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박영신 기자]아테네 올림픽을 현장에서 관람하려면 소지품과 옷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설령 비싼 경기 입장권을 구입했지만 올림픽 주최 측의 '규정'에 맞지 않는 차림 때문에 경기장 입장 거부 위기에 처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엄연히 '규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2004 아테네 올림픽은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장내 경기뿐만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의 '장외 경기'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11일자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아테네, 올림픽 관중의 십계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사실을 소개해 프랑스 네티즌의 항의 쇄도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지나치게 비싼 경기 입장권이 이미 아테네 시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가운데 소위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로부터 하달된 기상천외한 '올림픽 관중 행동지침'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기사의 골자다. 이 기사는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올림픽 관중 행동지침'의 수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처럼 10가지 항목으로 구분돼 있어 차라리 '올림픽 모범 관중의 십계명'이라고 할 만하다"고 일갈한다.
비자 카드가 아니면 안 돼?
▲ 8월11일자 르몽드 기사
'결코 자신의 물을 가져오지 말라.'
<르몽드>가 밝힌 첫 번째 모범 관중 계명은 바로 '물'이다. 올림픽 경기 관중은 물뿐만 아니라 수통조차 소지할 수 없다. 경기장안에 들어서면 아테네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 코카콜라사(社)의 그리스 지사에서 생산되는 생수 '아브라(AVRA)'가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수분 부족으로 졸도할 생각이 없는 관중이라면 '아브라'를 사서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계명도 원칙은 마찬가지다. '코카콜라를 제외한 어떤 음료수도 장내 반입 불가'. 쉽게 말하면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는 음료수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코카콜라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펩시콜라는 안 된다. 어길시 벌금이 부과된다. 외부에서 미처 음료수를 구하지 못했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경기장에 준비된 가판대에서 '손쉽게' 코카콜라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계명도 역시 마실 거리와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경기장내 주류 반입 금지'라는 항목인데 이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 조처의 내막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음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경기장 난동과 같은 일단의 탈선행위 예방 차원이 아니라 역시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인 '하이네켄'맥주의 판매 촉진 전략. 경기장에 일단 입장하면 마음껏 하이네켄을 사서 마실 수 있다.
먹거리가 문제가 된 네 번째 계명도 같은 논리. 미국 국적의 세계 최강 패스트푸드 '맥도날드 제품만 소비하라'. 같은 햄버거라 하더라도 유럽 시장에서 맥도날드의 명성에 맞서 선전하고 있는 벨기에 국적 패스트푸드 업체인 '퀵'의 제품조차 들여올 수 없는 상황이다. 하물며 샌드위치나 크르와상 따위를 다 먹지 못했다면 아예 경기장 입장 전에 버리는 게 상책이다.
코카콜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맥도날드 제품을 제외한 음식물 반입을 금지한 것. 경기장에 들어서는 관중들의 손에 든 햄버거까지 일일이 상표를 확인하겠느냐는 질문은 올림픽 주최 측에 해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 올림픽 공식 후원 업체의 로고가 선명한 광고물들이 아테네를 장식하고 있다
ⓒ2004 올림픽공식사이트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라는 이름은 먹거리 통제에 그치지 않고 관중이 옷을 입는 방식까지 간섭하고 있다. 관중들은 후원업체의 경쟁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나 모자, 가방 등을 착용할 수 없다는 것이 다섯 번째 계명이기 때문이다.
과연 펩시콜라의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어린이의 입장을 막을 수 있을까. '2004 아테네'는 관중의 기호를 바꾸려든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티셔츠, 마스코트와 같은 ‘2004 아테네 올림픽 공식 상품’의 위조품 단속을 규정한 여섯번째 계명은 그나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관중 십계명’의 백미는 단연 일곱 번째, 신용카드 제한 항목이다.
올림픽 경기 입장권 자동판매기는 '비자카드'가 아닌 다른 신용카드로는 조작이 불가능하다. 비자카드를 발급받지 못한 관중은 말 그대로 규칙을 위반한 것이므로 입장권 자동판매기를 이용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페어플레이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올림픽에서 '반칙'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이 밖에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의 국기를 소지한 채 경기장에 입장할 수 없는 것과 광고전단 배포 규제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계명을 차지한다. 나머지 열 번째 계명은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가 아닌 기업을 광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다수의 항목이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 보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몽드>가 고발한 이 내용은 프랑스 TV와 라디오를 통해 재차 언급됐고 인터넷상의 각종 블로그로 옮겨지면서 온라인 대화방을 달구고 있다.
온라인을 달구는 '올림픽 십계명'
▲ 원료가 수돗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럽 진출 계획이 무산된 코카콜라사의 생수 '다사니' 광고
ⓒ2004 코카콜라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 물을 제한한 첫째 항목으로서 이것은 금년 3월초 영국 공략을 시작으로 생수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바 있는 코카콜라사의 생수 ‘다사니(Dasani)' 악몽까지 다시 들춰내는 계기가 됐다.
기존의 생수 1리터 한 병이 0.4유로였던 반면 벨기에 샘물로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진 ‘다사니’는 막강한 코카콜라 상표와 함께 등장해 0.5리터 한 병에 1.4유로라는 비싼 가격으로 영국에서 첫 선을 보였지만 실상은 수돗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올해 4월 프랑스와 독일 진출 계획이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시장마저 접어야 했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 경기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생수는 문제가 됐던 코카콜라 그리스 지사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올림픽 후원업체 차원을 넘어 과연 이 물을 믿고 마실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올림픽 '모범' 혹은‘자본주의’ 관중 만들기 정책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고 있는 대표적인 사이트는 프랑스 광고반대 운동가들의 집합소인 '광고반대 여단(Brigades AntiPub)'이다.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인질을 참수하는 행위나 경기장내 물 반입을 금지하는 행위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극단적인 힐난과 함께 "올림픽 표어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는 선수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며 올림픽 정신을 오염시키는 비뚤어진 상혼을 질타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업 전략을 체험하기 위해 굳이 아테네까지 갈 필요가 뭐 있나. 파리에 있는 공연장들, 특히 올림피아 극장에서 공연을 보려면 가방을 비워야 된다, 먹던 초콜릿조차 입구에서 처치해야 한다"면서, "아이스크림과 사탕, 음료수 판매대가 즐비한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이라며 이미 일반화된 상술을 빈정거리는 네티즌도 있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인터넷 사이트 '볼크레올 닷컴(Volcreole.com)'의 한 네티즌은 "유로디즈니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한탄했으며 '르 드부아르 닷 컴(LE DEVOIR.COM)'의 네티즌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물을 마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 수돗물이라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고 올림픽 주최 측에 주문하기도 했다.
"개인 취향의 티셔츠 한 장 입을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 올림픽을 관람하기 전에 올림픽 후원업체 목록을 꼼꼼히 검토한 후 아테네 행을 결정하라"고 비아냥거리는 네티즌이 있는 반면 "올림픽 경기장내 반입이 무난한 음식물이 하나같이 현대사회의 수치라 할만한 알콜과 저질식품에 편중돼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알콜과 패스트푸드는 담배보다 덜 해로운가'라고 물음을 던지며, '2004 아테네'가 담배광고는 금지하면서 고칼로리의 대명사인 패스트푸드와 알콜의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늦은 밤, 올림픽을 빛내고 있는 각국 대표 선수들의 선전에만 박수를 보낼 일이 아니라 '2004 아테네 올림픽' 규칙을 엄수하는 프로페셔널 관중 올림픽을 응원(?)해 보는 것도 독특한 관전 요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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