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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 사건
♣ 개요
1966년 8월 8일,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들이 공군 비행학교를 습격한 사건.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희대의 병림픽.
술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 3명을 집단폭행했다가
그 상황을 알고 달려온 공군 장교들이 보복을 하자,
해병대 장교 128명이 집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공군 비행학교를 습격하였다.
여기까지만 쳐도 집단 근무지 이탈에 아군 기지를 습격한 대사건인데,
가관인 건 비전투병인 비행학교 장병 300명이 이들에게 맞서 오자
전투병이라는 해병대 장교들이 모랄빵 나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치고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와중에 익사하는 장교까지 생긴 것.
도시전설이 아니다.
진짜 이런 사건이 있었다.
♣ 사건 경위
- 7일 저녁 : 사건 발단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1966년 8월 7일 오후 7시 20분경,
부산 발 진해 행 마지막 버스인 경남 영228호가 비행학교 후문입구인 덕두 정유소에 정차했을 때,
그 차에 타고 있던 술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뒷문으로 승차하려던 공군장교 3명을 타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이다.
이에 다시 앞문으로 승차 하려던 공군장교들을 폭행했다.
- 7일 저녁 : 공군의 추격
사건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허도창 공군 상병이 비행학교에 알렸고,
분개한 조종학생 정성규 소위 등 16명의 장교들이 동교 309호 트럭을 타고 앞서간 전기버스를 추격했다.
결국 이들은 웅천에서 8명의 해병장교를 붙잡아 집단구타하고 되돌아 왔다.
- 8일 새벽 : 공군학교 습격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되게 커지기 시작했다.
공군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장교들은 교육단에 들어서자 곧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렸다.
이번엔 해병장교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128명의 장교가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분승하여
김해 공군비행학교의 입구인 평강(平康) 부락에 도착했다.
128명의 해병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하고 이동하여,
마치 잠복전투훈련을 하는 식으로 정문을 기습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공군헌병 김용만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방을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새벽 5시 50분 쯤에 김 병장의 안내로 약 1천m거리의 조종학생 내무반에 닿았다.
128명의 해병장교는 4개 내무반에 분산침입하고 돌과 주먹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며 추격했다.
이 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하고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최성만 중령(작전과장)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사과토록 강요했다.
- 8일 아침 : 공군의 반격
그러나 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아침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다.
비행학교 전장병 약 3백여명이 연병장에 집결해있는 해병장교 128명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해병장교들은 연병장에 집결하기 전에 이미 조종학생 10여명을 때려눕히고,
3개소 내무반의 유리창 31장 등의 기물을 마구 부쉈었다.
쌍방 4백명이 얽힌 패싸움은 10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숫자가 부족하여 철조망 밖으로 쫓겨난 해병장교들은
공군장병들에게 \"추격해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하고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S28A형 항공기 TA858호 좌측날개 전면 3개소, 우측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면,
TA 886호의 하우링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다.
- 8일 아침 : 해병대 도주
아침 7시 쯤, 철조망 밖으로 나간 해병장교들은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이 가운데 이의일 해병소위가 철조망 밖 늪에 빠져, 전우들에게 구조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 피해
이 사건으로 2대의 비행기가 파손되었고,
도합 39명의 중상자가 나왔으며, 1명의 사망자(이의일 해병소위)가 나왔다.
이의일 소위는 66년 경희대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아들 3형제중 막내라고 한다.
부검결과 익사로 판정되었다.
♣ 결말
공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에서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월남전 상황이라 장교들은 필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주동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이 전대미문의 패싸움은 싸움 당사자인 두 학교가 자매결연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담이지만 해병대 측의 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와 당시 공군 비행학교 당직사관이었던 이양호 대위는
30년 후 각각 해병대 사령관과 국방장관으로 해후(?)하게 되며,
공교롭게도 둘 다 비리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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