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더이상 인기척이 없는 마을을 나서며 5살도 안되어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의 낡은 코드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한다.
소녀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이 슬퍼 보인다.
"응. 아주 멀리. 멀리..."
그 날은 왠지 다른 날에 비해 더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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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늦은 밤,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가운을 걸쳐 입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매우 초췌해 보인다.
램프를 살그머니 켜 들고 문으로 걸어 나갔다.
삐걱 거리기만 하며 잠기지도 않는 문을 열고 보니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잡화점 주인이 보인다.
순간 이 사람이 날 죽이려는게 아닐까 두려웠다.
"아이고 의사 선생님. 우리 아이가.. 우리아이가..."
우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소리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를 따라 들어서니 온 집에 피 냄새가 진동했다. 방 가운데엔 날카로운 것으로 손목이 길게 그어진 죽어가는 소년이 보인다. 가까스로 지혈을 했는지 다행히도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핏줄을 따라 세로로 그은 터라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치료를 해도 죽는다.'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발을 떼어 소년에게 다가갔다.
"실과 바늘을 가져오세요. 그리구 아주머니는 저희 집에 가서 집사람에게 통증 억제용 약초를 얻어 오셔요. 집사람이라면 잘 구분해서 줄 겁니다."
소년의 이마를 짚어보니 이미 열이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 어차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집안의 모든 실과 바늘이란 다 가져온 듯하다. 세상에서 그렇게 절망적이고 슬퍼 보이는 모습을 본 적 없다. 두려움인지 괴로움인지 어깨는 움츠러들고 몸은 덜덜 떨고 있는 게 내가 더 괴로워진다. 가장 짧고 가는 바늘과 얇은 실로 상처를 꾀매 갔다. 방바닥에 짚고 있는 무릎의 가운으로 차갑게 식은 피가 스며든다. 점점 딱딱해지는 상처 부위를 억지로 바늘을 끼워 가며 봉했다. 양손이 아니라 한손만 베었다면 살았을 수도 있었겠다. 맘 속 한 구석이 아파온다. 괜히 모르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 때,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약초..약초...가져..왔습니다."
그 먼 거리를 얼마나 달렸는지 헉헉 대며 말도 못 이어가며 약초를 건내 주는 손에선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짓무른 약초 냄세가 풍겼다. 약초를 짓이겨 상처 부위에 대고 붕대를 감았다. 치료는 끝났다 싶어 소년의 맥박을 짚어봤다. 뛰지 않는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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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되어 소년의 장례식을 치렀다. 어린 나이에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으면 마을 밖 먼 산의 나무 아래에 묻는다. 다음 생애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평안하고 오래 살라는 뜻에서 말이다. 산으로 가는 도중 장례사가 살며시 말해줬다.
"쯧쯧.. 외동아들이었는데.. 시체를 닦으며 봤더니, 심장을 칼로 두 번이나 찌르렬 했더군요. 스스로 말입니다. 아무래도 안되니 손목을 그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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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가 끝나고 마을의 중앙부에 위치한 군막사를 향했다. 경비병을 밀치고 지휘관 막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책상을 쾅 치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지휘관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내 뒤를 뒤따라와 밖으로 내쫓으려는 경비들을 물러가게 하고는 대답했다.
"실험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거지요."
"실험만 한다고 했지, 그 병을 풀어놓는다고는 하지 않았잖습니까!"
지휘관은 미소를 띄우고 일어나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알기론 당신도 감염 되었습니다. 아마 이 근방의 사람들은 모두 감염되었을 겁니다."
그리고는 문을 향해 외쳤다.
"경비! 쫓아 내거라. 다신 들어오지 못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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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가 얼마나 힘차게 내던지는지 막사 앞마당을 두바퀴나 굴렀다. 몸에 흙을 털고 일어나 그들을 저주하며 집을 향해 뛰어갔다. 잠복기간이 얼마가 되든지 해독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다, 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발만 동동 구르는 마을 사람들을 제치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다.
"제인! 제인!"
아내의 이름을 외치면서도 해독제를 찾았다. 살고 싶다. 집은 불타기 전에 이미 누군가 망가트린거 같았다. 해독제는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아내를 찾아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길에 몸이 그슬고 옷이 그슬린다. 매운 연기를 제치고 마지막 희망으로 옷장을 열었다. 아내가 있었다. 날카로운 칼에 베여 죽은 채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를 감싼 채로. 집이 무너진다. 마음이 무너진다. 정신을 잃을 때 쯤, 누군가의 손에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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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중독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몸 안쪽이 찢어져 가는 느낌이 난다. 조그만 감각도 고통으로 다가오자 괜히 억제할 수 없이 화가 난다. 밝음에 눈이 아파 눈을 뜰 수 가 없었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눈꺼풀 아래로 들어오는 빛마저 너무 밝다. 아프다. 죽고 싶다. 몸을 두르고 있는 옷을 찢어 던졌다. 몸의 살갗도 그 무엇도 아픔으로 다가온다. 다행인건 아직 죽음과의 거리가 꽤 되어보인다는 것이다.
"빠? 압바?"
내 아이, 내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눈만 반쯤 뜬 채로 소리를 찾아 갔다. 내가 죽을 수 없는 마지막 이유. 내 아내 제인, 그녀가 보호하려 했던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발이 걸려 넘어지고, 벽에 머리를 찧어 가면서도 소리를 찾아 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반쯤 뜬 눈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이의 상처. 그렇다. 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못 느꼈다. 마지막 희망이다. 세계의 어딘가에는 고통을 견뎌낼 사람이, 그리고 고통을 못 느낄 사람이 혹은 이 병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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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을 나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해독제는 들지 않았나 보다. 군부대에도 시체가 널려 있는 걸 보니. 내가 망쳐버린 세상을 내가 다시 일으키고 싶다. 독은 어떻게든 퍼져 나가겠지. 오늘도 조그마한 불빛만을 가지고 희망을 찾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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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딸아이의 모습이 더이상 곁에 없는 내 아내와 겹쳐 보인다. 벌써 몇년이나 흘렀는데, 몸의 고통도 마음의 고통도 줄질 않는다.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응. 아주 멀리. 멀리..."
그 날은 왠지 다른 날에 비해 더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