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위해 잠시 제가 들은 풍월로 썰을 풀어봅니다.
장로교, 참 여럿이라 헷갈리실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근데 장로교 분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와 많은 부분에서 의미적으로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흥미롭기도 하고 알아두면 좋기도 하죠.
1. 일단 장로교라 하면 원래는 모두 "대한예수교장로회(줄여서 '예장')"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교단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구한말 미국 장로교 출신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 시작이 되었고 적어도 해방 이전까지는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몸이었습니다.
2. 근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첫 번째 분열의 싹을 틔우게 됩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 때문이었죠. 당시 교단 자체는(즉 주류는) 총회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심지어 헌금을 모아 일제에 전투기를 사서 헌납까지 합니다.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이 과거사
문제에 민감한 가장 큰 이유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끔찍한 고문 끝에 순교까지 한 이들도 있었고, 목숨은 붙었지만 해방 직전까지도 이 문제로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후에 이들을 흔히 '고려파'라고 부르게 됩니다.
너무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해방 후 신사참배에 굴복한 주류 장로교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다툼 끝에 1952년 따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 교단으로 분립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부산에 근거지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부산의 고신대학교가 교단신학의 중심입니다.
역시 당연하겠지만, 워낙 신사참배 안하고 신앙을 지켰다는 긍지가 강해서 이후로도 상당한 민족주의,
보수 우파의 성향을 띄게 됩니다.
3. 그 다음에도 또다른 분열의 싹이 퇴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신학문제에 대한 보수/진보의 싸움이었습니다.
즉 성경에 대해서 완전무오한 영적 문서로 보느냐(보수입장), 역사적으로 비평이 가능한 문서로 볼 수
있느냐(진보입장)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성서비평설을 수용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줄여서 '기장')"가
다시 분립됩니다.
신학은 오늘날 서울 수유리에 위치한 한신대학교가 중심이며, 신학적으로 열린 입장이다보니까
사회적으로도 진보노선을 취하게 되어 우리나라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 유명한 문익환 목사님이 한신대 출신이시고, 또 도올 김용옥 교수님도 바로 한신대 출신이십니다.
(참고로 서울 명동에 있는 기장측 교회 중 하나인 '향린교회'만 보더라도 예배 자체를 평택기지문제나,
4대강 문제, 세월호 분향소 현장에 나가서 집회로 대신할 정도로 진보적이므로 정말 이들을 단지 장로교란
이유로 개독이라 모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이후에도 장로교 분열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이번엔 바로 많이들 헷갈려하시는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입니다. 이 분열 문제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어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괜히 머리만 복잡하실
수도 있습니다. ^^;;; 이 건은 한편으론 신학문제에, 또 한편으론 기득권 싸움이 혼재된 양상의 분열로
저는 생각합니다.
일단 신학적으로는 남은 자들 중에서도 또다시 누가 좀 더 정통보수냐 하는 문제로 갈등이 빚어집니다.
특히 당시 WCC운동이라 해서 전세계 크리스트교회의 연합일치 운동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이것에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또다시 다툼이 빚어진 겁니다.
특히나 같은 크리스트교인 가톨릭에 대해서 인정하고 대화할 것이냐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물론 좀 더 보수적인 이들은 가톨릭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신학교설립을 둘러싼 사기사건 문제로 증폭됩니다. 즉 한국전쟁 후 교단은
평양신학교의 후신인 신학교를 남한에 세워야 했는데 그 부지매입과정에서 자금을 사기꾼에게
사취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때 가톨릭과의 대화를 반대하는 좀 더 보수인 쪽의 대표적인 인사가 부지매입의
최종책임자였으므로 이 문제는 신학문제를 넘어서서 교단 정치문제로 비화됩니다.
결국 1957년 가톨릭을 철저히 반대하는 보수적인 쪽이 사당동에 따로 신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이게 바로
총신대학교이고 이를 중심으로 한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줄여서 '예장 합동')"이 되는 것이며,
(웃기는 표현이지만) 그보다는 좀 덜 보수적인(자신들은 중도라 표현하더군요) 이들은 광나루에 장신대학교를
세우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줄여서 '예장 통합')"교단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합동측의 대표적인 교회로는 논문표절문제와 수천억원 대 교회건축 문제로 유명한 오정현 목사가
시무하는 '사랑의 교회', 성추행 문제로 시끄러웠던 전병욱 목사의 삼일교회, 또 그가 새로 세웠다는
'홍대새교회' 등이 있습니다.
또 통합측에는 이북출신 실향민들이 세워 대형화한 '영락교회', MB 및 고소영 내각으로 유명한 '소망교회',
요즘 통합 내에서 가장 크다는, 그러나 세습문제로 시끄러웠던 '명성교회'가 있습니다.
5. 물론 이후에도 분열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근데 특히 대부분의 분열은 '예장 합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장 합동보수" "예장 합동정통" "예장 합동진리"하는 식으로 오늘날에도 분열은 현재진행형이며,
결국 오늘날 예장 합동은 백 개가 넘는 군소교단의 연합체같은 모습이 되어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워낙 '정통보수'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성향이다보니까 '내가 좀 더 정통이고 변절한 니들과는
함께 할 수 없어'하는 입장에서 또 따로 나오고, 또 따로 나오고 하면서 오늘날에도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일단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가 제일 교권의 중심이긴 한데 여러 지역 여러 동네마다 크고작은 또다른
총회신학교들이 숱하게 눈에 띄는 이유입니다.
결론) 물론 교단만 가지고 교회를 평가할 순 없습니다. 가장 보수적인 합동이나 고신측 교회 중에도
매우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목회자나 교회가 소수라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반대로 기장측 교회 중에서도 사회문제에 진보적으로 나서기보다 교회 몸집을 불리는 데 더 열중하는
교회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장로교 통합측이 총회차원에서는 세월호 공문건이나, 국정교과서 반대입장에서 바람직한 일을 했어도
예하 교회들 중에는 코웃음치거나 반발하는 교회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교단만으론 교회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직접 개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가 어떤 성향의 활동을 하고있는지
접촉해야만 알 수 있겠지요.
따라서 장로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극우 개독이다 욕해서도 안될 것이고, 또 이번 일로 어느 특정 교단의 교회는
다 바람직한 교회다 성급한 인식을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음....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요약)
1. 원래 장로교는 평양신학교 중심의 하나였음.
2. 신사참배를 둘러싼 문제로 신사참배 반대하다 옥고치른 출옥성도 중심으로 1952년 '예장 고신' 분열.
3.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 입장차이 문제로 1953년 진보적인 성향의 '기장'교단 분열.
4. 남은 자들이 또다시 가톨릭에 대한 입장으로 보수/진보 신학논쟁과, 교단정치문제로 다투다가
1959년 좀 더 보수파인 '합동'과 자칭 중도파 '통합'으로 분열.
5. 주로 합동측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분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