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관우가 나타나 조선을 도왔다?
<선조실록의 신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영화 천군 : 하늘의 군대>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임술) 9번째기사
......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경동(驚動)하여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그래서 수가(秀家)는 할 수 없이 남별궁(南別宮)으로 옮겼다.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의 영혼이 왕망(王莾)에게 위엄을 보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時, 宮闕盡爲焚燒, 倭大將平秀家, 率其衆, 入處宗廟, 每夜有神兵擊之, 賊輒驚駭, 以劍相擊殺, 多有喪明者, 亦多死者。 秀家不得已, 移屯南別宮。 此殆與漢高廟之靈, 示威於王莾無異也。]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1책 486면
<승정원 일기> "관공(관우)은 바람같은 신병의 도움을 주었고 "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 "관운장이모습을 바꿔 신병을 거느리니 .. "
<증보문헌비고> "임진,정유왜란에 관왕이 여러 번 그 위령을 나타내어 병신(兵神)으로서 싸움을 도운 때문이다. "
<연려실기술>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 주어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싸움, 홍산싸움 때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차지하니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곧이어 명나라 여송의 구원병이 들어 닥쳤다. 조명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되찾으려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왜군도 만만치 않게 버티니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수천의 신병이 나타나 왜병을 치는지라 마침내 빼앗겼던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날 칠흙같이 어두운 밤 신병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관운장.
아래 출처 : 임진록
때는 선조대왕 25년 어는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촌곤을 못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산에 위퐁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는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겨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돠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 ~ 8년이나 걸릴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테니 주저말고 시행하게."
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핑돌았다. 대왕은 조정의 백관과 더불어 방책을 논의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힘없는 조정은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임진왜란 때 관운장이 현몽한데로 선조 25년 4월 왜군 15만이 부산에 상륙하여 쳐들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인 것이다. 막아낼 재주가 없는 선조대왕은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가니 삼천리 강산은 초토화가 되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이 틈에 많은 보물과 문화재는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고 피난민들은 쫓기다 굶어죽은 자가 부기지수였다. 임진왜란이야 말로 개국 오천년 이래의 대참살전이었는데 자칫하면 국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에까지 다달았다. 선조대왕께서는 의주에서 사신을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총수로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는데 마침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전쟁은 가짜스로 끝이 났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간에 겪은 말할 수 없는 오욕과 회한과 비통과 수모를 어찌 다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관우의 현몽이요,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이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에 온 관우 동묘
- 보물 142호에 부쳐
혹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에 가보셨소. 거기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 곧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있소.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오. 관우현령(關羽顯靈)의 도움으로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1599년 현액(縣額)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34년(1601)에 완성한 것. 선조실록에는 건축비용, 군사동원 등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조선왕이 과연 여기 참례할 것인가의 논란도 적혀 있고, 그 뒤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도 참례한 것으로 되어 있소. 우리 것만 보아온 사람에겐 건축은 썩 낯서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며 검은 벽돌로 두텁게 쌓아올렸소. 정식 명칭은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좌우 현판은 사신 정룡(程龍)의 글씨 ‘만고충심(万古忠心)’ ‘천추의기(千秋義氣)’로 뚜렷하오. 목조로 된 관우상과 그 옆엔 아들 관평 등 부하 4인이 모셔져 있소. 또다른 명칭도 입구에 붙어 있소.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列武安聖帝廟)가 그것. 광무 6년(1902)에 우리나라에서 다시 붙인 명칭이오. 왕묘에서 ‘성제묘’로 격상되어 있지 않겠소. 이 사당 기둥과 추녀엔 명나라 흠차사신이라든가 청나라 제독 등 참배객의 현판들이 여럿 걸려 있소. 대명(大明) 만력(萬曆) 28년 경자 9월 길일(吉日)에 쓴 ‘충의관천(忠義貫天)’ ‘현성보번(顯聖保藩)’도 인상적이오. 관우의 현령으로 제후의 나라(조선)를 구했다는 것.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제묘를 건립하였는데 명나라 신종황제는 사신을 보내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후에 수많은 관왕묘에 이땅에 세워지게 되었고 극진한 대접과 공경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