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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길, 노무현의 길
(서프라이즈 / 개곰 / 2008-11-13)
일본에서 태어나 차별 받다가 조선놈이 되려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가 호기심으로 형과 함께 방학 때 일본을 통해서 방북을 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7년형을 살고 다시 10년 감호처분을 받고 꼬박 17년을 옥살이 한 서준식을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악랄한 전향 공작과 고문만은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도 장기표, 이신범처럼 같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내란 음모죄로 끌려들어온 학생운동권과 서준식처럼 간첩죄로 끌려들어온 사람에 대한 대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서준식은 감옥 안에서 너 같은 간첩 때문에 학생운동이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소리를 운동권 학생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60년대 말에 서준식이 한국으로 유학을 온 것은 민족 의식 때문이었지만 막상 한국에 와서 그는 사회 현실에 눈떴다.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구걸을 하는 아이들은 젊은 서준식을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바꾸어놓았다. 그가 민족에 끌린 것은 일본에서 모멸받는 인간 집단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지, 단지 조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민족 안에서도 더욱 모멸받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은 어릴 때부터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했던 서준식을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서준식은 밥을 안 주는 것보다 책을 안 넣어주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을 만큼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감옥에서 본 비전향 장기복역수들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 출옥하고 나서도 글쓰기를 미루고 인권 운동에 몸을 던졌다. 감옥 안에서 말단 간수에게까지도 "적"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의 경직성이 때로는 거북하기도 했지만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우리 안에서 썩는 그들을 우리 밖으로 나온 서준식은 같은 인간으로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서준식은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단체를 끌고 가면서도 적잖은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이후 시민운동단체는 상근직 중심으로 굴러갔고 상근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와야 했다. 그리고 자금을 끌어올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활동을 자꾸만 벌여야 했다. 마치 재벌이 문어발처럼 확장하는 것처럼 시민단체도 여기저기로 일을 벌여나갔다. 그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고 서준식은 생각했다.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돈 받고 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운동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시간을 내어 자원봉사를 하듯이 해야 한다고 서준식은 생각했다.
올 1월 출간된 <서준식 옥중서한>. 이 책에서 |
무엇보다도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은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서준식의 생각이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떤 보상을 바라고 사회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서준식은 생각했다. 그러니 운동에 전념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웬만큼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고 싶었던 주변 사람들에게 서준식은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고 차츰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후배들도 고달픈 길을 은근히 강요하는 이런 선배보다는 여기저기서 돈을 시원스럽게 끌어오는 잘 나가는 시민단체 대표들이 더 유능해 보였을 것이다.
마치 자원이 무한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구라는 유한한 자원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앞날에 대해서 나도 걱정이 크다. 서준식에 비할 바야 아니겠지만 나도 문명의 안락을 누리지 않으면서 웬만큼 살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에게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적 힘이 없어서 식민지를 겪은 한국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적고 인구는 많은 한국은 개방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서준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 가난하게 살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가 몸담은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정신성만을 추구했던 조선처럼 가난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은 아직도 짐승들이 문명국 행세를 하는 사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들은 위선자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서준식 같은 사람을 존경하는 척해도 막상 서준식이 가려는 가난의 길을 같이 걸어갈 마음은 없다. 그들은 가난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노조가 비정규직 동료들의 노조 가입에 반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위선적인 한국 진보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그들은 말로는 자본가들을 욕하지만 실제로는 자본가들보다 더 그악스러운 물질의 노예인 것이다.
서준식처럼 간첩으로 몰려서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옥한 재일교포 가운데 상당수는 조국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서준식은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그러나 서준식은 결국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에서 물러났다. 더없이 위선적이고 천박한 한국의 진보에게 가난을 감수하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서준식 같은 사람은 불편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이상적 진보주의자를 짓밟고서 그들은 오늘도 진정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노무현이 닦아놓은 자유무역협정을 저주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이비들에게는 서준식 같은 진정한 이상적 진보주의자의 길도 노무현 같은 진정한 현실적 진보주의자의 길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거기서는 국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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