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글입니다.
이거 제가 정치 사회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 쓴글인데 10년전에 쓴 글인데 참고삼아 한 번 읽어보기에 좋은 내용입니다.
불체자 얘기가 자꾸 나와서 말이죠 ㅎㅎ
문 명 비 판 론
98.1
1. 국경없는 자본의 공세 뒤에는
국경없는 노동력의 공세가 온다!
이 취지는 간단하다.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은 더욱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민족국가라는 단위는 현재
까지 효율적이지만, 미래에는 보장할 수 없는 성격이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한 효율적이고, 근본적인 장치는 현재까지 아무 것도 없다.
매번 한국에서 있는 자원이라고는 인력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여
기에는 맹점이 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가이다. 즉, 인구정책이 재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더이상 산아제한정책이 따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혼하는 가정이 급증하고, 결혼하지 않는 성인들이 늘어
나며, 결혼을 하여도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그러하다. 개인적 자유 때문이라
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각박해진 <세상살이>가 함축되어 있다.
더이상 아이가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아울러 아이를 기를
만큼 형편이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남녀가
함께 맞벌이를 해야 한다. 이것이 서구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그런 서구에서 최근 문제는 다름 아닌 <사회보장제도>의 위기이다. 이
위기는 재원 마련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재원 마련에 중요한 한 원
인이 바로 <경제적 활동 인구의 감소>이다. 서구의 인구는 마이너스이
거나 거의 정체된 채 그대로이다. 그러한 것이 누적되다 보니, 경제적
활동 인구가 부담해야 할 세금 폭이 점차 높아졌다. 노인층 등 각종 비
경제활동인구를 부양할 몫이 커진 것이다. 제조업의 의미도 이러한 경
제활동인구가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 가능한 말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
력이란 필수불가결한 것이니까 말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몇몇 미래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로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진입(해마다 지
브로울터 해협에서는 죽음을 각오한 아프리카인들의 탈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죽으나 바닷물에 빠져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다.)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중국 경제성장에 따른 필연적인 지역차별,
민족차별 등이 이루어져 소련식 중국 분열이 이루어질 전망(중국의 민족
정책은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불안함이 현
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당장 그러한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 이러한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울러 전세계적 공황 사태가 닥친다면
중국은 펄벅의 대지처럼 엄청난 인구 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우
리도 경험한 바, 도시로의 무작정 상경 인구는 현재에도 엄청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압록강, 두만강 등이 한강과 비교가 될 수 없
을 만큼 건너기 쉬우므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도 많다.), 멕시코 등
히스패닉 인구의 북미 이동(멕시코인 등 중남미 사람들의 미국 국경
들어오기 또한 아프리카인의 그것과 비견된다.) 이러한 사태는 최근의
'국경없는 자유무역'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 공세에 버금하는 '국경
없는 인구이동'이라는 노동력의 공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벌
어진다면 살아 남을 민족국가가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인가. 사회보장제
도는 밑바닥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으며,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처럼 노
동임금의 불안정은 증폭될 것이며, 공동체의 파괴로 사회불안은 격화될
것이다. 만일 남북한에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당장 임금격차, 생활수준
이 문제가 되는데, 이 경우에 휴전선을 잠정 유지시킨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한 오백만 북한 노동력의 진입 또한 고려되어야 할 일이
다.
