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이 돼지가 죽은것으로 공표된 날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다.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 축하 기념식에서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로 유명하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1921년, 윤봉길은 오치서숙에 입학해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한다.
이때 학업 성적이 우수해 1923년의 오치서숙의 시 대회에서 장원하기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26년에 오치서숙을 졸업했다.
같은 해에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한 윤봉길은,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오치서숙 동창들과 뜻을 모아 야학을 개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르친 과목에는 한글, 역사, 수학, 과학, 농업 등이 있었으며,
윤봉길은 수업의 교재로 <농민독본> 을 저술했다.
윤봉길이 지은 <농민독본>.
윤봉길 하면 홍커우 공원의 의거 정도로만 기억되는데,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1929년에는 증산운동, 구매조합 조직, 토산품 애용,
부업 장려, 생활 개선 등으로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설립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어
일본 제국주의를 풍자하는 풍자극 <토끼와 여우> 를 공연, 많은 관람객을 불러모으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기도 했다.
같은 해 상부상조를 목표로 위친계를 조직하고,
월진회라는 농민단체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어 농촌 자활운동을 추진했다.
이 밖에도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는 한편,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암체육회를 조직해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추진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다.
윤봉길은 이 운동에 충격을 받고, 농민운동에서 민족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이듬해인 1930년, 윤봉길은 가출을 결심한다.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글귀만을 남긴 채, 가족 몰래 집을 떠나 만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윤봉길을 미행,
윤봉길은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 동안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다.
출옥 후에 만주에 도착, 남만주와 북만주를 돌아다니며 독립군 기지를 두루 살펴본다.
이때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 동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목격하고, 각지에서 계몽 강연을 했다.
하지만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상하이로 이동한다.
1931년 8월, 윤봉길은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 후 조선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한편,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해 활동했다.
한편, 국제활동에 대비해 영어공부를 하기도 했다.
1932년,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의 단원 이봉창이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지만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때 공장을 나와 일본인 거리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인들의 동향을 파악, 새로운 활동을 모색한다.
같은 해 겨울,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고 김구는 윤봉길을 받아들인다.
김구와 윤봉길.
윤봉길에 앞서 의거를 감행했던 이봉창은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등의 이유로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김구와 만나지 못할 뻔했지만,
김구는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의거를 맡겼다.
이봉창과 윤봉길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김구의 사람 보는 안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1932년, 다섯 명의 일본인 승려가 중국 군중들에게 구타를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커져, 많은 수의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의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중국에 전쟁을 걸 구실을 찾던 일본의 자작극이었다.
시라카와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
일본군은 천황의 생일 기념일과 상하이 점령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한다.
이 소식을, 김구가 전해듣는다.
김구는 이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질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됐다.
윤봉길은 다시 야채 장사를 하며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폭탄도 주문한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됐는데,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도시락을 지참하는 것이 허락됐기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물통 모양의 폭탄은 저격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은 자결용으로 제작됐다.
거사 3일 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한인 애국단의 입단 선서를 한다.
4월 29일, 한참 진행되던 승전 기념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한 조선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 폭발로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이 즉사했고,
제 3 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 9 사단장 우에다 켄키치,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이 중상을 입었다.
장제스의 말을 빌리면, 4억의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낸 순간이었다.
윤봉길은 의거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곧바로 헌병에게로 넘겨진다.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 윤봉길.
의거로부터 한달 쯤 뒤인 5월 28일, 윤봉길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11월 18일에 일본 오사카로 후송,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고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됐다.
이튿날인 12월 19일.
윤봉길은 총에 미간을 맞아 숨을 거둔다.
향년 25세였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 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의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암매장됐다.
윤봉길의 유해는 그로부터 20여년 뒤인 1946년 3월에 이봉창의 유해와 함께 발굴,
같은 해 6월에 서울에 도착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윤봉길 자신은 그의 의거가 있던 해에 소멸했지만, 그의 의거는 중국 등 전 세계에 알려진다.
조선인들을 일본인들의 앞잡이 정도로 취급하던 중국인들은, 이 일로 조선인들을 다시 보게 된다.
특히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4억의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라며 격찬했고,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윤봉길의 의거가,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 것이다.
장제스.
장제스 이전의 실권자였던 쑨원은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고,
장제스 역시 임시정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별다른 지원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윤봉길의 의거는,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벌어진 유혈사태인 만보산 사건 이후
사이가 좋지 않던 조선인과 중국인은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일본에 맞서 뭉치게 된다.
이런 윤봉길의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5년에는 윤봉길의사 기념 사업회가 설립됐다.
홍커우 공원의 윤봉길 기념비.
현재는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는, 어느나라의 관점에서.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윤봉길은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독립 투사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테러리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독립 투사들도 마찬가지가 된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위해 몸바친 자랑스러운 분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반정부주의를 위해 무모한 일을 벌인 테러리스트가 된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테러리스트' 들과 윤봉길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전의 '테러리스트' 들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도 '테러리스트' 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윤봉길부터는 중국인들도 '테러리스트' 가 아닌 '일본에 맞서 싸운 조선인' 이라고 불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의해 이전의 '테러리스트' 들도 새롭게 조명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까짓거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신경쓸 필요 없지 않을까.
아니,
일본에서도 테러리스트라고만 부르는 건 아니다.
윤봉길이 처형당한 가나자와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고,
많은 일본인들이 자국의 잘못을 인정하며,
윤봉길을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로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러야 한다면,
나는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가장 위대한 테러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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