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5월 곡성이 상영된 이후에 매우 많은 리뷰와 분석글들이 있었죠.
제가 그 모두를 뒤엎어버릴 만한 분석을 이 자리에서 내놓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해석을 할 때의 접근방법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해볼까 합니다.
아무래도 곡성을 둘러싼 논란이 쉽게 점화되는 것이 이 해석방식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아서요.
지금부터 시작되는 내용은 "이것이 정설이다!" 라는 의도보다는
제 주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점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의 제 경험상에는 곡성의 리뷰나 분석글들이 주로 영화가 보여주는 설정들 간의 연관성과 사건들의 구체적인 흐름을
완벽한 하나의 체계로 완성시키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아쿠마가 불질러버렸다고 말했던 피해자의 사진들이 일광의 트렁크에서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일관된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나?"
라던지, "무명이 입고 있는 예비군 잠바는 종구가 마주쳤던 좀비(같은 것)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예들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엔) 곡성의 분석들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내용을
마치 실에 구슬을 꿰듯이 일관된 흐름으로 완벽하게 엮어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으로는 아마 감독이 포스터에 '현혹되지 말라'고 카피를 쓴 것은 아마 관객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하나의 완성된 서사에 대한 집착'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감독이 처음부터 서사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의 이 추측이 사실과 맞아떨어진다면,
곡성의 해석은 감독이 영화에 뿌려놓은 숱한 떡밥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성을 해석할 때 감독이 던진 떡밥들을 어느 정도 걸러내지 않고는
감독의 미끼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재 제 지론입니다.
서사의 완결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해석이 산으로 가거나 부분적인 완전함 밖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종구 뿐만이 아니라 관객조차 현혹하는 숱한 떡밥들 중 그 중요성이 낮은 것들은
영화자체가 장르물의 성격이 있는 만큼 장르적 성격을 드러내고 이야기의 템포를 조절하기 위한
부차적인 용도로 활용된 것으로 보고 주제의 해석에서는 배제시킨 뒤,
중요한 핵심적인 설정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한 해석을 유발하지 않고
보다 더 정확한 해석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부차적인 용도의 떡밥의 예로는
"종구가 동네 친구들과 외지인의 집으로 쳐들아가서 만난 좀비 같은 것은 아쿠마의 소환물인가?"라던지,
"종구의 딸이 발악하는 것은 아쿠마가 빙의했기 때문인가? "같은 것이 가장 적당한 것 같네요.
지금부터는 이러한 해석의 관점을 바탕으로 제 나름의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저는 곡성을 해석할 때 '외지인 - 종구 - 무명' 이 중심이 되는 삼자구도를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영화 초반에 보면 종구가 살인 현장을 여러곳 방문하는 것을 보셨을 텐데요.
그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외지인과 무명이 종구가 아닌 다른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도
서로 대립각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종구의 집이 파탄나는 과정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관객에게 전달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광의 아쿠마의 수하인가? 아닌가? 보다는
'아쿠마와 무명의 사이에서 종구는 선택의 딜레마에 처해있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앞서 종구가 직접 확인했던 다른 마을사람들의 사례에 적용하여서 논지를 넓히게 되면
우리가 곡성에서 종구를 지켜봄으로써 보게 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처해있는 '무지함의 운명'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종구가 일광의 주장과 무명의 주장 사이에서 겪는 딜레마는
다시말해 종구의 이웃이 처했던 운명이기도 하고
그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의 운명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잠깐 설정의 연관성에 살짝 초점을 두자면
일광을 선택한 종구가 사실상 아쿠마가 원했던 결말에 처했다는 점에서
저는 일광이 본질은 아쿠마이되 무늬만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훈도시' 와 '사진' 이 두 떡밥은
일광과 외지인이 단지 무늬만 다른 것일 뿐임을 알려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마치 이음동의어 처럼말이죠.
그 떡밥에 대한 해석이 맞나 아니냐는 별개로 다시 한번 보면,
사실상 딸이 어머니와 할머니를 죽이는 사건은 우리가 공유하는 상식 속에선 심각한 범죄이며 패륜이기 때문에
그러한 나쁜 결과가 따르는 선택을 권유한 일광과 종구의 딸을 지배한 외지인은 인간세상에 일어나는 반인륜적 행위들,
즉 인간의 악한 의지에 근접해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외지인은 직접 아쿠마라고 밝히는데...)
반면에 무명은 종구의 집에 작은 꽃을 걸어 아쿠마를 잡을 덫을 놓아
종구의 딸이 어미와 할애미를 죽이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좋은 결과가 따르는 행위들,
즉 '인간의 선한 의지'에 근접해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씀드린 '외지인 - 종구 - 무명'의 삼자구도는
최소한 '악한 의지 - 인간 - 선한 의지'의 삼자구도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만약 좀더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선 - 인간 - 악' 이 될 수 있겠지요.
* 종구가 무명의 말을 듣지 않고 꽃이 걸려있는 대문을 넘자마자 꽃이 시들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시들어버린 꽃은 이전에 종구가 보았던 사건현장들에도 걸려있었죠.