싱가포르도 예외는 아니다. 싱가포르의 장점은 '아시아적 가치'에 있
지 않다. 오히려 서구 도시의 미래이다. 즉, 도시국가의 장점을 최대
한 살린 것이다. 삼백만의 인구, 좁은 땅덩어리로 인해 어떠한 정책이
든 급속하게 실험할 수 있으며, 재빨리 구조조정이 가능하다. 유럽의
소국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들 내부는 공동체적 가치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으며, 서로에 대한 관계는 거의 한 가족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개인성은 사라지고, 집단적 가치가 중시된다. 이러한 것을 단지 유교
적 패턴을 촉매로 사용했을 따름이다. 마치 동네깡패 유방이 패거리들
을 이끌고 중국 정권을 획득하고 나서 장군이나 신하라는 것들이 동네
깡패처럼 노니 이들을 진정시키고자 유교를 도입했듯이 말이다. 그 당
시 유방이 유교를 도입한 것들은 지금처럼 엄청난 교리가 아닌, 국민
윤리 교과서만도 못한 것들이다. 즉, 이 정도도 안 하면 사람이 아니
다,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가령, 왕과 술마실 때는 막가파처럼 마시지
말고, 신하 예의 지켜서 술 마셔라! 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교가 아니라 정권 유지라는 현실 과제였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폐쇄적 도시국가, 요새적 도시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삼
백만에 불과한 인구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려 하니 개개인에
대한 투자가 막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과로 싱가포르 어린이들은
어릴 적부터 투철한 교육을 받는데 그래서인지 대다수가 근시이다. 그
들은 일본교육보다도 더 집단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나, 성인이 되면
모두가 경찰관 인식에 도달한다. 그들은 도시국가의 톱니바퀴이며, 프
로그램화된 인간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국가에서는 실업도
없고, 거지도 없다. 모두가 일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러하다 보니 <하층 노동력의 부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고,
값싼 말레이지아인의 유입이 불가피하다. 성공적이라는 외국인 노동자
정책을 썼지만, 과연 이것이 효율적인가. 싱가포르의 인구정책은 마치
부잣집 주변에 경비견을 배치시키고, 첨단 경보장치를 동원하여 싱가
포르를 지키는 것이다. 만일 공황이 나서 싱가포르는 살 수 있겠지만,
말레이지아가 공황에서 못 견딘다면, 배고프고, 분노한 말레이지아인
들이 순식간에 싱가포르에 유입한다면, 싱가포르는 테러를 하든가, 망
하든가 하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무척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틈에 이러한
것을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현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지
만, 오만을 부리다가는 조만간 이런 사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북한처럼 '애낳기 운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대안은 서구가 추구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에서는 출산 등에 혜택이 없으며, 각종 유아관련 생필품에 대한 면세
혜택이 없어 엄청나게 비싸며, 아이 관련 교육비는 상상을 불허한다.
이에 대해 서구는 출산에 대해서는 보험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출산에
대해서는 무상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각종 유아관련 생필품 등에 대
해서는 갖가지 면세 혜택을 주어 <값싸고 품질좋은> 제품을 사게 하며
, 각종 교육혜택을 부여하여, 이왕 낳은 아이들에 대한 보장을 하고
있다. 사회에서도 아이를 가지면 큰 축복으로 간주하며, 임신한 여성
에 대해서는 조심, 또 조심하여 과장되게 말한다면, 가히 <임산부의
천구>이라고 할 만하다. 미혼모와 아이에 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심지어 근래에 화제가 된 여죄수의 아이 문제 또한 고려대상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나는 대부분의 유아 물품을 주변에서 빌려 쓰고 있다
. 그런데 빌려온 것 중에 외제와 국산을 비교한다면, 해외에서 태어나
서 영국산을 쓸 수밖에 없어 영국산을 이용한 유아관련 제품들은 환율
폭등 이전 가격으로 따지면, 오히려 영국산이 국산보다 더 싸며, 질은
매우 뛰어났다. 기업인의 역량부족을 탓할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관
심이 있기에 이러하다고 본다. 옷에서부터 교재,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반면 국산은 로열티에다가 세금이 추가되고, 갖가지 비용 등
으로 질은 엄청 떨어지고, 값만 비싸다. 최근 옷을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유아 가게에 갔더니 입만 벌어졌다. 이러하다면, 누가
애 낳고 싶어하겠는가.) 아무튼 만일 이러한 조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이런 조치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뛰어넘는 물가
폭등과 사회보장 축소, 실업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서유럽 사태를 조
만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나마 사회보장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왔다면, 우리는 그것조차 최근에야, 그것도 크게 미흡한 수준으
로, 심지어 각종 기금을 거덜나게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서유럽조차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
라는 점이다. 모두들 <국경없는 자본이동>에 대해 아시아 전체가 벌벌
떨고 있다. 만일 <국경없는 노동력이동>이 벌어진다면 아시아는 어떠
할까? 나는 이에 대해 해소했다는 의견을 현재까지 들어 본 바가 없다.
즉, 자본주의의 두 축인 자본과 노동의 대이동은 과거 산업혁명 시대
만큼이나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것이란 점이다. 그러하니 자본만 무서
운가? 몸뚱아리밖에 없는 노동력도 엄청 무서운 것이다.
