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는 긔엽긔.
거꾸로 써도 긔엽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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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언덕을 내려오자 다시 이장의 집이 나타났다. 해원은 말없이 민박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짐을 들고 나왔다. 희정도 급히 자신의 가방을 어깨에 멨다. 이장의 아내는 잠들었는지 불 꺼진 본채는 조용했다. 해원은 손에 열쇠를 든 채 이장의 집을 나와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목을 접질린 희정은 계속 해원의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덕 위 멀리서 아스라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무서워도...... 저렇게까지 계속 비명을 지르나요?”
말없는 상황이 어색한 나머지 희정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해원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단순히 귀신을 보았다고 저러는 건 아닙니다. 홀렸다고 해야 하나...... 아마 여태껏 살면서 가장 무서운 모습들을 보고 있을 겁니다.”
“귀신이 그런 것도 할 수 있나요?”
“옛날부터 도깨비나 여우가 사람을 홀렸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지은 죄가 있으니 더 무섭기도 하겠지요. 거기다 저희가 조금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와주셨다고요?”
희정은 고개를 돌려 해원을 바라보다, 해원의 싱긋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자 다시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해원이 왠지 즐거운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자세한 건 영업비밀입니다.”
한참을 내려오자 작은 가게와 그 맞은편 집이 드디어 보였다. 조그만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해원은 희정을 잠시 평상에 앉히고는 열쇠를 들고 문으로 다가갔다. 열쇠를 두어 개 맞춰보자 이내 문이 맥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안에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 황급히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 뺨이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해원과 희정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희정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곧 경계심을 풀었다. 대신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그녀는 곧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어두운 길을 조심스레 내려와 선착장에 다다랐다. 한밤중의 선착장은 고요한 가운데 파도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다행히 한쪽이 트인 대기소 비슷한 것이 있어 밤이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정과 그 여자가 오래되어 보이는 긴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자 해원은 옆의 의자에 따로 앉아 다리를 뻗었다.
“내일...... 아. 이미 오늘이군요. 아침에 배가 들어올 겁니다. 그걸 타고 나가면 될 겁니다.”
“쫓아오지 않을까요?”
갇혀 있던 여자가 겁먹은 듯 묻었지만 해원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걸릴 겁니다. 그리고 정신이 들면 얌전히 앉아서 경찰이나 기다려야겠지요. 제대로 된 경찰 말입니다.”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희정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해원이 희정을 보더니 씩 웃으며 부언했다.
“걱정 마세요. 두 분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류신혜 씨가 도와주실 겁니다.”
“그...... 귀신 말이에요?”
희정이 미심쩍은 듯 말했다. 귀신이라는 말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해원은 강하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희정 씨. 희정 씨가 딱 좋은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 도망칠 수 있었던 게 단지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 그게 무슨......”
희정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지금까지는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깨어나기 직전에 뭔가가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한밤중에 깨어났는데도 희한하게 잠이 거짓말처럼 싹 달아났던 것도. 해원이 희정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도와주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 같은 희생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희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멀리 언덕 쪽을 쳐다보았다. 언덕 위의 굵은 나무가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한밤중에 한바탕 활극을 치른 탓인지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무거운 잠이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바람에 희정은 아무 생각 없이 길게 하품을 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서 입을 가렸다.
“피곤하시지요? 눈 좀 붙이세요.”
정말 자도 괜찮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외출을 나갔던 잠이 돌아오는 게 먼저였다. 파도 소리와 함께 끝없이 밀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한 채 그녀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사방이 컴컴해지더니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한 소녀가 나타났다.
교복을 입은 소녀였다.
소녀는 화가 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괜히 들러붙지 말고 좀 떨어지지 그래?”
“들러붙는다니?”
“발목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혼자 설 수 있잖아? 왜 계속 기대고 그래?”
“하지만 정말 아파.”
“흥. 엄살은. 조금만 더 다쳤다간 아예 업어달라고 하겠네?”
소녀가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희정도 부아가 났다.
“너 왜 반말이야? 고등학생밖에 안 된 게.”
“뭐? 고등학생?”
소녀가 코웃음을 쳤다.
“너 대학생이지? 야, 그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
“고등학생 주제에 무슨......”
“어려 보인다고 내가 진짜 어린 줄 알아? 너 몇 년생인데?”
