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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준법시위인가?
오늘날 사회에서 시위가 하나의 유행으로 사람들이 시위를 유행의 일종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그 결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와 시국선언이 모두 현 체제에 우리가 잘 적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는 터무니없는 가설일까?
많은 이들이 현 권력의 부당함을 말하며 거리로, 거리로를 외치고 있다. 우린 광장을 가득 메운 지난 촛불시위의 광경을 기억한다. 이 기억은 또 이전의 6월 항쟁의 풍경을, 그리고 이전의 4.19의 풍경을, 3.1의 풍경을 거듭 소환한다. 허나 실제의 3.1운동의 풍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태극기와 여고생과 눈물의 외침의 풍경은 아니다. 총독부의 기록에 따르면 3.1운동으로 인한 사망자가 7,506명, 구속수감이 4만 7천 명에 이르는 과격 시위였다. (그런 점에서 3.1절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3.1절의 폭주족들이다. 그들이야말로 3.1절의 의미를 정확히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풍경이 재해석되면서 그때마다 시위에서 폭력이 거세되고 있는 광경이다. 이것이 권력과 맺는 상관관계는 명료하다. 일제는 (형태적으로) 정권을 교체했으며, 이승만은 정권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전두환은 심판받지 않았고, 이명박 정권은 반응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에 이르르면 (언론을 통해 보자면) 시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시위를 투쟁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들은 계속하여 시위의 규모를 키울 것을 주장한다. 박근혜 정권이 시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들은 시위가 아직 작은 규모여서 자신들의 투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시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규모의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가 성공한 시위라 판단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성공적인 시위가 되기 위해선 절대다수가 참여해 광장을 가득 메워 그들의 응집된 힘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준법은 이제 시위에서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할 하나의 기준선이 된다. 폭력 시위는 정권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에 의해 악의적인 내용으로 보도될 꺼리를 주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중도층 대중의 참여를 막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시위는 그 규모가 커지기 전에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밝은 분위기로 이루어져야 한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1인 시위를 하고 인증샷을 통해 이를 전파한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시민의식을 과시하며 시위는 이루어져야 하고, 시위는 마치 피크닉을 나온 것처럼 즐거운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시위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연이 함께 있어야 가족 동반을 이끌 수 있다. 이것이 현재의 시위를 지배하는 하나의 암묵적 규칙이다.
준법시위에 대한 반박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준법시위란 실상 권력에 복종하는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시위대가 규모를 키우려 하는 것은 새들이 자신의 몸을 부풀려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일종의 구애행위와 같다. 시위가 끝나고 게시판에 올라오는 의견들 중 일부의 관심사는 ‘이 시위를 주류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으며, 현 정권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이다. 이들은 현 정권과 언론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의 환타지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철저하게 상대의 결정에 따라 충족될 것이다. 시위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주체라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 이들은 상대의 결정에 의해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준법시위란 결국 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시위를 의미한다. 이 패러다임에선 결국 어떤 성공적인 시위일지라도 이미 그 시점에서 권력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시위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위는 시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미 시위로서의 본질 -권력집단의 행위를 변화시키겠다-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반박은 준법시위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과격시위 역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부는 보다 과격한 시위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시위가 준법시위보다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의 봄과 터키의 시위와 같이 동시대의 혁명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시위가 상대의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역시 그 귀결점은 -보다 강력한 시위의 폭력성을 인질삼아 권력집단의 행위를 변화시키겠다-는 논리에 이르게 된다면, 과격시위일지라도 그 성공의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권력집단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인 장면들을 이러한 시위의 결말이 낙관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권 때 광장을 메운 촛불은 명박산성에 좌절되고 해체되었다. 투석과 최루탄이 서로 오가던 6월 이후의 우울한 결말은 혁명 이상으로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시위의 규모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이들의 상상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장 가까운 시위인 5.18과 3.1을 소환하더라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권력이 필요하다면 수만 명의 사람의 목숨을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취급하는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이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는 1968년 혁명의 옛 구호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현재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급진적인 제스처만이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위’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변화는 거의 없다. 설령 권력이 변화를 보인다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히 권력집단이 허용하는 예상치 내의 변화이며, 본질적으로 이 모든 사태를 불러일으킨 권력집단과 시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작용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준법시위를 주장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우리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낙관적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가능한 시위가 아닌 불가능한 시위를 상상해야 한다. 아니 시위로 규정할 수조차 없는 시위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상상하기 위해선 우리는 ‘불온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보아야 한다.
선거 불복 너머의, 정권 교체 너머의, 새로운 정부 너머의, 아니 1919년 임시정부에서 이어지는 지금의 대한민국 너머에, 그 너머에
우리에게 더 나은 국가가 있을 수 있으리라는 상상.
그런 상상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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