제조업의 힘은 여러 곳에서 나오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값싸고,
잘 교육받은 노동력이다. 만일 이러한 노동력이 민족국가 내에서 통
제불가능하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민족 국가 내에서는 아무리
공장자동화가 이루어지더라도 다소 문제가 있을 지라도 현재 실업대책
처럼 재교육, 재배치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
다. 그러나 민족국가 단위가 깨지면,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 그 단
초가 바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인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
노동자의 태도는 매우 호의적이다. 그러나 우리 생활 근간을 뿌리채
흔드는 일이 온다면, 이는 서구 노동자들처럼 적대적일 가능성이 크
다. 온정도 어느 정도 배불러야 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는 무력하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기존 사회주의까
지 포괄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하니 남녀차별로 인해 매년 엄청난 여아가 살해당하는 사태, 특
히 대구 같은 도시는 할 말을 잃게 한다. 대구 시민들에게 미안한 말
이지만, 대구는 미래 범죄자들의 온상이라 할 수 있으며,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미래의 모순을 하루바삐 앞당긴다는 점에서 어떤 이들은
축복할 일인지도 모른다.
2. <국경없는 노동력 이동> 이전에
<국경내 노동력 이동>이 온다!
그렇다면, 이는 <국경없는 노동력이동>이 본격화되면서 일어나는 것
이지, 민족국가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때는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러하지 않다.
정보사회, 정보고속도로, 첨단기술이 인류의 복지를 가져다 준다는
21세기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싱가포르 같은 <도시형>에만 국한
되는 것이다. 선진국일 지라도 유럽의 소도시를 가보면, 서울보다
정보화가 뒤떨어져 있다. 유럽 소도시에서 컴퓨터 구경하기가 어려
웠다. 컴맹도 부지기수다. 다시 말하자면, 서울만 떼어 놓고 보면,
세계적인 대도시이자, 어느 선진국 대도시와도 비견될 만한 도시이
다. 나라 전체는 후진국임에도 특정 도시는 그러하지 않다. 즉, 미국
의 부자나 브루나이의 부자나 거의 수준차이가 나지 않듯이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정보사회란 민족국가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라 전세계 대도시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란 점이다. 아울러 이
러한 정보사회는 기존 공동체의 급격한 파괴를 부추길 것이다.
산업사회 진입으로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듯이 말이다.
통신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감지했을 것이다. 기존 사회 가치와
별달리 차이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 통신함에도 불구하고, 통신을 오
래하다 보면 '통신적인 인간', '기계와 소통하는 것을 더 즐겨 하는
인간'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는 기술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정보사회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효율성이라면, 바로 이러한
효율성은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기계화시키며, 프로그램화시키기 때
문에 인간 사이에 어떤 교류도 막아버린다. 그 대신 자신의 애견처
럼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충실한 컴퓨터를 사랑하는 것이다. 컴퓨터
이전에는 TV가 있었고, TV 이전에는 애견과 고양이가 있었듯이 말이
다. 과연 이러한 것을 과거 공동체론을 펼치면서 말할 수 있다는 말
인가? 우스운 일이다. 과거의 공동체론으로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농촌 공동체 지키기>로 무작정 상경을 막지 못 했듯
이, <농촌 잘 살기 운동, 소득 증대 운동>으로 막지 못 했듯이 말이
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인들 또한 출세하여 당원이 되고,
평양으로 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회가 오면 부자층은 더욱 줄어 더욱 극소수화된 사람들이
빈자층이 더욱 늘어 더욱 다수화된 사람들을 이끄는 사회가 올 것
이다. 이러한 상황이 곧 혁명적 상황인가? 그런 것은 아직까지 공
상에 불과하다. 각각의 빈자층은 더욱 분열화되고, 세분화되는데
반해, 극소수화된 사람들은 각종 첨단 기술의 혜택을 부여받아 보
다 통제된 관리체계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싱가포르 담당
자처럼 말이다. 결코 SF적인 상황만이 아니다. 또한 SF소설이 공
상과학소설이라지만 정확히는 과학소설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따라
서 과학적 픽션이 과학적 현실로 얼마든지 찾아온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두고, 가령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
말을 말하며, 자원봉사자 같은 사람들의 지원을 기대한다지만, 그
의 뛰어난 현황 파악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말
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극소수화된 사람들이 이기심의 극단
은 이타주의임을 깨달아 빈자층에 대한 아낌없는 노력만이 해결책
이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웃기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도대체 이러한
사태에 해결점이 없는데 무슨 동정심인가. 동정심도 자본이 활성화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교회가 무슨 돈으로 건물을 짓나?
