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A Bittersweet Life, 2005)은 김지운 감독의 느와르 장르 영화로
배우 이병헌, 김영철, 신민아 등이 출연한 작품이다.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감상했을법하다 생각되는데
흥행 면에선 실패했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은 선우(이병헌)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혜능(慧能) 스님의 자서전적 일대기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일부 변형한 인용구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이 인용구는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꿰뚫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하도록 한다.
주인공 김선우(이병헌)는 호텔 라운지의 지배인으로 등장한다.
초콜릿 푸딩과 설탕을 넣은 커피를 달콤하게 즐기며
유리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그의 모습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적 면모가 엿보인다.
바닥에 작은 쓰레기가 떨어진 것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 선우.
그는 완벽주의자의 성향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끊임없이 옷매무새를 신경 쓰는 모습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 그를 신뢰하는 조직의 보스 강 사장(김영철)은 본인이 싱가포르로 출장가는
3일 동안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의 감시를 은밀하게 지시한다.
그렇게 강 사장의 애인과 만나게 되는 선우는, 그녀가 머리를 넘기는 모습 등에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흔들림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사랑도 설렘도 아닌,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보았을법한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그런 감정을.
결국 희수의 외도를 목격하게 되는 선우는 곧바로 강 사장에게 보고하려 하지만..
희수의 하얀 어깨선이, 머리를 넘기던 모습이
첼로 연주를 하던 모습이 선우에게 계속 미세한 흔들림을 준다.
결국 선우는 강 사장에게 연락하지 못하고, 희수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다.
오늘 일은 없던 일이라고, 잊으라고.
하지만 출장에서 돌아온 강 사장은 희수에게서 불안함을 읽는다.
아마 이때 본인에게 연락하지 않고 사실을 숨기려 한 선우의 행동을 예측하지 않았을까.
강 사장은 선우에게 묻는다.
강사장- "왜 그랬냐. 왜 전화 안 했냐. 너 그런 놈 아니잖아. 도대체 이유가 뭐냐."
하지만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이 잘못한 것. 즉, 흔들린 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강 사장은 분명 연락하거나 알아서 처리하거나, 두 가지의 선택지를 주었고
선우는 알아서 처리한 것뿐이기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땅에 묻혔다가 살아 나온 선우는, 이유를 다시 묻는 강 사장의
질문에 답하지만 강 사장은 진짜 이유를 말하라 한다.
선우- "약속만 지켜진다면.. 모두가 좋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강 사장-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너.. 너 그 애 때문이냐?"
여기서 영화의 첫 내레이션인 육조단경의 인용구를 통해
스승과 제자를 강 사장과 선우로 치환이 가능하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선우는 정작 자신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모르고 나뭇가지가
움직이는지 바람이 움직이는지 궁금해하지만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강 사장은 선우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강 사장이 원한 건 선우가 스스로 흔들린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그랬다면 어쩌면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용서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다음의 강 사장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강 사장-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근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란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아갔어요.
잘 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번 일은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이 대사를 보면, 선우의 마음이 흔들렸던 흔들리지 않았던,
강 사장에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선우가 그것을
인정했으면 쉽게 끝났을 일이란 거다.
일단의 위협에서 벗어난 선우는 몸을 추스른 후 끝까지 가보겠다 다짐하고
강 사장 역시 이유가 어쨌든 끝은 봐야겠다며 영화는 치명적인 끝을 향해 치닫게 된다.
총기를 구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마찰을 겪고
(이 과정에 죽은 남자는 영화의 마지막에 선우의 목숨을 끊는 남자-에릭의 형이다.)
백 사장(황정민)과 문 실장(김뢰하)에게 복수한 선우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끝내 강 사장과 만나게 된다.
선우-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강 사장-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강 사장-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흔들린 거냐. 그 애 때문이냐?"
강 사장은 마지막까지 선우가 자신의 잘못(흔들림)을 인정하길 바라고 있다.
그가 말한 모욕감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선우에게 느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선우는 자기애(나르시시즘)가
강하고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그가 자신이 흔들렸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을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쉽게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초반의 나르시시즘을 투영하는 장면처럼, 유리면에 비친
자신을 보던 선우는 결국 강 사장을 총으로 쏜 뒤에 나직이 속삭인다.
선우- "그렇다고 되돌릴 수 없잖아요."
강 사장을 죽인 후 본인도 치명상을 입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는 선우는 아주 작게 속삭인다.
선우- "너무 가혹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자신의 흔들림을 나직이 인정하는 대목이다.
찰나의 흔들림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단 의미가 아닐까.
첼로를 연주하던 희수의 모습을 보며 웃음 짓던 선우의 얼굴을 보면
희수는 그에게 초콜릿 푸딩과 설탕을 탄 커피처럼 달콤한 존재였을 거다.
비록 본인이 그 사실을 마지막에 인정했지만 달콤한 인생을 살고 싶었던
그를 순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충분했던 것이다.
선우의 목숨은 주된 줄거리에 관계없는 제삼자(에릭)에게 끊어지고
선우의 목소리가 처음과 같이 내레이션을 읊조리며 영화는 막이 내린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의 내레이션과 대조되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상반된 입장이다.
제자가 달콤한 꿈을 꾸어서 운다 하니, 스승은 왜 슬피 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본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모르는 제자와 같다.
강 사장이 왜 자신에게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한 선우처럼
강 사장은 왜 선우가 흔들렸는지(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달콤 씁쓸한 인생(A Bittersweet Life)이다.
이는 영문 제목이 국내 제목보다 영화의 내용을 더 적절하게 표현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선우는 분명 달콤한 인생이었지만, 찰나의 흔들림으로 씁쓸한 인생으로 전락한다.
극 중, 문 실장의 인상 깊은 대사가 하나 있다.
문 실장- "가만 보면, 인간이란게 x발, x도 아무것도 아니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잖아?"
찰나의 미세한 흔들림에 달콤했던 인생이 삽시간에 씁쓸해진 것을 보면,
이 말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까.
인생은 원래 달콤할 수도 있지만 씁쓸할 수도 있다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