영문 모를 말싸움에 희정은 짜증이 났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소녀를 째려보았다.
그녀와 비교해 키가 머리 하나쯤 차이나는 작은 소녀였다.
“아니, 그보다 넌 대체 누군데 이러는 건데? 왜 이래?”
소녀도 허리에 손을 얹더니 희정을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할 건데? 아무튼 들러붙지 마. 알았어?”
“남이야 들러붙든 말든 뭔 상관이야?”
“상관있어!”
소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빙글빙글 돌고
그들도 함께 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희정 씨. 일어나세요.”
희정은 간신히 눈을 떴다. 해원이 그녀를 깨우고 있었다. 잠든 사이에 날이 밝았는지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셨다. 갇혀 있던 여자는 역시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희정의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무심코 눈을 비비는 손등에 까슬까슬한 눈곱이 느껴졌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몰래 눈곱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때야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수면에 걸린 태양을 배경삼아 바다 저편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타고 왔던 여객선이었다. 기다렸던 여객선을 드디어 보게 되자 반가운 마음에 희정은 왈칵 눈물마저 날 지경이었다. 겨우 이틀 전, 그것도 불과 하루하고 한나절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 섬에 오고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발목만 아프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었을지도 몰랐다.
뒤이어 깨어난 여자도 여객선을 보자마자 희정과 별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숫제 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들 기세여서 해원이 그녀를 말려야 했다. 간신히 뛰어드는 건 멈추었지만, 그녀는 초조하게 종종걸음을 치면서 좁은 선착장을 좌우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희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해원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네요. 얼른 돌아가고 싶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세요?”
“서울이에요.”
“아하. 그럼 같이 올라가시면 되겠네요.”
해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도 마주보며 웃었다. 순간 어째서인지 조금 전에 꾼 꿈이 생각났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십여 분쯤 흐른 후, 마침내 여객선이 선착장에 옆구리를 댔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초로의 남자가 선착장으로 뛰어내리더니 해원 일행을 쳐다보았다.
“세 사람이오?”
“저희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요금표를 가리키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주머니를 뒤져 뱃삯을 냈다. 여자의 몫은 해원이 함께 지불했다. 배에 타는 동안 남자가 한 사람씩 손을 잡아 뱃전으로 끌어 주었다. 마침내 배가 기적소리를 내며 선착장을 떠나기 시작하자, 동행한 여자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더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희정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들이 육지로 돌아가는 몇 시간 동안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해원이 무월도를 다시 방문한 것은 그날로부터 보름가량이 지나서였다. 외딴 섬에서 일어난 여자 인신매매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한동안 뉴스나 신문 지면을 차지하다가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하자 슬그머니 사라졌다. 경찰이나 기자들로 섬이 북적이던 것도 잠시였다.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 여럿이 인신매매, 자살방조, 시체유기 등의 죄목을 달고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섬은 꽤나 황량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죽은 이의 시신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지 한 달이 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씻김굿은 언덕 꼭대기의 나무 아래서 벌어졌다. 바리의 어머니인 큰무당이 꼬박 하루를 들여 굿을 진행하는 동안 해원은 내내 옆에 서 있었다.
돌아가는 배편은 해경의 순찰선이었다. 경찰청에서 근무하는 해원의 친구 원순의 부탁에 해경에서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순찰선은 여객선보다 두 배는 됨직한 속도로 파도와 파도 사이를 내달렸다. 해원은 간신히 멀미를 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큰무당은 오히려 멀쩡해 보였다.
“착한 영가였어.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함부로 원한을 풀거나 하지 않고 말일세.”
큰무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더군요. 자신처럼 될까봐 말입니다.”
“영가가 사람보다 낫구먼. 마음 씀씀이가 착하니 좋은 곳으로 갈 거야. 걱정 말게.”
그녀는 해원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해원은 뱃전의 난간에 기댄 채 끊임없이 선체에 부딪혀 사라져 가는 하얀 포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을 열었다.
“바리야.”
“왜요?”
“사람은 귀신을 무서워하지?”
“보통은 그렇죠. 아닌 사람도 있지만요.”
“하지만 난 말이야. 사람이 더 무서운 것 같아. 귀신이 사람에게 해코지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훨씬 많잖니.”
해원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말했다.
“어쩌면 거꾸로 귀신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게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