노동자가 임금을 받지 못 하면, 십일조가 무슨 개나발인가?
산업사회가 본격화되니 더이상 아이들을 동네에서 만나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들은 오락실에서, 만화가게에서 놀다가 차츰 집에
서 논다. 모든 것이 집에 있고, 집에서만이 안전빵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과거처럼 형제자매가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맞벌이하는
부모들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격리된 시간에 보다 익숙해진다. 학
교나 사회는 이를 전혀 책임질 수 없다. 집 이외에는 아이들이 안
심할만한 구조는 어디에고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은 처음에
철저히 계층화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파트 아이들은 같은 평수
에 있는 친구끼리 어울리다가 이내 그조차도 의미가 없어질 수 있
다. 성인이 되어 데이트를 해도 집에서 하는 경향이 더 심해질 것
이다. 바깥에 나가 보면 죄다 돈인데, 그리고 가장 마음 편한 곳
이 집인데 굳이 바깥에 나가서 데이트할 일이 없다. 또한 격증하
는 실업 문제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면, 오갈 데 없는, 그리고
사회복지혜택이 극히 미미한 한국사회에서는 부모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돈많은 부모는 이를 잘 막아주겠지만, 그 대신 부모의 이데
올로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돈없는 부모는 이를 전혀
보장할 수 없어 무능력자로 찍히고, 자살을 결심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아이를 내쫓든가 말이다. 목적의식적으로 집을 나오는
것이 더이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경제활동인구가 되어서도 집에서 논다. 한국만의 일인가. 그렇지
않다. 서구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며, 대학생들은 취직이 안 되니
대학에 눌러 붙어 있으면서 생활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 독일
같은 국가에서는 시위중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날 문제이다.
그리고 소위 정보화혁명(자본주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일
부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다른 종류를 제시하고 있는데 철없는 짓
거리라고 본다.)을 2차 산업혁명으로 본다면, 그것은 상기한 문제
를 더욱 철저하게 이끌어내는 동인이 될 것이다.
즉,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현재 게임에 중
독된 우리들 이상으로 가상현실에만 탐닉할 것이다. 우리는 기껏
해야 TV에 중독된 세대이지만 말이다. 더 심하면, 현실에 더이상
매력을 잃을 것이며, 현실에서 혁명이니 개혁이니에 전혀 관심조
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으며,
유일한 친구는 컴퓨터였으니까 그들이 커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
런 이들에게 현실에서 사회혁명을 요구한다는 건, 몇몇 엘리뜨들
의 오만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쩌면 극소수 지배계급들에게 싸구
려 온정을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교육
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들에게 논리를 요구하고, 책을 요구하고
, 이성적인 행동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듯 긴 글을 볼
만한 준비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지금조차도 책을 거의
읽지 않고, MTV와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 취해 있는데 말이다.
기존의 인식으로 '요즘 애들은 도저히 안 돼! 버릇도 없는 데다가
비젼도 없어!'라는 이집트 피라미드에 있다는 수천년된 말을 되
풀이할 것인가. 그들에게 남겨진 건, 그들이 전혀 원하지 않았지
만, 결국 컴퓨터에 복종한 소프트 프로그램이 운명이지 않겠는가.
말 잘 듣는...
3. 탈출하기
한 까다로운 고양이가 있었다. 외로워 미칠 것 같아 그 고양이를
데려다 길렀다. 그런데 너무나 까탈스러워 고양이 비위를 맞추기
가 신경질이 났다. 고양이를 안 기를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없으면 살기가 싫으니 고양이에 대해 보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양이에 대한 투자가 많아진다. 시간도 보다
많이, 돈도 많이, 애정도 많이... 처음에는 사람도 만나고 그랬
지만 이젠 사람 만나기가 싫다. 고양이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는 먹고 살기 위해 돈 벌었으나 고양이 길러야 하기 때문에 직장
도 때려 친다. 어느덧 고양이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고양이가 잠시라도 없으면, 살 의미
를 못 찾는 사람이 된 것이다. 24시간 내내, 꿈 속에서도 고양이
를 찾는다. 상상을 해본다. 고양이가 없다면... 자살하고 싶다.
