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일 오전 서울 중앙대학교 정문 게시판에 중앙대 역사학과(사학과) 졸업생들의 선언문과 재학생들의 선언문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감사합니다, 근혜님…."
중앙대학교 사학과 졸업생 정아무개씨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게 감사할 일이 생겼다. 정부와 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덕에 최근 졸업생들이 시대와 나이를 초월하여 뭉쳤기 때문이다.
정부가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한가운데,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5일 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같은 과 73학번부터 10학번까지의 졸업생 207명이 모였다. 한 88학번 동문이 SNS를 통해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서명하자고 제안했던 것이 시초였다. 이 제안을 이어받은 다른 동문이 SNS 페이지를 만들었다.
동문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인연이 없을 것 같던 10학번 후배들까지도 동참했고, 나흘 만에 10학번 동문의 고교 은사님인 73학번 동문까지 동참했다. 한 동문이 선언문을 작성하고, 페이지를 통해 함께 의견을 모아 나갔다.
그렇게 졸업생 207명의 이름으로 완성되어 21일 발표된 선언문에서 이들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저항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짧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서명, 전율 느꼈다"
처음 제안을 한 88학번 김태정씨는 "전율을 느꼈어요, 같은 과라지만 20~30여 년의 시간적 거리도 있고 다들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 짧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서명해준 것을 보면서"라고 말했다. 사실 이 207명에게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졸업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세대도 다르고,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해도 학문과 아무 관련 없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런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다렸다는 듯 서명을 하고, 다른 동문을 모으고, 의견을 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들에게는 '함께 행동하기의 힘'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 셈이다.
이들은 이 경험이 단순한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SNS 페이지를 만들어 제안을 실행에 옮긴 99학번 이용석씨는 SNS를 통해 "첫술인데, 배가 부르기까지는 않더라도 제법 맛난 음식을 먹었다"라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이렇게 맛난 음식 먹다 보면 우리 모두 미식가가 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소감을 남겼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행동을 시작한 것이 큰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대학가와 학계를 중심으로 국정교과서 반대 및 집필거부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함께 행동하기의 힘을 느끼는 이들이 비단 중앙대 역사학과(사학과) 졸업생들뿐만은 아닐 테다. 막무가내로 국정화를 추진하는 박근혜 정부도 여기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중앙대 역사학과(사학과)에서는 교수 전원의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거부 선언에 이어 재학생들의 국정화 반대선언, 졸업생들의 반대선언이 함께 이어져 눈길을 끈다.
이들 졸업생 일동은 선언을 통해 ▲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 함양을 목표로 하는 역사 교육에서 '다양한 관점(해석)의 존재'는 본질적 요소이며 ▲ '긍정의 역사관'을 역설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주장과는 달리,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합리적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역사학/역사교육에서는 '자긍심'이나 '자학'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 정부와 여당은 학문적 성취와 역사교육을 통한 민주 시민 양성을 위해 애쓰고 있는 역사학자와 역사교사에 대한 모욕과 비방을 즉각 중단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선언문 말미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한 사회적 논쟁의 본질은 이념 논란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역사를 공부한 역사학도로서, 민주주의 국가의 상식적인 시민으로서", "특정 세력의 정치적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 편찬되는 소위 '올바른 역사 교과서'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