그들도 종구처럼 무명을 믿지 못해 참담한 결과를 맞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곡성이 보여주는 인간의 운명은 자연스럽게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어느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함의 운명'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삼자구도를 단순한 도식적 해석으로 만들지 않는, 빠트려서는 안될 설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포스터에서 제시된 '현혹'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영화의 결말인 종구의 불행을 기준으로 앞서 제시된 서사를 통틀어서 생각해보시면
아쿠마는 외지인의 모습과 일광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종구를 현혹하고 있습니다.
영화내내 종구의 옆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무명이 아니라 일광이었지요.
뿐만아니라, 무명은 자신의 주장을 고작해야 2번.
그것도 그 어떤 꾸며진 말이나 행동이 없는 직설화법으로 간결하게 종구에게 전달할 뿐이지만,
일광을 보자면 종구의 딸내미가 외지인이 놓은 덫에 걸려버렸다던지, 그놈에게 살을 날린다던지 말로써 현혹할 뿐만아니라
독을 깨부수거나 시끌벅적한 굿을 하는 둥 갖은 제스쳐를 사용하면서
종구에게 영향력을 아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무명이 처음 종구에게 다가갈때 한참동안 멀리 쭈그려 앉아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대비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저는 홈쇼핑이나 용팔이의 교훈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갖은 말과 제스쳐로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일 수록 그 이면엔 검은 속내가 들어있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을
이 영화 곡성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곡성에서는 한 집안의 가장이요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마을의 경찰관이기도 한 종구는
무당인 일광의 현란한 말과 카리스마있는 제스쳐에 그대로 넘어가고 맙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부족함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인간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보는 게 적절치 않나 생각합니다.
설득의 기법으로 보았을 때, 무명은 단지 자신의 메세지만을 곧이곧대로 전달했을 뿐이지만
일광은 독을 깨부수고 쌀점을 보고 굿을 하는 둥의 행동으로 카리스마를 구축하는 설득기법을 계속해서 활용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종구는 그런 일광의 말이 무명의 말보다 훨씬 더 설득력있게 와닿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곡성이 단순히 선과 악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딜레마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은 선과 악의 사이에서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까지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마케팅 교양서에서 봤던 표현인데요.
"소비자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아래의 표현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마케터는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
사실 소비자가 좋은 선택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짜 좋은 선택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마케터들이 소비자들에게 마케팅을 펼쳐
광고주의 상품이 좋은 선택임을 어필해야한다는 뜻을 담은 그런 표현입니다.
이를 곡성에 적용하면, 영화에서 종구가 원한 것은 그저 행복한 가정입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감독은 아내와 장모의 시체를 확인하고 괴물로 변해버린 딸을 마주한 종구를 보여준 뒤,
회전목마를 같이 타면서 웃고 있는 종구와 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종구가 딸을 향해 품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면서 그가 딸과의 관계에서 이루고자 했던 욕망(욕정이 아닙니다.)이기도 하죠.
그러므로 영화에서 종구가 외지인의 집에 쳐들어가고, 일광에게 굿을 시키고,
마지막에 일광의 말을 믿고 무명의 손을 뿌리친 채 집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모두 딸과의 관계를 자신의 이상향적인 형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종구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쪽이 아닌
자신이 그렇게도 피하고자 했던 최악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종구는 아쿠마의 현혹을 믿은 대가를 가족의 파멸로 받게 된 것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를 할애해서 그의 평범함을 코믹하게 관객에게 전달했었고,
마지막 씬에서는 평범하게 딸과 행복하게 살고싶은 종구의 이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인간이 선과 악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평범함.
즉 인간으로서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조건들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말이 굉장히 잘통하지만 나를 해하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과
말이 하나도 안통하지만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은 처음엔 전자의 사람에게 이끌릴 것입니다.
적어도 한 번 데어보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 잘통하는 사람에게 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곡성의 종구 역시 그런 인간의 일반적인 조건을 공유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하고 진실하지만 사람을 휘어잡지 못하는 무명의 말을 결국은 무시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곡성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면 종구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집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무명의 뒷모습을 담은 장면을 꼽습니다.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무명의 무너지는 마음이 저는 곡성의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것을 알고 그것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최악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오롯이 지켜봐야 하는 자의 슬픔이 그 장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적고보니 그 유명한 한국인의 '한의 정서' 이야기인듯 한데...)
그리고 이것은 아마 감독의 현실인식과도 맥이 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독의 눈에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설령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신이 있고 악마가 있다고 한들
인간이 그것을 구별하지 못해 만들어지는 혼돈의 공간인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영화 <곡성>에 나오는 전라남도 곡성이란 장소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혼돈스러운 현실을 무속신앙을 통해 도식화시켜 나타낸
하나의 알레고리*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알레고리가 기독교 미술(노잼의 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곡성은 재밌고 흥미로운 편인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으니까요.
길었던 제 분석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에게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알레고리: 스노우볼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스노우볼이 눈쌓인 교회와 눈 쌓인 나무, 눈사람등
상징성이 있는 장치를 통해 눈이내린 목가적인 풍경이 안겨주는 따뜻함 감정을 선사해주는 것 처럼,
알레고리는 상징성이 있는 사물들을 조합하여 메세지를 만들어내는 그림을 말합니다.