그러나 갑자기 고양이가 도망갔다. 그 본성대로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이다. 나는 까무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을 잃었다. 맹
목적이 된다. TV에 보니 남산 일대에서 다람쥐를 쫓으며 많은 고
양이들이 논다고 한다. 남산을 이잡듯이 뒤져 고양이를 간신히 찾
으나, 고양이는 외면한다. 자살밖에 없다. 고양이가 나의 신이었
기 때문이다.
문제는 늘 엘리뜨가 아니라 대중 개개인이다. 대중 개개인이 이러
하다면 엘리뜨가 아무리 천재적이더라도 해결방안은 없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엘리뜨 위주로 사고하고, 그것이 즉자적인 해결방식
이라고 여겨져도, 심지어 당장 생각해 보면 가능할 것 같아도, 따
지고 보면, 그러한 엘리뜨도 상기한 대중 개개인에서 과히 벗어난
인물은 아니다.
당신은 다만 다른 대중과 차별화되고 싶은 '키치적 욕망'에 따라
남들보다 고차원적이라고 여겨지는 '게임'을 즐기고 있을 따름인
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버전업'되는 흥미 만점의 게임에 말이다.
그런데 대중 개개인 역시 자기가 살고 있는 범주에서 이런 '게임
'을 즐기는 일인지 모른다. 그들 역시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을
가동하여 '현실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그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가장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바로 자기가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하니 당신이란 엘리뜨들과 대중 개개인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
인가. 당신이 하등하게 보는 대중 개개인도 당신을 단지 하등하게
볼 뿐인데 말이다. '게임'에 임한 모든 이들은 현실과 무관하게
자신들을 '엘리뜨 = 주인공'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른 게임을
한다고 하여 타인을 엑스트라로 볼 근거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논리가 자본의 논리에 따라 현실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의식, 자아의식, 이성, 대뇌 피질, 문명'
과 '본성, 본능, 욕망, 원시뇌'를 연결하는 기능이 매우 취약하다
고 한다. 전자를 강화시켜봐야 그것은 합리성의 극단 밖에 나타나
지 않아 파시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이성적인 극단
의 산물일 수 있다. 반면 그 반발로 후자만 강화시켜봐야 그것은
비합리성의 극단인 또 하나의 파시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파
시즘은 감성적인 극단의 산물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연결이다.
과연 이러한 연결이 가능한가. 그것은 단지 인간 신경과학의 발달
로 이뤄질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신경증 치료제가 아무리 발달
하더라도 사회가 그러하지 않다면 전혀 치료되지 않는다.
아주 가날프지만 희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 뇌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커가면서 인간 뇌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뇌신경간의 연결은 그의 사회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만일 이 사회가 상기한 사회와 전혀 다른 사회로 이행될
수 있다면, 이러한 자극이 인간 내부에서 촉진되어 다른 방향으로
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매우 비극적이다.
당분간 이 사회에는, 그리고 전 세계에는 파시즘이 진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소설가의 말대로 '어느 시기에 다다르면 우리는
히틀러나 박정희를 꿈꾸는 시간이 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러한 상황에서, 나 같은 자가 만일 이러한 파시즘에 대해 결벽적
으로 저항한다면, 오히려 나 같은 자는 이지메 당할 수밖에 없고,
바보 취급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놈이 있나? 너라고
별 수 있나? 다 똑같지 그랴? 새로운 세대들은 안 그럴 거야? 모
, 이런 식의 너저분한 반응들 이면 속에는 자신만의 파시즘을,
자신만의 편협한 이기심을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을 것이다. 스스
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그 진실을 깨닫다가는 모든 것이 망가
지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그것이다. 그것
을 어찌 그 개인에게만 탓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대로 망가질
수밖에 없겠지.
이러한 대목에 이르르면, 지식인의 책무와 발언도 사실 껌값 같
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수위 사람 주변에 청탁이 들
어온다는데 대다수가 박사학위라는 점을 더 인식했으면 싶다.
나는 이러한 것에 계속 저항해왔지만, 그조차도 바로 이러한 게
임의 일부가 아닌지 회의스러울 따름이다. 단지, 이러한 것을 한
번 말했다는 것에 자족하기에는 지나치게 내 신경이 예민한 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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