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선친 김용주 전 전남방직(현 ㈜전방) 회장이 1961년 의회에서 일본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친일'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1일 드러났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일본 정부가 재일교포의 '강제 퇴거'를 추진해 우리 정부와 갈등 중인 상황에서 한인들을 "생활을 못해서 가 있는 사람들"로 규정하는 등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 강한 반발을 샀다.
1920년대의 '민족주의적 활동' 평가와 이에 대비되는 1940년대의 '친일 행적' 비판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추가적인 사료(史料)가 발굴된 셈이다. 김 전 회장의 1960년대 친일적 발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촌 김용주는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애국·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가 태평양전쟁의 전초였던 1941년 이후 변절하여 일본의 대동아공영에 열성적인 친일분자가 됐다.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이다. (사진=자료사진)
김 대표는 현재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목적이 '친일 가족사(史) 지우기' 아니냐"는 의혹에 맞서 "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자료에는 당시 국민감정을 역행하는 김 전 회장의 역사관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1961년 당시 양원제 국회 중 상원 격인 참의회 본회의 회의록.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줄부터 "그 사람들이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이 생활을 못해서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인데..." 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자료=국회 사무처)
◇김용주 "재일한인, 일본 국민감정 악화시킨 결과 북송(北送)"
CBS노컷뉴스가 입수한 1961년 1월24일 참의회 본회의 회의록에는 김 전 회장이 일본의 처지를 헤아리거나 옹호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국회는 양원제였고, 김 전 회장은 상원(上院) 격인 참의원의 민주당(당시 여당·5.16군사 쿠데타로 해산) 소속 초선 의원이었다.
김 전 회장은 전날 최종 무산된 일본경제시찰단의 환영회장을 맡았었고, 반일 감정이 거센 상황에서 왜 일본 경제인을 초청했는지 의혹을 사 이를 해명키 위해 신상 발언을 했다.
그는 아직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지 못한 시점에서 "한국 수출품의 8할이 일본으로 간다"며 민간 경제 교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일본 대학들이 한국 유학생들이 공납금이 체납되더라도 등교를 허가하고 있다", "밀항한 경우에도 유학생으로 입증되면 구속시키지 않는다"는 등 일본이 재일한인에 특혜를 베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반일 감정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김 전 회장은 "60만 재일동포가 일본법률 밑에서 일본의 사회감정과 일본의 사회대우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재일교포의 처지를 규정했다. 그러면서 재일교포에 대해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생활을 못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1961년 1월25일자 조선일보 1면 '해명은 안하고 친일설교, 소속 분명히 안하면 재미없어' 제하의 기사. 본문 첫번째 단 네번째 줄에서 "김용주 의원이 극히 친일적인 언변을 해 야단법석이 일어났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조선일보 데이터베이스)
당시는 일본이 1951년 국권을 회복한 뒤 재일교포의 국적을 박탈하고 강제퇴거를 추진해 한일회담이 공전을 거듭 중인 시점이었다.
정부가 "징집 등 강제로 일본에 끌려 간 특수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며 '한인 지위'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일교포가 '자발적 이민자'라며 일본 정부의 입장에 선 발언이 나온 것이다.
김 전 회장은 1959년부터 진행 중이던 재일한인의 북한 송환(북송)에 대해서도 그 원인을 '한인 탓'으로 돌렸다.
그는 "지금 북송 문제로서 우리 민족의 감정을 극도로 격분을 시켰지만, 이것도 일본 국민의 감정을 악화시킨 그 결과로서 이러한 사태가 진전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난항 와중 일본 편들자, 언론 "극히 친일적…친일 설교" 혹평
김 전 회장의 대일(對日) 인식은 정계와 언론계, 시민사회의 공분을 샀다.
그의 발언 직후 반박 발언에 나선 무소속 이교선 의원은 "친일행위를 권고하고 있으니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한 뒤 "일본이 그렇게 친절하고 우리 동포를 도와줬다면 그 증거를 대라"며 따졌다.
언론도 비판적으로 다뤘다. <조선일보>는 1961년 1월25일자 조간 1면에 김 전 회장의 발언으로 빚어진 논란을 두 꼭지 실어 소상히 소개했다.
특히 '해명은 안 하고 친일설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김 의원이 신상발언에서 극히 친일적인 언사를 했기 때문에 야단법석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이 기사는 당시 본회의 기류를 "여러 의원들이 아연실색하다 분노를 터뜨렸다"고 묘사했다. 기사에 따르면 같은 당의 조국현 의원조차 "이러니 장면 내각은 이완용이 보다 더 친일적인 정부"라고 강력 비판했다.
같은 날 <경향신문>도 1면에서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김 전 회장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본경체시찰단 방한도 강한 반발을 사던 참이었다.
<동아일보>는 1월22일 "반일투쟁전국대회준비위원회가 발족하게 됐다"며 "일본시찰단의 방한 저지가 당면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1월22일 오후 대구역 광장에서 약 2000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시찰단 입국 반대 집회가 열렸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의 경우 1월13일 '일 시찰단 내한과 세론(世論)'이라는 칼럼을 통해 미츠비시 등 일본기업 시찰단에 포함된 일본 재벌을 겨냥해 "전범기업의 방한으로 모골이 송연하다"고까지 했다.
김 전 회장의 발언은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친일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인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는 "북송이 일본 국민감정을 악화시켜 벌어졌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에 원인이 있는 문제임에도 재일교포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당시 일본이 재일교포를 차별했던 반대 사례들이 많다"며 "일본 내무성 관료나 할 발언을 한국의 국회의원이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