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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cahdol?Redirect=Log&logNo=8931282&from=postView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로마군은 최초로 직업군인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를 원정한 병사들도 모두 직업적인 전사들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부대를 재산등급에 따라서 3등분하지 않았다. 대신에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단병(레기오나리)와 속주민인 보조병(아욱실리아)로 구분했다. 보조병은 예전의 경장보병인 벨리테스가 발전된 형태인데 예전처럼 허술하게 무장하지는 않고, 대부분 체인메일을 입었다. 기병은 전에는 귀족 자제나 동맹국 병사로 구성되어서 전장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았으나 2차 포에니 전쟁때 한니발의 기병에게 쓴 맛을 본 이후로는 로마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기병은 등자 없이도 기마에 능한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인이 제공했다.
이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내전이 종식되면서 로마군은 다시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로마군을 이전과는 달리 상비병 체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변화인데, 국경지대에 늘 배치되는 현대식 상비군이 처음 탄생한 것이다. 예전 로마군은 직업군인으로 이행한 뒤에도, 전쟁이 터질 때에만 병사를 모집하여 곧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제정으로 이행한 뒤 군대의 임무가 공격에서 방어로 되자 대규모의 상비군이 필요하게 되어 이전의 방식은 폐기하게 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양대 방어선이 된 레누스 강과 다뉴브 강에는 군단기지가 늘어서게 되고 이곳에서 군인들은 실전을 능가하는 맹훈련을 받았다. 이때 로마군이 대부분의 현대 군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군대에 들어온 신병들은 엄격한 훈련을 통해 전사로 거듭난다. 이전의 로마군은 시민이 바로 군사가 되어 곧 전장으로 나갔으나 새로 편성된 로마군은 예전보다 훈련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특히 백인대장들은 신병들을 매우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군대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구타의 전통도 이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3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치세 때에 이르러 로마 군인들은 이전의 체인 메일(로리카 하마타) 대신에 판금제 갑옷인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입기 시작했다. 이 갑옷은 제정기 로마군의 표준 복장이 되었다. 국가가 전 병사에게 군복을 지급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로리카 세그먼타타는 쇠를 얇게 펴서 띠처럼 두른 갑옷인데, 영화 등을 통해 우리에게도 가장 익숙한 갑옷이기도 하다.
이것이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입은 제정기 로마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출처: 로마니타스
) 투구의 모습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의 투구로 변했다.
이 사진은 외국의 한 리인액트먼트 클럽에서 재현한 제정기 로마 군단병이다.(www.legionsix.org)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행사 한 번 정도 하면 좋겠는데, 아직은 한국전이나 베트남전 재현밖에는 못하는 것 같다. 하긴 비용이 만만치 않을테니까..
어쨌든, 칼과 창은 예전과 같은 글라디우스와 필룸인데, 방패는 그 형태가 변해서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이 큼직한 장방형 방패를 스쿠툼이라고 한다. 만드는 방식은 공화정 때와 같이 목제 두개를 겹쳐서 만들고 가운데와 테두리를 쇠로 보강한 방식이다. 방패에는 각 군단을 상징하는 무늬를 그렸다. 방패가 크기 때문에 늘어놓아 견고한 대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로마군의 주적이 된 게르만족은 체력에서는 로마군을 압도했지만 로마군의 견고한 대형 앞에서는 무력했다.
또한 로마 군사들은 짧은 병사용의 망토를 걸쳤다. 제정기에는 이것이 군인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사굼(sagum)이라고 부른다. 백인대장들은 좀더 고급의 사구룸을 입었으며, 군단장 급의 장교들은 길게 내려오는 선홍색의 멋진 망토를 둘렀다. 이것을 파르다멘툼이라 부른다. 제정기의 로마 군사들은 때때로 바지를 입기도 했다. 공화정때에 갈리아인들과 대결했던 로마인들은 바지를 야만인의 풍습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추운 지방에서 근무해야 하는 병사들은 짧은 투니카 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몸에 붙는 바지를 투니카 밑에 자주 입었다.
사진의 군단병이 착용하고 있느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입으면 무척 무거워보이겠지만, 철판이 얇기 때문에 의외로 가볍다고 한다. 실제로 로마군 중장보병은 제법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로마 보병은 전장에서 여러가지 대열을 이루어 싸웠다. 게르만족은 대게 대열 없이 돌격하거나 아니면 쐐기대형을 이루어 공격해왔다. 이러한 쐐기대형은 돌격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후 고트족이나 프랑크족도 애용했다. 로마군은 이러한 돌격대형을 상대할때 우선 필룸을 던져 기세를 꺾은 다음 방패로 앞을 가리고 검을 연달아서 찔러 적을 쓰러뜨려 나갔다.
야만족과의 전투시에 로마군이 가장 많이 취한 대형은 역시 방패를 이용한 밀집대형이었다. 로마군의 유명한 대열 중에 귀갑 대형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가로 4명 세로 6명 정도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정면과 양 옆을 방패로 빈틈없이 막고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올려 완벽한 거북이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이 높은 지대에서 화살을 쏘아댈때나 공성전에 주로 사용되었다.
귀갑진(테스투도)을 취한 로마 군단병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대형을 통해 적의 투석이나 투시에 의한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제정기 로마의 전사들은 이후 200년동안 로마의 방어선을 지키며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3세기부터 로마 제국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거치며 방어선은 무너졌고, 제국의 경제는 잦은 인플레 현상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로이 등장한 고트족, 반달족들이 제국의 영토를 위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대수술을 단행했다. 이미 쇠퇴할대로 쇠퇴한 제국이었지만, 그의 시도는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후 탄생한 동로마 제국은 다시 천년을 살아남게 된다.
어쨌든 이 시기(4세기)의 로마군은 마지막으로 큰 문제로 직면하게 되었다.
로마군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병사 개개인의 사기가 계속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로마군은 예전의 투철한 시민정신과 긍지로 무장한 전사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야만족의 빠른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이 중요시되면서 보병의 가치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로마의 경제 위기는 심각했다. 로마군은 이전처럼 중무장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야만족이 군대에 다수 유입되면서 로마군의 장비도 야만족화 되었다.
제정 말기의 로마군은 이전처럼 갑옷을 입지 않았다. 이들은 간단한 투구를 쓰고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필룸과 글라디우스 대신에 몇 개의 다트와 장검을 사용했다.
제국 말기의 서로마 보병. 새로 탄생한 동로마 제국은 전과 마찬가지로 중무장한 군대를 유지했으나 서로마 제국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대형도 야만족처럼 쐐기대형을 하고 싸웠다.
그러던 중 마침내 로마 보병의 종말이 찾아왔다. B.C 378년. 로마의 황제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플에서 대규모의 고트족에게 맞서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포진하고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고트족은 이미 동양에서 들어온 등자를 이용한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기병들은 예전과는 달리 말 위에서도 힘차게 칼을 휘두를 수 있었으며, 말을 오래 탄 뒤에도 느끼는 피로가 훨씬 덜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참한 종말을 맞았다. 고트족 기병에게 포위된 로마군은 움직일수도 없을만큼 밀집하여 완전히 전멸했다. 발렌스 황제도 전사했다.
기병이 보병을 꺾은 이 전투 이후, 보병은 다시 뒤로 밀려났다. 기병의 지위가 점점 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가 시작되면서 기병은 전장의 주인이 되었다. 보병이 다시 전장의 주인이 되려기 위해서는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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